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계부 대신 에세이

어떻게 해야하나. 우리 애비는 전과자인데. - 고속 버스비

@blog 2024. 9. 24.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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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추석날 시골에 좀 다녀왔다. 평소 터미널이 적자라서 없애네 마네 하더니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걸 보고 추석이라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시골에 가면 언니와 형부와 조카들이 있겠지. 부모님도 당연히 있고 말이야. 나와 다르게 성실한 사회 역군인 그들은 좋은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라고 나 말하기가 좀 힘들다. 왜냐면 창피하지만 진실인 고백, 충격적인 고백 하나 하자면 우리 아버지, 줄여서 우리 애비는 전과자니깐. 물론 한국 남성의 절반이 전과자라는 통계가 있으니깐 뭐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과거 과속 운전으로 사람 다치게 했고 최근에는 음주운전, 물론 충돌 사고는 없었지만 음주운전에 걸려서는 몇백만원에 달하는 벌금을 냈다. 참 우리 애비...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린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진짜 바뀐게 하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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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애비는 어린시절부터 걸어다니는 시한 폭탄이었다. 그러니깐 부모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누구보다 내 편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하잖아. 그런데 난 애비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껴본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어린 시절부터 난 애비의 불안정한 성격, 종잡을 수 없는 마음, 철없는 태도, 상대적으로 적은 책임감, 욱하는 성격, 인내심 부족 등의 문제를 본능적으로 알아서인지 속 깊은 마음,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래. 게임기를 사줌으로서 오는 감사함은 있었지만 애비와 딸 사이의 어떤 깊은 교류, 진중한 감정의 이야기, 고민 상담, 장례에 대한 토론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없는 것은 애비의 욱하는 성질 때문이겠지. 이게 모두 친할아버지의 부재,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 뒤돌아보지않고 산부인과를 나왔던 남아선호사상 친할머니로 인해 방임과 과보호가 커서 욱하는 기질에 대한 조정이 없어서 그렇다.




  결국 욱하는 성질은 어른이 되어서도 고치지 못했고 그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어 온 덕에 교통 사고 한번 거하게 치고 말았으니, 참 사고 친 동기도 어이 없었다. 당시 애비의 전화를 받았던 언니가 애비의 속을 긁었는지, 감히 애비인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전화받아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거 못참고 집으로 빨리 가겠다고 과속 운전 하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 애비, 그것이 걱정이라는 거다. 전과자가 퍼트린 생각, 전과자가 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생각을 내가 그대로 흡수하는 것을 말이지. 만약 거기서 조금만 잘못했으면 사람이 죽었을텐데 그것을 ‘단순 지나간 일’ 취급하는 사람의 사상을 내가 왜 이해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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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번 추석 전에도 애비는 음주운전을 저질럿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소에는 그길에 나타나지도 않던 경찰이 빡빡하게 단속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아직도 애비로서 느껴지지 않는 어떤 진중한 감정, 무게, 소통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노발대발 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성질도 여전했고 말이지. 내가 에세이를 통하여 사회 현상과 회사와 남녀 관계등 문제점을 캐치하고 글과 논리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폭력의 수준까진 아니지만 작은 문제제기라도 하면 바로 욱해서 목에 핏줄 세우는 철딱서니 없는 애비 때문도 있긴 하다.



   그래서 난 이제  마음을 다 잡고 이 사람과 가까이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못하다가 나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린 시절에도 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지. 물론 내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이상적인 가족 관계, 화기애애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겠지. 마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는데 남편의 인내로 유지되는 억지스러운 가정의 평화처럼 말이지. 그러나 누군가의 인내로 유지되는 평화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처럼 모두가 행복해도 한 아이가 불행하면 그 평화는 예전같이 않는다. 나는 이제 어른이고 사리분별이 가능하며, 내가 어떤 사람을 가까이두고 멀리 두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기에 난 전과자 애비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또한 과거 일은 잊고 애비의 노고를 이해해보자, 욱했던 그의 감정에 조금은 동의해보자, 사건 사고 치고 다니지만 애비 대접에 목매는 것에 분명 장점이 있을 거다, 라며 노력했지만 자칫 내 정신이 오염될 수 있고 또한 전과자가 자신을 두둔하는 무의식적이고도 교묘한 사상에 동의하기는 싫거든. 인간이라면 자신의 가족을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타인에게 엄격한 만큼 가족에게도 엄격하다면 적어도 자기 동생이 성추행을 벌이고도 동생은 죄가 없다며 뻔뻔하게 국민 청원을 올린 형의 행동, 자기 아들이 스스로 입은 화상을 타인 때문에 그런거라며 누명 씌우려는 엄마의 노력인 국물녀 사건처럼 비양심적인 사건 역시 없었을 것이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마음도 필요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엄격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 아니 연예인 음주운전은 그렇게 쥐잡듯이 잡으면서 자기 애비 음주운전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양 하면 쓰나? 이건 내 정신건강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가족의 입장에서는 나같은 딸이 답답하게 보이겠지만 김남준 2집 월롱 플레이스 라이트 펄손, 장소가 틀릴 뿐 나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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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래서 부모없는 고아를 좋아한다니깐? 기존 어른의 생각의 전염, 위험한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서 조금은 피할 수 있으니깐. 물론 보육원 교사중에서 막장 교사도 있다지만 어디 막장 부모만 하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나오고 있는 막장 부모의 기행은 늘 보육원 교사의 상상 밖에 있다. 이게 모두 부모라는 사람이 본인 창피한 거 모르고 행동해서 그렇다. 가정 안에서는 자기가 모든 법의 수호자이자 창조자인 줄 알아서 그런 것이다. 딸이 다 큰 어른이 됐음에도 전과자인 거 창피해 하지 않고 떠 벌리는 애비, 다 큰 딸에게 목청 높이면 이기는 줄 아는 애비, 하긴 그런 구별 능력이 있었다면 전과자가 됐을 일도 없었을텐데 말이지. 이참에 성을 한번 바꿔볼까나? 엄마 성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말이지. 아니면 흔하디 흔한 김씨성으로 바꿔볼까나? 내 성은 정말 너무 튀거든. 아니 무엇보다 전과자와 같은 성을 쓴다는게 소름 끼친다. 진짜 소름이 끼치는 걸 뭐 어떻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