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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갤문학 / DEICIDE] 그들이 오다 - 15

@blog 2024. 6. 26. 23:55

 

 

 

 

 

 

 

2005년 5월 7일 오후 7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네 명이 도착하자, 거실에는 감독 서너명과 몇몇 선수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1:1 면담이 끝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같았는데. 대체 무슨일인지 의아해하며 네 명의 선발선수들은 그 틈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데예? 큰일이라도 났습니꺼?”

  정석이 질문하면서 선수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특별히 대답해 주지 않아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선수와 감독들이 빙 둘러서 있었고, 그 안에 낯익은 한 선수가 있었다.

  “다들 왔으니 시작하기로 하지.”

  정수영 감독이 말했다. 

  “예.”

  정민이 그 네 명을 쳐다보면서 힘없이 말했다. 그가 선수들과 감독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정민이가 출전을 고민하고 있다.”

  진호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정수영 감독이 대답했다. 순간, 거실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적막해진 공기 속에서 정수영 감독이 말을 이었다.

  “정민이랑 많은 이야기를 했고, 출전 의사를 들었다. 하지만, 정민이 본인도 그렇고, 나도 정말 많이 고민하고 있다. 과연 정민이가 출전할 것이지, 말지에 대해서. 정말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고, 결정하기 곤란한 문제다. 그 이유는 다들 알겠지.”

  거실의 분위기는 정민의 표정만큼이나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계속해서 정수영 감독이 말했다.

  “정민이 본인 스스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우려하겠지. 어떤 이는 미친 짓이리고 욕할수도 있다. 어떤 이는 진심으로 응원할 수도 있겠고. 감독들, 다른 선수들, 저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말이야. 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오랜 이야기끝에 너희 넷이라고 결정했다. 경기에 출전하는 너희 네 명. 정민이는 너희 넷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고 싶다고 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네 명의 프로게이머들은 당황하기만 할 뿐이었다. 정민은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린 채 서 있었다. 

  “정민이의 기분을 생각하거나, 미안한 마음에 솔직한 생각을 숨길 필요는 없다. 물론 정말 정민이의 출전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지.”

  요환은 정민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정민은 도마 위에서 칼에 배를 드러낸 생선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들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난도질당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겼다. 요환은 생각했다. 정민이가 출전한다면? 김정민? 정민이가 출전? 정민이……?

  “김정민 이 병신같은 새끼야.”

  그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네 명의 선수가 있는 반대 방향이었다.

  “관둬라, 관둬. 이딴 식으로 나올거면 집어치우고 꺼져버려, 자식아.”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그 곳으로 모아졌다. 강민이었다.

  “너는 끝까지 네 인생을 다른사람의 손에 맡기는 거냐. 정말 너란 인간도 지친다, 지쳐.”

  강민이 벌레 씹은 듯한 얼굴을 하며 김정민을 노려보았다.

  “민아……”
  “내가 솔직히 말할까. 너 같은 새끼한테 어떻게 내 목숨을 맡겨. 니가 스타를 잘 해? 우승 한 번을 해봤어? 네가 할줄 아는게 대체 뭔데?”

  강민이 점점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리고,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줄 알어? 여기든 저 바깥이든 대부분의 사람이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김정민이 출전하려고 생각한댄다. 그래? 그 등신은 지 주제를 좀 알라고 해라. 자기가 뭔데 나서냐. 안 그래?”
  “민아, 말이 너무 심하다!”
  “조용히 해봐!!!”

  홍진호가 강민을 말리려 했으나, 강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약한 테란, 눈물의 테란, 너는 평생 그렇게 찌질거리는거야. 왠줄 알어? 너는 니 자신이 너를 천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정민은 묵묵히 강민의 욕을 듣고 있었다. 강민은 이를 갈며 계속 욕을 퍼부어댔다.

  “병신아. 너 자신부터 너를 인정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여기 출전하는 네 사람이 얼씨구나 하고, 당연히 정민이 네가 나가야지. 그렇게 해 줄거라고 생각했냐? 아니면, 정민아 너는 아니다. 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냐? 대체 뭔 생각으로 사는거냐, 너는?”
  “민아, 나는……”
  “닥쳐. 말도 꺼내지 마, 너는. 김정민”

  강민이 매몰차게 김정민의 말을 끊었다.

  “네가 끝까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려서 산다면, 세상에 ‘김정민’ 이란 건 없는거다. ‘강민이 보는 김정민’, ‘누구누구가 보는 김정민’, 그런 김정민만 이 세상에 사는 거지. 너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고,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받고 저울질당한 너의 찌꺼기만 남아 있는거야. 알아듣겠냐?”

  그러고 나서, 강민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강민이 한동안 숨을 고를 동안 아무도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강민이 다시 탄식하듯 말문을 열었다.

  “……정민아. 최고가 아닐 수는 있어. 천재가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주인’일 수는 있잖아.”

  그 말을 남기고 강민은 휙 하고 뒤돌아서서 가버렸다. 김정민은 그 사라지는 강민의 등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2005년 5월 7일 저녁 8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이제 채 두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비어 있는 선수 명단의 나머지 한 칸을 보며 속을 태웠다.

  “진호씨……”

  아가씨는 손에 든 종이쪽지를 보며, 조용히 홍진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Black-Bean 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열심히 물어보았고, 그것이 한 프로게이머의 별명이라는 사실을 알아 내었다. 그제서야 아가씨는 그 프로게이머의 이름이 ‘홍진호’ 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이름은 묻지도 않고……”

  씁쓸하게 웃으며, 아가씨는 다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NC]...YellOw 라는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 그는 자기 스스로와의 약속, 그리고 아가씨와의 약속을 모두 지킨 것이었다.

