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계부 대신 에세이

아프니깐 숲으로 갈거야 - 교통 버스 비

@blog 2024. 10. 1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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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이제 너무 늙어버렸다.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나이가 말이지. 물론 신체 나이도 그다지 젊은 편은 아니지만 내 마음의 나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든 말든 무감각한 산송장과 같다. 어린 시절에는 곧잘 모르는 사람과 서슴없이 대화하고 상처받아도 금방 회복했거든? 그런데 요즘은 타인과의 관계가 그저 버겁고 귀찮으며 피곤하다. 물론 어린 시절에 비하면 연륜과 지혜가 있기에 곧잘 대처했지만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회복력이 떨어지고 기대감도 떨어지면서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사람과의 대화보다 산책할 때 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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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N TV프로 <나는 자연인이다>가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임에도 크게 성공한 이유는 산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흥미로워서, 그들의 입담이 재미있어서, 사연이 감동스러운 것도 있지만 자연 속에 살고 싶은 신청자들의 대리만족도 한몫한다. 당장 내 가까운 사람 역시 산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기에 <나는 자연인이다>를 본다고 했거든. 나 같은 경우도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땐 도시와 거리가 먼 북유럽 어느 별장 영상, 사람이 하나도 없는 자연의 풍경을 보며 위안을 받곤 한다. 특히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도시를 떠나 숲으로 향하게 되니, 우리 몸에 새겨진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이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아픈 사람은 늘 숲으로 향했었다.
 
 
 
실제 사주의 오행론에서도 나무는 비겁을 상징하고 비겁은 자기 편이자 자기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겁이 없으면 자기 편이 없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사주, 친구가 생기기 힘들거나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주라고 한다. 물론 미신이라고 하지만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 아닌가? 사주 상 나무는 사람이고 혼자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사람 대신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에서 그들과 함께하니깐. 물론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이 산으로 구성된 한국의 지형구조도 한몫하지만 중세 시대 마녀부터 해서 도 닦기 위하여 산속으로 들어가는 도인 등등 모두 숲으로 갔으면 갔지, 바다, 호수, 드넓은 들판으로 떠나지 않았다. 즉 우리는 본능적으로 숲을 누군가의 품안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나오기 이전부터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도 사람 때문에 얻은 비애와 절망과 체념 때문에 청산에 살어리랏다, 라고 노래를 불렀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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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숲은 단순 운동하기 좋은 곳,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아닌 마음 치료 기관이자 재활원의 역할을 한다. 작은 텐트 하나 챙기고 숲속에서 1박을 하면 비록 입도 없고 귀도 없는 나무뿐이지만 내 편과 함께 있는 것 같은 편안함, 새 지저귀는 소리에 내가 얼마나 도시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판타지 소설 같은 것만 보더라도 신성한 숲의 힘으로 사악한 저주를 치료 한다는 내용이 있지 않은가. 판타지 소설 속 숲에 사는 정령, 요정, 마법사들은 나무를 의인화한 캐릭터들이고 이들은 신비한 힘을 가지거 있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무리를 지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나무를 살아있는 존재, 생각하고 판단 내리면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싶은 사람, 도인과 수도승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는 것도 사람으로서의 지혜를 모두 터득했으니 자연의 또 다른 인류, 나무들에게 지혜를 배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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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이 꼭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더라고. 한번 사기당한 사람은 절박한 마음 떄문에 또다른 사기꾼에게 속을 수 있고 특히 나쁜 남자를 만난 여자는 다음에도 뭔가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 사람에게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원래의 자신을 되돌아 올 필요가 있다. 걱정하지 마시라. 방금도 말하다시피 오행론에 따르면 나무는 비겁, 비겁은 즉 내 편이라는 것을. 숲은 언제나 당신의 편이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연 가진 사람들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치일지언정 숲은 말없이 받아주고 도와줬으니깐. 감히 사람이 베풀어 줄 수 없는 크기의 자비이고, 감히 사람으로서는 따라 해 볼 수 없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