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단편소설, 팬픽

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4

@blog 2025. 2. 25. 01:33

 
 









 
 
 
4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모이면 모일수록 좋다는 다다익선의 법칙은 당연히 사람에게도 해당되는거라 재문이는 생각했다. 왜냐면 학술원에 들어가기 전 과외 학습에서 만난 친구들과 싸움도 없었고 시기 질투도 없었으며 모든 관계가 평화롭고 조화로웠으니깐. 하지만 학술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4살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적응하다 못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들 인지하는 순간 부담스러워하는 눈빛, 또는 한번은 넘어져 주길 바라는 눈빛들이 선명해져 갔다. 그러나 자신을 기계처럼 대하는 방법에 통달한 재문이는 그들보다 실수할 가능성이 적었을 뿐더러 지진해일 때 모두를 구한 이후 그에게 가졌던 경미한 질투심은 순식간에 미안함으로 바뀌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당연히 눈치 빠른 재문이는 변해버린 분위기를 캐치했고 이참에 겸손과 배려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저기... 재문아.




  평소 기숙사 중앙에 위치한 후보생 휴게실에 잘 다니지 않던 재문이가 최근 그곳으로 자주 왕래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이미지를 편하고 친숙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재문이를 어렵게 생각하던 후보생에게는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를, 재문이는 그 기회를 역이용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한 후보생이 쭈뼛거리는 자세와 심히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다가왔으니, 재문이는 박사님을 만났을 때처럼 상냥하고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응? 무슨 일인데?
했던 이야기 또 해서 미안한데... 고마워. 너 때문에 살았어.
에이 무슨. 내가 뭘 했다고.
솔직히 말해서 그때 그일... 꿈으로 자주 꾸거든. 정말 너 아니였으면 어쩔가 싶더라.
누나 괜찮아? 심리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릴까? 양호선생님이라도 부를까?
그 정도 까지는 아니야. 아무튼 고마워. 정말 고맙다고.
 


 
  재문이는 걱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거고 만약 그런 일이 생겨도 자신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물론 요원에게 있어서 본심은 숨기면 숨길수록 미덕이고 마음은 가리면 가릴수록 황금비에 가까웠지만 모든 생활에까지 접목시킨 사람은 오직 한재문 한 명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식의 왕인 재문이에게 감히 가식으로 승부 해보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77번. 26번처럼 재문이보다 4살 많은 형이자 오직 자기만이 재문이의 진정한 라이벌이라고 착각하는 후보생이었다.
 
 
 
우리의 영웅 한재문!

 
  휴게실 한복판에서 진심이라고는 1도 없는 소리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77번은 재문이에게 어깨동무를 했고 순간 재문이는 그의 힘에 의해 기우뚱했지만 다행히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늘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짖누르려는 77번을 재문이는 아니 꼬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오버스러운 연기는 커졌다.


 
재문아 지인짜 고맙다! 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살았잖냐. 지인짜 고맙다!
어. 형.
상층부에 가서 상도 받았다며? 짜식 아주 잘났어! 아주 대단해!
그래. 
그나저나 옛날에는 이렇게 어깨동무만 해도 넘어졌는데 이젠 넘어지지 않네? 마이컸네 우리 재문이. 어깨도 형만큼 넓어지고 목소리도 굵어지고. 
...
으잇! 요놈 봐라! 막 수염 자국도 있네? 우리 재문이 남자 다됐네!
...
아직도 누냐누냐, 형아형아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세월 참 빨라. 그치?
 
 


  77번은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재문이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아주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낮가림이 워낙 심하여 삼인방이 아닌 다른 사람하고는 일절 대화하지 않았던 일, 처음 iso 명상을 받았을 때 얼굴에 눈물 콧물 범벅 된 채로 돌아왔던 일, 77번이 어깨동무를 하는 척 짖누르자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던 일을 말하며 재문이의 귀여웠던 시절을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77번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보려는 재문이의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 행동 여파가 재문이의 이미지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을 몰랐을 재문이가 아니었다. 
 
 
 
그런 애가 아주 기특하게 잘 컸다니깐? 우리 귀여운 째문이 꼬추 함 볼까? 꽈추 여물었나 함 볼까?
그만해.
마! 그렇게까지 인상 쓸 일이야? 장난이다 마! 우리 외할머니 흉내 낸 것 뿐이다 마!
...
설마 내가 진짜로 볼 줄 알았던 거야? 
...
아니면... 진짜 그 말 한마디에 쫄보마냥 고추 쫄았냐?
 
