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남자는 말하는 것도 재수 없다.
초등학교 때 대기업 직원과 공무원이 꿈이라며
벌써부터 현실을 다 안다는 듯이
우월감을 느끼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동족 혐오가 아주 본능적으로 밀려오더라.
내가 초등학교 때 했던 짓을 다 큰 어른이 하니 기괴하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고 병신같기도 하고
뭔가 꼴값떠는 것 싶기도 하고.
요즘은 또 코인과 주식이 모든 인생의 탈출구인 것처럼 이야기하더라.
미국주식도 이제 끝물인가봐. 싹 다 빼야겠어.
부모님 재력이 중요하고 모든 행동이 다 부질 없다고 하더라.
자신은 이것을 일찍 깨우쳐서 인생의 지름길을 찾았다고.
원래 인생의 지름길을 찾았다는 사람은 거진 사이비인 셈이지.
남들이 모르는 휴거와 환난과 재림과 부동산 폭락과 경제 대공황과
백두산 폭발과 옐로스톤 화산 폭발과
666 베리칩과 신세계 질서 그리고 아마겟돈.
그대나 많이 찾아서 그대나 지름길로 가세요.
원래 매복하기 좋은 장소는 지름길의 형태를 띄고 있다.
자기가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가난한 남자 역시 밥맛이다.
무슨 대재벌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40년 된 아파트를 꽁꽁 싸매고
꽃뱀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며 매일 경계하는 미친놈 같아.
그의 머리에는 이미 일루미나티에서 보낸
인간형태의 입자체계 여자가 자신의 귀하디 귀한 아파트를 노리고
다가온다는 음모론으로 가득하다.
저를 20년 넘게 스토킹하고 베리칩을 박아 넣은
부패경찰 W와 그 증거를 밝혀주시면
사례금으로 10억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저는 월세를 못냈습니다.
미친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똑같이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악착같고 집요한 남자와 사랑 할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지독한 가난함의 가능성을 품은 사람 뿐이다.
참 부모님 말에 삐딱선 타고 일찍 독립한 애들이
자기 밥벌이는 잘해. 그치?
치열하게 사는 애들은 인생 끝까지 치열하게 살고
태평하게 사는 애들이 인생 태평하게 잘 굴러가. 그치?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는 역시 대가리 꽃밭 남자.
그냥 살래. 나 그냥 대충 살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 속터지게 만드는 사람.
굶어죽지 않을까 주변 걱정되게 만드는 한량.
발버둥치지 않고 바다에 누워 흘러가는 대로
움직이는 대로.
저런 남자하고 놀면 또 재미있거든.
가난했을 때 친구랑 가장 재미있게 놀았던 것처럼.
햄버거 세트 하나 시키고 옹기종기 모여서
떠들었던 때가 제일 재미있었거든.
돈이 없으면 공원에서 하루종일 놀고
돈이 있으면 카페에서 음료 하나 시켜 나눠먹고.
그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그때만큼 재미있었을 때가 없었는데.
대가리 텅텅, 대가리 꽃밭 남자 만나고 싶다.
같이 놀다가 같이 굶어 죽는 남자 만나고 싶다.
어디 이루어지지 않을 장대한 미래를 줄창 이야기하지도 않고
내 아파트를 노리는 여자형태의 입자체계 이야기하지도 않고
가난한 내가 너무 불쌍해,
노력하는 내가 너무 가여워 질질짜지도 않고
그냥 재미있는 남자, 이 시간에 오락실가서 같이 게임할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