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이기에 아름다운 거야 - 스타벅스 자바칩 프라푸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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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난 우리 집 근처 스타벅스가 아닌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마시고 있다. 왜냐면 전세 계약이 만료되어 좀 더 좋은 집, 좀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고 싶어서 부동산을 통해 이 집 저 집 알아보고 있는 중이거든. 하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는 소위 말하는 '마음 붙이고 평생 살만한 집'으로 이사 가는 건 불가능했고 타협과 포기와 자본주의의 불공평함만 느낀 채 저녁밥 대신 스타벅스에서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도 자바칩 2개 더 추가하고 초콜릿 드리즐 잔뜩 넣어서 말이지.
인생 참 불공평해. 그치? 어떤 사람은 혼자 청소하는 것조차 감당 못할 정도로 넓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또 어떤 사람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움막집에서 살다니. 특히 집을 구하러 부동산 업자와 돌아다니다 보면 집주인의 탐욕으로 지어진 인간성이 상실된 집, 다닥다닥 붙어 있어 숨이라고는 쉴 수 없는 집을 볼 때면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곤 한다. 누우면 집의 절반을 차지하는 집, 녹슨 물이 나오는 화장실, 곰팡이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축축한 방, 심지어 창문도 없는 감옥 같은 집이라니. 우리가 보통 집을 생각할 때 적어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떠올리잖아. 주말에 혼자 집에 누워서 취미 생활을 하는 그런 집 말이야. 허나 상상은 한계가 있고 현실의 잔인함은 무한하기에 PTDS라는 병이 있는 것처럼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공간이 매물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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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린 적나라한 현실, 보기 싫은 진실을 상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기피한다. 사람 사이에서도 냉혹한 현실, 팩트,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인기 없는 것처럼 말이다. 몇몇 인간관계에 서툰 사람들 중 '진실 = 무조건 좋은 것 =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을 가지며 "너 진실을 받아들일 멘탈이 약하구나? 유리멘탈~"이라면서 이상한 우월감을 가지지만, 잘 생각해 봐라.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니깐? 잘난 남자가 평범한 여자에게 절절매는 말도 안 되는 클리셰의 웹툰, 웹소설, 드라마, 영화, 하다못해 썰이 사랑받는 이유 역시 우린 모두 진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TV 프로그램 중 집 매물을 찾아주는 방송에서 오늘 내가 봤던 집과 비슷한 집이 단 한 채도 나오지 않았던 이유, 저기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집이 절대 나오지 않는 이유, 우리의 머릿속 상상하던 일반적인 집만 나오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나 그 프로그램 보고 깜짝 놀랐잖아. 방금 나는 철기시대에나 어울릴 법할 움막집을 보고 왔는데 저곳은 한국이 아니라 다른 세계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최선을 다하여 그런 집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몰랐던 걸까? 분명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이라고 했지만 이미 매체를 지배해 버린 것은 바로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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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끔찍한 현실을 상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아주 신기하게도 자기랑 멀게 느껴지는 끔찍한 현실은 완전 남의 나라 이야기, 즉 예술로 보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부르디외가 프랑스 시민 1200명을 대상으로 소득별에 따른 취향의 차이, 즉 아비투스를 증명하기 위하여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부르디외는 늙고 쭈글거리며 노동으로 인해 변형된 손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빈곤층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분 좋지 않다, 별로다,라고 평가했는데 중산층과 상류층은 마치 반고흐의 작품 속 노동자들의 손과 같다, 노동자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니깐 빈곤층 같은 경우에는 노동으로 인해 변형되고 쭈그러진 손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기에 본능적으로 싫어했지만 중산층과 빈곤층은 자신의 일이 될 확률이 낮은 걸 알기에 그 사진을 예술적으로 감상항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자 예술인거지.
내가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낮으니깐 예술적으로 보이는 거, 사실 이거 예술 쪽에서 꽤 많거든. 문학작품만 보더라도 남성 작가의 뮤즈로서 꼭 창녀가 등장하잖아. 남성 작가는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여자가 되고 또 창녀가 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기에 안심하고 멀리 서서 그것을 예술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다큐멘터리나 영화제 같은 곳에서 꼭 등장하는 공장 노동자의 고충 역시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될 만큼 이름 있는 예술가는 공장 노동자의 삶과 한참 먼 사람들이거든. 그에 반해서 예술가는 자신이 속한 예술업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왜? 마주치기 싫으니깐.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의 적나라한 현실, 언제 내 일이 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일들을 다루는 것은 괴롭거든. 문득 장강명 작가의 인세 누락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성명서도 내지 않던 작가 협회와 작가 연대가 왠 미얀마 군부 쿠테타에 관해서는 성명서는 내놓았다는 칼럼이 생각난다.(1 먼 타국땅 사건에는 관심이 많지만 자기가 속해있는 업계의 문제는 일부로 외면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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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남의 인생이 좀 더 잘나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만큼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남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과 피로와 슬픔을 우린 상상하기 싫어하기에,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회피 본능이기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겠지. 신기루 같은 거다. 멀리 있을수록 형채가 뚜렷해지는 것. 신비주의로 무장된 신과 같은 거다.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는 미지의 존재 같은 것. 이제야 악이 득세하도록 세계를 창조했는데 신이 만족해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 것 같다. 그건 자기가 그곳에 살 것이 아니기에, 남의 일이기에 아름다워 보여서 그렇겠지. 하루에도 억울하게, 불합리하게, 불평등함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신이 보기에는 그건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인간의 고뇌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밖에 안보이겠지. 비좁은 고시원에 살게 될 일이, 빛 한점 들어오지 못하여 무덤 같아 보이는 곳에 사는 일이 단순 피조물의 일이 아이라 자신의 일이 된다면 신은 뒤늦게서야 지옥이라는 곳이 따로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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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h.yes24.com/article/view/44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