 
 
  결과만 좋으면 과정 따윈 상관없다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에 사람들은 늘 마지막에 본심을 숨겨놓곤 한다. 77번도 천연덕스러운 원맨쇼 끝에 자신의 본심을 담아냈으니,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 더이상 성장하지도 말고 기어오르지도 말라는 어떤 협박. 목소리 뿐만이 아니였다. 77번의 눈빛부터 분위기까지 서늘해지면서 노신사가 말했던 학술원 후보생 특유의 섬뜻한 아우라를 재문이는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77번 뿐만 아니라 학술원 후보생들은 수많은 비인도적인 훈련과정에서 적을 상대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특유의 페르소나가 형성되었고 어린 시절의 재문이 같았으면 그 페르소나에 겁 먹고서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형 무섭다고 울먹거렸을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재문이 역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못해 그의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과 격이 다를 정도로 종류가 많았고 단단했으며, 무엇보다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로 무장된 재문이는 77번만큼처럼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다 형 누나들이 나 많이 챙겨준 덕분에 내가 이렇게 컸지. 만약 안도와줬으면 지진해일 때 애새끼처럼 울고 있었을 걸?
그치? 형 덕분이지?
그래서 내가 은혜갚은 거잖아. 형누나한테 보답한거잖아.  
그렇긴 하지.
특히 형이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잠수정에 탔을 때 내가 딱 보람을 느꼈지. 빨리 출발하라고 소리 지르고 말도 아니였잖아. 기억나?
...
내가 형을 구한 거잖아.
...
내가 형을 살려 준거잖아.
...
왜? 형 그때 꼬추 쫄았었어?

 

  비록 청수가 추구하는 미덕이 효율성이라고 해도 청수를 이끌 후보생을 양성하는 휴게실에는 원문으로 된 고전소설들과 희귀종 식물, 개인 명상용 시뮬레이션, 미술 작품, 그리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지닌 조각품이 있었다. 그 중 태양처럼 뻗어져 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재문이 머리 뒤에 위치하며 빛을 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은 마치 선과 악을 모두 아우르는 초인만이 가질 수 있는 후광과도 같았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둘의 싸움을 유심히 지켜보던 다른 후보생들 역시 자신이 지금 휴게실에 있을 수 있는 이유, 폐 안으로 산소를 받고 이산화탄소를 내뱉을 수 있는 이유,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볼 것만 같은 재문이의 눈빛을 볼 수 있는 것은 부정할 것 없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직 자신의 의지 하나로 삶과 죽음의 기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절망의 아모르파티를 즐겨야 하는 확정된 상황 속에서 손가락 몇번의 움직임으로 모두의 운명을 뒤바꿔버린 사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고작 말 몇마디에 카리스마를 담아낼 수 있었고 후보생 누구도 재문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숨죽이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애들아. 스케줄표 떴어. 
 
 

  그때 소식을 전하는 한 후보생의 목소리 덕분에 77번은 물론 그 상황을 지켜보던 후보생들은 재문이가 깔아놓은 서늘하고 무거운 아우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바로 통신 기능 및 간단한 서류 확인이 가능한 전자 팔찌를 통해서 이번 달 훈련 스케줄표를 확인하였다. 그 중 내일 있을 훈련이 iso 명상훈련이라는 사실에 후보생들의 짜증과 한탄이 휴게실을 가득 매우게 되었고 결국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의 기숙사로 향하게 되면서 휴게실은 금새 텅텅비게 되었다. 다만 77번은 앙금이 남았는지 그의 몰락을 누구보다 바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재문이는 그의 질투 어린 시선을 일절 무시, 이로서 77번은 자신이 재문이의 라이벌이 되기에는 너무도 격차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뼛속 깊숙히 느끼게 되었고 그 감정은 괜한 분노가 되어 욕이 튀어나와버렸다. 개좆같은 사이코패스 새끼. 그렇게 재문이마저 떠난 휴게실에 남은 사람은 오직 재문이의 뒷모습을 증오스럽게 노려보는 77번 뿐이었다.
 



