에세이/가계부 대신 에세이

박제도 중독이다 - 맥도날드 1955버거

@blog 2024. 11. 15.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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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날드 메뉴 중 늘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상하이 스파이시 버거, 빅맥만 돌려 먹던 내가 처음으로 1955 버거를 먹어봤다. 왜냐면 맥도날드 쿠폰중에 1955 버거만 할인이 되가지고 말이지. 그래서 저녁밥 대신 1955 버거를 포장하고 집에서 한입 베어물었는데, 아... 분명 쿠폰 사진에는 어니언 그릴이 한가득 넘쳐 보이던데 막상 까보니 어니언 그릴이 5줄기 밖에 없는게 말이 돼? 물론 과대 광고가 맥도날드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감안해보려고 했지만 필터란 필터를 다 쓴 소개팅 상대를 실물로 만난 느낌, 설마 직원이 실수해서 잘 못 넣은 게 아닐까라는 음모론적이느생각까지 하게 됐다. 순간 화가 나서 "인터넷에 공론화 해버릴까..." 라는 유혹이 스믈스믈 들었지만, 됐다 됐어.이런 거 공론화해봤자 하나도 소용없거든. 어차피 현실은 인터넷 게시글 하나로 쉽게 바뀔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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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이나 인터넷이 가진 무시무시함을 두려워했지, 어른이 되면서 인터넷이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 안에서는 학교폭행 가해자를 그렇게 쥐 잡듯이 잡지만 그와 동시에 '찐따'라는 단어가 인터넷에서 공격적인 단어로 쓰일 정도로 줏대 없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정말 인터넷만 보면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엄청나고 아이돌이나 연예인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게 공론화되는 순간 퇴출시키려고 난리 피우고 난리지 않는가? 그래서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미칠 줄 알았거든? 학교폭력을 줄여 줄거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현실의 학교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인터넷 안에서도 찐따의 특징, 찐따가 문제인 이유, 찐따 시리즈가 나오면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번 서보겠다는 진짜 찐따 같은 사람만 늘어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인터넷 여론의 한계이자 박제와 공론화의 무능하다는 증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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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문제 된 사건을 '박제'시키듯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공론화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도 많다. 파키스탄계 미국인 영화감독 마흐누어 유세프가 이탈리아 여성에게 인종차별을 당했는데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널리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준 사건이 그 예시겠지.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피해자가 마음 편히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곳, 경찰서와 법원보다 약자의 편을 들며 정의의 철퇴가 내려지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다.


  다만 우리는 너무 인터넷 공론화의 힘에 기대어 버렸고 덕분에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일에 둔감해져 버렸다. 위의 사건을 봐도 인터넷 공론화가 된 덕분에 인종차별을 한 이탈리아 여성들이 사과했다지만 다음에 비슷한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도 또 그녀는 인터넷 공론화의 힘을 빌려야만 할까? 위 사건의 인종차별에 대한 해결책은 영사관, 인권위원회,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식을 만드는 학교와 언론에서 해야 한다. 아니면 공론화의 힘을 빌기 전에 그 자리에서 즉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현실의 문제를 뿌리째 뽑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공론화에만 기대는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막상 다들 인터넷에서만 나쁜 행동과 나쁜 사람에 대한 정의의 철퇴를 내렸지, 현실에서 나쁜 행동과 나쁜 사람을 마주치면 도망치거나, 오히려 나중에 인터넷에 공론화할 거라며 먼저 몸 사리며 피하지 않는가. 인터넷에서는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지만 현실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를 만날 때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면 학교 폭력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데 인터넷에 공론화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비겁한 박제꾼들만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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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라는 것도 참 중독이다. 그치? 무시받는 나를 지켜줄 어떤 강력한 수호령을 찾는 느낌도 들고 말이지. 그리고 오늘도 사람들은 박제와 공론화를 하면서 자신을 지켜줄 수호령을 찾아다니고 있다. 특히 요즘은 별 것 아닌 일에 박제하고 공론화하기 바쁘더만. 나 역시 이 티스토리 말고도 과거 네이버 블로그가 여러 번 박제와 저격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유도 뭐 별 것 없었다. 어린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프로게이머 사진 올리고서 “이 남자 선수 정말 잘생겼다! 이 선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 이런 주접글을 적었는데 고것에 배알 꼴린 남자가 "요오즘 한국 여자들은 얼빠에, 빠순이에, 된장녀에, 남자의 마음을 안 보는 속물이다 어쩌고 저쩌고...", 거기다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남자 아이돌과 남자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들의 글을 모조리 다 끌고 와서 욕하기 바쁜 사람이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욕구를 거세시키고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얼마나 현실에서 자신감이 없으면 인터넷에 숨어서 그런 유토피아를 만드려고 하는 걸까? 아까도 말했지만 인터넷에서 아무리 공론화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다. 현실에서 목소리 한번 내는 것은 인터넷 게시글 10만 개의 위력보다 강하니깐.
 
 

  1955 버거 하나에 사회문제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에세이 한편 뚝딱 써버라고 말았다. 그나저나 1955버거 일은 어떻게 됐냐고? 알고 보니 1955 버거 자체가 어니언 그릴이 별로 없는 햄버거였고 만약 직원을 의심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면 오히려 내가 정의의 철퇴로 머리통 으깨질 뻔했다. 블랙 컨슈머냐고. 진상 손님이냐고. 싼값에 햄버거 먹는데 원하는 건 더럽게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광고 사진하고 실제 이미지가 좀 같아야지 너무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오늘부터 난 인터넷에 1955버거의 광고 사진과 실제 이미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박제도 안 하고 공론화도 안 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을 거고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는 대신에, 이 현실 위에서 내가 직접 행동할 거다. 1955버거는 빅맥보다 뒤에, 베이컨 디럭스 토마토와 상하이 버거보다 한참 뒤 순위로 두면서 피할 거다. 적어도 그게 인터넷에서 사진 올리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