  ‘또 보게 되기를 바랄게요’

  아가씨의 귀에, 진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자꾸만 그 뛰어가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러던 바로 그 때, 숫자 5. 옆에 아이디가 한 글자씩 새겨졌다.

< 5. TheMarine >

  아가씨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씩 주위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무어라 큰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사람, 다시금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

  ……그렇게, 인류의 운명을 책임질 다섯 사람의 ‘칼레의 시민’ 이 모두 결정되었다.

 

 

 

 

 




2005년 5월 7일 저녁 8시 반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뭐…… 뭐라고?”

  출전 선수들이 모두 결정되자, 숙소의 봉쇄는 풀렸다. 그러나, 더욱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뭐……?”

  요환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외계인들에게 선발된 다섯 명의 선수 외의 모든 프로게이머들을 죽이라고 명령이 전달된 것이다. 당황한 요환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계인은 차갑게 명령했다.

  “죽여라.”

  그러자 이제껏 프로게이머들을 보호했던 외계인들이 손에 저마다 무기를 하나씩 집어들었다. 어떻게 대응할 순간도 없었다. 외계인들이 프로게이머들에게로 성큼 성큼 다가섰다. 참혹한 학살이 시작되려는 찰나,

  “안돼!!!”

  정석의 커다란 목소리가 거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순간, 외계인들도 모두 동작을 멈추고 정석을 쳐다보았다. 정석은 거실에 놓여져 있던 과도를 자신의 목에 대고 있었다.

  “……너. 뭐하는 짓인가?”
  “다른 죄없는 아들 손대면, 확 그어뿔거다.”

  정석이 말하자, 외계인이 큭 하며 정석을 비웃었다.

  “미친…… 지금 네가 협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나?”

  정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에 댄 과도는 칼날이 톱니 모양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예리했다. 날카로운 톱니가 정석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피가 맺히고 있었다. 다른 프로게이머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정석을 바라보았다. 리더인 듯한 외계인이 정석에게로 뚜벅 뚜벅 다가왔다.

  “네 손으로 죽을 것도 없어. 아예 내가 죽여주지.”

  그리고 정석에 바로 앞까지 걸어온 외계인이, 들고 있던 망치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높이 쳐들었다. 정석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슈욱-! 쾅!!!!”
  "부스스스……“

  외계인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외계인의 무기는 정석의 머리 바로 위를 살짝 스쳐, 옆에 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찍었다. 정석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외계인을 노려보고 있었고, 외계인은 벽에 박힌 무기를 그대로 두고 정석을 노려보았다.

  “……”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외계인은 기둥에서 무기를 쑥 빼더니, 바닥에 거세게 내던졌다. 무기가 바닥에 내팽겨쳐져서 뒹굴었다.

  “콰앙! 쿵! 쿵!”
  “……명령만 아니었으면 죽여버렸을 거다, 인간.”

  그러자, 정석의 입꼬리가 실룩 올라갔다.

  “죽이 봐라.”
  “크와아아앙!!!”

  외계인이 거세게 고함지르며 주먹을 쳐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목에 댔던 칼을 내려놓으며, 또박 또박 이야기했다.

  “여기 모두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해라. 어차피 뒤틀리면 다 죽일거 아이가? 그러니 경기 끝날때까지는 가만히 냅둬라.”
  “……건방이 도를 넘어서서 아주 미쳤구나.”

  외계인의 위협에도 정석은 전혀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똑똑히 이야기했다.

  “여기 다른 아들이 안전할때까지, 우리는 경기 몬한다.”
  “미친……”

  그 때, 외계인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이전에도 이런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수뇌부로부터 한꺼번에 메시지를 전달받았고, 그렇게 메시지를 받을 때에는 이렇게 동작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들의 경직 상태가 풀렸고, 정석을 협박하던 외계인이 다시 입을 떼었다.

  “……좋다. 저놈들 목숨을 조금 연장시켜 주지.”
  “그걸 어떻게 믿나?”

  정석이 그렇게 묻자, 외계인이 정석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흉측한 이빨이 정석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놈이 경기에서 지면 내가 직접 네놈의 내장을 끄집어내서 씹어주겠다.”

  그러자 정석이 조금 더 얼굴을 들이밀어서, 외계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프로게이머들이 더 흠칫 놀랐다.

  “시끄럽다. 대답이나 해라.”
  “크르르르!!"

  외계인이 다시 한 번 크게 그르렁거리며, 정석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소리질렀다.

  “그럼 출전 선수가 아닌 놈을 한 놈 데리고 가라! 우린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니까 그 한 놈이 살아있으면 다른 놈들도 안전한 것으로 믿으면 된다. 귀찮은 자식들.”
  “알았다.”
  “당장 정해. 빨리 출발해야 하니까.”

  정석이 프로게이머들을 슥 둘러보았다.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다들 자신의 집으로, 가족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성큼 앞으로 나왔다.

  “내가 가지.”

  강민이었다.

  “선발 선수들중에 우리 팀 애들이 셋이나 있으니까. 내가 가는게 낫지.”
  “민아……”

  뒤쪽에서 정수영 감독이 강민을 불렀다. 강민이 뒤에 있는 프로게이머들과 감독들을 슥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정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잘생각했다. 같이 가자.”
  “그래.”

  박정석과 강민이 굳게 악수를 했다. 강민은 정석의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