  언제부터 학술원이 살얼음판과 정치 싸움의 주무대가 됐는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는 전쟁터가 됐는지 재문이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옛날 학술원의 분위기는 절대 이러지 않았고 그럴 기미가 보이지도 않은 곳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때도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운 기류가 흘러 넘쳤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해타산적인 협력 관계가 아닌 친구라는 관계가 있었고 우정도 있었으며, 어떤 좋은 관계도 있었다. 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감을 풀어 줄 수 있는 편안한 관계가 있었다.
 
 
 
 
 
 
*
 
 

 
 

 
 
 

 
  사실 77번뿐만 아니라 26번 역시 재문이를 상대로 오버스럽게, 그리고 과도한 동작을 휘적거렸지만 재문이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던 것은 그녀의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학술원 입학식이 치뤄졌던 날, 제복을 입으며 곧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후보생들 사이로 맞지 않은 제복 때문에 팔을 끝까지 걷어올린 재문이는 상대적으로 튀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문이만큼 튀어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뒷자리에 앉아있는 재문이를 향해 아예 돌려 앉더니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직 귀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상정보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6살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들갑 떨며 한글로 자기 이름 쓸 줄 아냐고, 구구단은 외울 줄 아냐면서 신동으로서의 실력을 의심하여 재문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던 그녀. 다행히 잔뜩 찌뿌린 재문이의 표정을 보고 26번은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심심하면 자기 기숙사로 오라고, 자신의 번호는 26번, 37 빼기 11은 26이니 기억하기도 쉬울거라는 말했지만 재문이는 그녀의 말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경계심이 강한 6살 아이였기에 머리속으로 절대로 26번과 가까이 지내면 안된다고 못박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다짐했지만 당시 재문이는 외로움을 다루는 방법에 미숙했고 보안이라는 이유로 가족과의 간단한 통화조차 힘들었기에 "좋은 교우 관계는 지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서는 결국 26번의 기숙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휴게실은 물론 공부방과 복도까지 불이 꺼지고 희미한 비상등만 켜진 늦은 새벽 시간, 재문이는 26이라는 푸른빛의 숫자가 적힌 문앞에서 수십번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가볍게 노트했으니, 똑똑똑.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결국 재문이는 그녀가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문이 열리면서 26번의 애정 넘치는 환영인사가 시작됐다.
 

 
 

 
 
 

 
으아니잇! 이게 누구야? 이게 누구야아?
...
우리 슈퍼 파워 왕귀염둥이 재문이 아니야?
...
이런 늦은 시간에 우리 왕자님이 무슨 일로 찾아오셧을까용?
 


  그러나 재문이는 세상 무심한 고양이처럼 26번의 환대 인사를 쿨하게 무시하고 무드등의 주황빛이 감도는 그녀의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26번 뿐만 아니라 다른 2명의 남자 후보생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내일 휴일이라 그런지 바닥에는 과자와 음료수가 널부러져 있었고 그들은 오직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사회성 없는 재문이는 그들에게 눈맞춤은 물론 어떠한 인사도 없이 침대 끝자락에 다소곳이 앉으면서 어색한 인연이 시작됐으니, 재 누구야? 왜왔대? 한재문이잖아. 37번. 재문. 재협의하다. 재안하다. 재미있는 재문이. 자신을 주제로 이것저것 이야기 하는 소리에 재문이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괜히 왔나 후회하는 그때, 26번은 무슨 곰인형 안 듯이 재문이를 뒤에서 꼭 끌어안아서는 자신의 품안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간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섬과 동시에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이중적인 느낌, 그 느낌에 재문이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이 흐려지고 여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자자! 미래에 청수의 수장님이 되실 한재문님을 소개합니다!
또 오버떤다.
오버 아니야. 너 6살에 여기 들어 온 사람 봤어?
8살 애는 봤는데.
거봐! 8살이잖아! 6살이 아니고 8살!
목소리 좀 낮춰. 이러다 들키겠어.
아 미안. 아무튼 대단하다고. 진짜 멋지지 않아? 완전 멋지지 않아? 너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지? 재문아?
 
 

  저녁 10시 이후에는 개인 기숙사에 2인이상 집합금지라는 조항에 조마조마해하는 두 사람과 다르게 26번의 팔불출은 계속 되었고 결국 재문이는 직접 화제를 돌리기 위하여 어째서 학술원에는 창문이 없냐는 괜한 말을 던졌다. 이에 안경을 쓰고 척보기에도 남 가르치는 거 좋아해 보이는 102번이 말했으니, 여긴 심해잖아. 수압은 물론 수온 때문에 버티기 힘들고 무엇보다 창밖은 깜깜한 심해인데 굳이 창문을 설치할 필요가 있냐?
 

 
어떻게 보면 백화점하고 비슷한 구조인거지. 낮인지 밤인지 확인할 수도 없고 아무리 디스플레이로 바깥 느낌을 나게 만들어도 소등시간에 불 다 꺼지면 뭔가 무서운 기분이 들더라.
...
으시시한 기분이 들더라고. 기묘하고 불쾌하기도 한게 뭔가 백룸 같기도 하고.
리미널 스페이스.
하. 너 그런 것도 아냐?
...
인맥 빨로 들어온 건 아닌 것 같네.
 


  그리고 괜히 재문이보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102번은 신입생이라면 모를 수 밖에 없는 학술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너희 그거 알아? 휴게실 미술품들 한달에 한번씩 바뀐다는 거. 미술품 한 개로 아파트 몇채는 살수있데. 너희 그것도 알아? 한 사람 앞에 매달 품위유지 크레딧이 적립되는데 의전팀에게 말해서 크래딧으로 사고 싶은 거 사면 돼. 어떤 애는 그거 모아서 부모님한테 각각 신형 외제차 선물해줬다고 하더라. 너희 그거 아냐? 개인 기숙사 안에 적외선 기능은 물론 눈 깜박이는 것까지 다 카운팅 할 수 있는 보안 카메라가 설치됐을 수 있데.
 

 
설마... 뭣하러 기숙사 안까지 보안 카메라를 설치했겠어?
뭐긴. 우리의 행동을 데이터화하고 행동예측과의 자료를 토대로 시뮬레이션화 하기 위해서지.
그걸 왜 돌려?
원래 청수재단이 외계 기술 적용 시뮬레이션을 가지고 있는 방위업체니깐. 시뮬레이션화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
그래도 후보생을 대상으로 그러면 안되지.
너무 진지하게 믿지마. 확실한 것도 아니고 내 친형이 학술원 졸업생이라 이전 후보생들 사이에서 돌았던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면 우리가 여기 모여서 놀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겠네?
아마도.
그런데 일부러 모르는 척 해주는 거네?
그럴지도.
 

  비록 진실이 아닌 뜬소문이라고 해도 후보생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26번은 매우 기분 나빴는지 재문이 앞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심각한 표정,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안에 있던 재문이는 괜히 자기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그녀를 올려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는 26번. 한손으로는 재문이의 허리를 감싸고 나머지 한손으로 두 눈을 가리면서, 그러면 우리 재문이 꼭꼭 숨겨야 겠는걸? 들킬지도 모르니깐.

 
 
누나 안보여.
히히히. 왜냐면 내가 꽁꽁 가렸기 때문이다!
누나. 진짜 안보여.
스토커 오징어 괴물이 나타났다! 크앙!

 
 
  유치한 누나의 장난에 장단 맞춰줘야하나 고민을 하던 그때, 허리를 감싸던 한쪽 팔로 간지럽히자 선비처럼 가만히 있던 재문이조차 웃음과 함께 온몸을 배배 꼬며 이불 속으로 대피했다. 다행히 오징어 괴물의 공격이 잠잠해지고 재문이는 천천히 이불 밖으로 나오자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무드등의 황금빛, 그리고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볼을 감싸는 이불의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 늘 경직되어 있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시간이자 학술원 생활을 지탱해주는 기둥같은 기억.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황혼의 시간축.
 



  그러나 그 기둥 중 하나가 콜드슬립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고 또다른 기둥 하나는 iso 명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학술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26번만이 재문이를 지켜 줄 마지막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기둥, 03이라고 크게 쓰여진 게이트 앞 벤치에서 앉아 하염없이 102번을 기다리는 그녀에겐 기댈 수 있는 단단함도, 강함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살짝 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기에, 그리고 그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지지 않길 재문이는 너무도 바랬기에 처음으로 26번에게 어리광이 담긴 저녁 인사를 하지 않고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날을 중심축으로 하면서 26번은 본격적인 거리두기, 혹은 이기적인 생존을 위한 궤도로 돌기 시작했고 재문이는 하루 아침에 자신을 차갑게 보는 그녀의 온기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수온이 1, 2도만 바뀌어도 떼죽음 당하는 물고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던 친근한 인사와 귀엽다는 호들갑이 사라지자 질식할 것 같은 고립감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기분탓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단순 기분이 아닌 26번의 명확한 의도이자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문이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엿보기로 하면서 수업이 있을 교실로 향했다.

 



  컨디션 때문일까? 학술원에 들어온 여성 후보생들은 모두 무월경 수술을 받았기에 당연히 월경 때문은 아닌 것 같았는데. 102번 때문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93번이 콜드슬립 훈련 때 죽은 이후 오히려 우리끼리 더욱더 끈끈해지자며 격려했던 26번이었는데. 재문이의 눈은 모니터에, 손은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네트워크 보안 관리 수업에 맞춰 움직였지만 머리로는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분주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때 바로 옆 줄에 앉은 26번이 돌파력은 높지만 친입의 흔적이 남는 코드를 사용했다며 교수에게 지적받았는데,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지. 그러면 해킹한 의미가 전혀 없거든. 섬세하게 다듬고 가야해. 왔는지도 갔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말이지. 그리고 교수는 깔끔하게 네트워크 친입에 성공한 재문이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저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때 재문이는 26번과 눈이 마주쳤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냉랭한 눈빛을 보이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 그런 그녀의 눈은 이때까지 보여 준 감정이 사실 다 가짜였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줏대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눈, 배신자의 눈이었다.
 



누나!

 


  그런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보안 관리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문이는 다음 수업을 위하여 움직이는 후보생 무리 사이에서 가장 머리색이 튀는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선 26번과 막상 말을 걸었지만 겁이 나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37번. 그들의 오른편 벽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상 위의 배경들. 이곳이 절대 심해에 위치한 답답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계속해서 영상이 재생되는 디스플레이 월. 봄엔 꽃 피는 배경을, 여름에는 바닷가, 가을에는 황금색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풍경, 오늘 같은 겨울에는 눈내리는 산의 전경을 보여주었는데 그 계절처럼 둘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기류를 먼저 깬 사람은 평소 그녀보다 겨울같은 성격을 가진 재문이었고 그는 수업시간 내내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찾은 정답을 그녀 앞에 늘어 놓기 시작했으니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철없는 행동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귀찮아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그럴듯할 가설을 말하였다.
 
 

 
그래서 있잖아, 나 이제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을게.
...
그러니깐 누나가 나보고 귀엽다고 할 때 한심한 표정 지었잖아, 그거 사실 많이 창피해서 그런거야. 
...
부끄러워서 그런거야. 진심이 아니였어. 그래서 이제부터 그런 표정 절대 짓지 않을거고 말도 조심히 가려서 하고 어리광도 피우지 않을게.
...
어른스럽게 행동할게. 그러니깐...
...
그러니깐... 그러지마.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자신은 모든 것의 정상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니깐 모든 사람들이 우수한 아이라고 치켜세워주고 모든 곳에서 박수쳐주니깐 재문이는 다른 누구에게도 넙죽 엎드리는 일은 없었을거라 생각했는데 처음 느껴보는 비굴함에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게졌다. 디스플레이 월에 비치는 겨울 배경 설산에서 알몸으로 벗겨지고 버려지는 기분. 그녀가 주는 따뜻한 자비 없이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생명. 그렇게 재문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자신의 생존을 판가름 해줄 그녀의 대답만을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빨리,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녀에게 말을 건 재문이와 상반될 정도로 아주 빨리 대답하면서 관계를 마무리 지었다.
 
 

...
...
...
...
하.
 

 
 
  죽을 때까지 왕으로 지내는 줄 알았겠지. 루이 16세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고 그의 목이 단두대위에서 단번에, 그리고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처럼 그녀의 짧은 비웃음 소리를 끝으로 둘 사이의 인연은 깔끔하게 잘려나가버렸다. 귀엽다고 얼싸 안을 때는 언제고 이젠 남인 것처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책임감을 묻고 싶었지만, 도대체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하는 것이 있다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진 눈시울, 심해로 들어가 몸 안에 있는 산소를 모두 빼앗기고 천천히 녹아내리고 싶은 나쁜 충동이었다.


  그러한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한걸음, 한걸음, 움찔거리는 어깨를 감추고 잔뜩 뿌여진 시야를 가지며 도착한 곳은 교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서실, 그리고 1인용 개인 공부방. 그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터지면서 결국 감정 주체가 되지 않는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면 재문이에게 있어서 이 일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절대 와주지 않길 바라는 나쁜 가설이자, 혼자서는 마음을 다잡고 이곳에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이때까지 지내왔던 과거를 지우기에는 그들에게 너무도 많이 의지해왔고 사랑했었기에.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기에.



흑...흐흑...


 
  처음 학술원에 들어왔을때만 해도 재문이는 이곳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엄청난 행운이자 축복인 줄 알고 멘토 선생님이었던 스티븐 한 선생님에 대해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교수진과 최고의 수재들 사이에서 최고가 되기 위하여 공부할 수 있었으니깐. 그러나 천재들의 가능성을 발전시켜주는 좋은 곳이라 생각했던 학술원은 사실 그들을 도구화하여 이용하는 쪽에 더 가까웠고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 내뿜는 차가운 분위기,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맞추어서 제작될리 없는 빡빡한 커리큘럼, 바닷속 천천히 내려앉은 고드름처럼 그것에 닿는 모든 것들은 아이로서 생기를 잃게 하고 차갑게 얼려버렸다. 죽어가게 만들었다.
 

 
 
- 삐이이이 - 삐이이이

...

 - 삐이이이 - 삐이이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는데, 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으면서 심장 안쪽같이 얼버리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재문이는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학술원이 만들고 싶어하던 인재상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니, 운명 자체가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문이는 뒤늦게서야 깨닫고만 것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진심이라는 감정을 이용하여 모든 것의 우위를 선점하는 자. 마음 속에 수많은 층과 방을 만들어 적이 급습하더라도 상처받지 않고 죽지도 않는 자.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사람을 상대로 절대로 질 수 없고 비굴해지지도 않는 완전한 존재가 되겠지.
 


- 삐이이이이이 


 
  재문이의 오른팔에 낀 전자 팔찌가 자꾸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려댔고 통신을 받자마자 학술원과 어울리는 교수의 기계적인 물음, 수업이 시작됐는데 어디있냐는 예상가능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방금까지만해도 서럽게 울던 소년은 독서에 집중하느라 수업이 시작됐는지 몰랐다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했다.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에도 전혀 응답해주지 않는 천사와 어떠한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지 알 수 없는 악마가 그렇게 한 소년의 몸안에 동시에 베어드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이제야 찾게되어 기쁜 아이. 브리니클을 맞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브리니클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얼음 지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린 현자. 재문이는 자기가 흘린 눈물을 마치 자기가 흘린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닦으며 교실로 향했다. 

 






*
 





 

 


 
  청수재단이 한 나라의 통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중앙 정부보다 효율적이고 빠른 실행력,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행동하는 과감함이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과학이라는 마술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말 한마디로 빛을 만들어내고 혼돈을 일순간에 질서정연하게 만들어내는 창조주처럼 자연재해로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를 듣도 보지도 못한 의문의 차량으로 순식간에 정리해버린 청수의 인력들. 빗자루와 삽을 들고 있었던 공무원들은 외계인이 사용할 법할 첨단 기계 앞에 넋놓고 있었고 이미 지상보다 기술력이 20년이나 앞선 그들의 모습은 코즈믹 호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미묘한 공포심은 자연스럽게 청수를 숭배하는 요소로 전략되면서 과학으로 무장한 군주론적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오버테크놀로지 기술은 '현재 의료적 방법으로 치료 불가능'에 가까웠던 26번의 오른손을 하얀색과 검은색 부품으로 이루어진 의수로, 작은 손 떨림까지 세밀하게 구현해 낸 완벽에 가까운 의수로 탈바꿈 시켜주었다. 디스플레이 월의 색깔에 맞춰 색이 변하는 단단한 의수. 훈련 장소로 가는 후보생들 사이에서 머리색은 물론 가장 튀어보이는 오른손을 가진 사람. 그녀가 누구를 구하려다가 의수를 끼게 되었는지,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 달라는 어리석은 부탁을 누가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결국 재문이는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어버렸다.


 
 
상태 어때.
뭐?
오른손. 상태 어떻냐고.

 

  재문이는 그녀가 지진해일 때처럼 건조하고 담백한 반응을 보일거라 예상했지만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자신과의 사이가 회복 된거라고 착각했는지 재문이를 인상 쓰게 만드는 과도한 리액션으로 오도방정을 떨었다.



으잇! 재문이 너 이자식!
...
혹시 누나한테 무슨 일 생길까봐 걱정인거야? 그런거야?
...
마음이 졸여서 안절부절인거야? 막 애간장 타고 그래? 우우웅?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차가운 표정으로 26번을 바라보았고 장난스러운 그녀의 표정 역시 사라졌다.
 
 


미안. 장난이야.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잖아.
이상 있어 없어.
박사님한테는 세상 친절하더니 나한테는 참 야박하네.
...
뭐 박사님에게 한 것처럼 세상 발랄한 말투까지는 안바라는데 좋게 말해주면 안되냐? 그러니깐... 우리 예전에 친하게 지냈잖아.
...
잘 지냈고 사이도 좋았고... 또...
...
내가 너 정말 많이 좋아했잖아.

 

 
  똑똑똑. 누군가 개인 공부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미 마음 속에 브리니클이 내려 앉았기에 소년은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보여주지도 않고 감동하지도 않으며 결코 울지 않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를 그렇게 만든 용의자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나서는 용서해달라고 하네? 아까 했던 말은 다 뻥이었고 다시 잘 지내보자고 하네? 재문아 미안미안. 아까했던 말은 다 잊어버리고 우리 원래대로 지내보자. 그렇게 그녀는 자기보다 체구가 작은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면서 자신의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주었지만 이미 마음 속 얼음 고드름이 내려앉은 아이는 어줍잖은 포옹 따위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브리니클마저 생겨나지 못할 정도의 뜨거운 분노가, 하지만 그 분노마저 잠재우는 극도의 냉기가 다시 한번 내려 앉으면서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자기밖에 생각 안했던 그녀를 향해 냉담하게 말했다.


 

주제를 알아. 그 사람은 박사고 누나는 동기잖아.
...
내가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는데.
...
왜. 내 말이 틀려?
 

 
  콜드슬립 기술이 완성되기 전 냉동수면 기술에 가장 큰 문제점은 수분의 문제, 차가운 얼음 결정이 세포막을 갈갈이 찢어버리면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녀는 기술력이 발달하지 못한 냉동수면에 빠진 것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찢긴 듯이 아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둘 사이에 절대 건널 수 없는 저승의 강이 흐른다는 증거이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해진 연인을 가진 자의 슬픔. 복도를 걷는 후보생들 사이로 그 둘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기류와 해류, 그리고 복잡한 마음이 흐르고 있었으니, 물론 한쪽이 내뿜는 한기가 너무도 강했기에 교류라고 부르기도 뭐했지만 말이다.
 

 

그래. 내가 큰 착각했다.
...
말 좀 걸어줬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다시 좋아진 줄 알았어. 미안.
...
의수 상태 어떠냐고? 현재 발견된 문제는 없어. 강도, 마찰력, 탄력성, 아직까지는 괜찮아. 물론 고강도 훈련을 받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
됐지? 만족한 대답이야?
그래.
그래. 그리고 한재문... 이제 너와 이야기 할 일은 절대 없을거야.


 


   그렇게 그녀는 훈련 장소로 향하는 후보생들 사이로 들어가면서 수많은 인파 중 한명이 되었고 황금색 머리카락과 살색이 아닌 흑백 뚜렷한 오른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재문이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류와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나누어야할 감정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에, 물론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인지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인지 몰라도 아직 해결해야할 감정이 있는 것은 확실했기에 이대로 끝내서는 안됐었다. 차라리 지진 해일이 일어나기 전처럼 서로 대화하지 않았었다면 이 기분 나쁜 교류가 시작되지 않았을텐데. 26번은 평생 미안함을 가지고 37번은 평생 마음의 문을 닫으면서 그렇게 무한에 가까운 수평으로 달려가 완전한 타인이 됐을 뻔했는데. 이건 모두 그녀의 잘못,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시작 해버린 그녀의 잘못이라 재문이는 단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