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온다면 우린 또 이별하고 사랑하겠지.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호들갑 떠는 예술 영화가 제일 싫어. 학과시절때 그런 끔찍한 예술 영화를 억지로 봐야했던 고통을 잊을 수 없고. 처음에는 내가 예술적 기질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공대로 가야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바로 실무에 투입되어 일해야하는 체질인데 학과를 잘 못 선택한 게 아닐까 1초 정도 고민했다. 왜냐하면 예술계 권위자들이 좋아하는 예술 포인트에 난 전혀 공감을 못했거든. 예를 들어 그런거 있잖아. 칸 영화제가 좋아할 법할 감성, 침묵이 길고 롱테이크를 많이 쓰며 소재는 죽음, 섹스, 우울, 퀴어, 여자.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꼴리아> 같은 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같은 거. 홍상수 감독 영화 같은 거. 잔잔하고도 섬세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그 속의 인간 관계에 대한 불합리함의 통찰. 그런데 나는 그것들이 자꾸 인위적으로 느껴지고 모금을 받기 위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면서 몰입이 안되더라고. 오죽하면 대놓고 천박스러움을 택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더 진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권위있는 영화 감독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예술적으로 보이고 감각적으로 보이는지 미리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그 코드가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고 그래서 나는 예술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딱 맞은 예술 영화 감독을 찾게 된 거 있지?
사실 오시이 마모루는 예술 영화 감독이 아니지만 그의 작품 마다 꼭 예술적이다, 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스토리에 본인의 생각, 사색을 그냥 있는대로 다 집어넣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패트레이버 극장판 2>을 보고 사람들이 루즈하고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거든? 그런데 나한테는 코드가 맞나봐. 왜냐면 윤기 감도는 기계와 지독하게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 건조한 대화와 인터넷을 검색해야지만 알 수 있는 어려운 인용구들이 뭔가 멋지거든. 지금도 이노센스 작화를 따라올 일본 애니메이션이 없다고 하지? 눈이 호강하고 생각이 호강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내가 감동 못하는 예술 영화는 잘도 상을 받는 것처럼, 내가 감동하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작품은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만 됐지 막상 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우리가 아는 옹고집, 외골수 천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지.
특히 공각기동대의 후속작 <이노센스>는 아주 외골수의 끝을 보여주는데 너무 어려운 대사, 주제, 그래서 이노센스를 SF의 탈을 쓴 철학서라고 한다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거 같던데? 이노센스는 말이야... 사랑 이야기야... 굳이 장르로 구분하자면 로맨스 SF가 분명해. 물론 내 눈에 로맨스 필터가 박힌 것일 수도 있지만 사이보그 바토도 그렇고, 모토코 역시 가이노이드로 등장하기 때문에 무표정을 보일 지 몰라도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라는 거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모토코에게 여전히 상냥한 바토와 그런 그를 잊지않고 찾아와 주는 모토코의 애정이 안느껴져?
망상이 아니다. 실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시리즈에는 원작 공각기동대에는 없는 바토와 모토코의 로맨스가 추가됐다. 원작에서 바토나 모토코나 그냥 직장 동료일 뿐 사적인 마음이 없거든? 그런데 오시이 마모루 작품 속 바토는 모토코를 향한 애정이 계속해서 나오고 걱정도 하며, 공격당한 그녀의 이름을 구슬프게 외치는 장면도 나온다. (모토코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러나 하필 바토의 짝사랑 상대인 모토코는 시한부 병에 걸린 비련의 여주인공보다 더 불쌍한 여자였으니, 왜냐면 그녀의 기억은 보안상의 이유로 공안 9과를 퇴직하게 되면 지워야하는 정보, 즉 9과를 나와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과거의 기억, 바토에 대한 기억 역시 지울 수 밖에 없다. 그런 모토코가 기억을 가진채 자유의 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바로 공안 9과의 눈을 피해 실종 되어 버리는 것, 그렇게 이노센스는 사라져버린 모토코와 상실감으로 인해 개를 키우는 외로운 바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온몸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와도 이별이 있고 외로움이 있었다.

흔히 기술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서 매우 쉬워졌지만, 정신 이상한 여자애 노리는 변태 아저씨들의 소굴인 채팅 어플과 SNS가 판을 치면서 사랑이 쉬워지지만 이별에 대해서는 너무 간과하고 있다. 가상 세계에서 사랑의 시작이 많아지는 만큼 현실 세계에서 이별이 많아졌다는 게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심, 속내, 그런 거 다 이야기해놓고서는 막상 가까운 가족과 친구에게는 마음 열지 않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기술의 발달로 사랑의 종류도 늘어났지만 이별의 종류도 늘어났다.
모토코가 네트워크로 떠남으로서 만들어진 이별은 21세기에서는 절대 겪을 수 없는 이별하게 된 것처럼, 보드게임 <사이버펑크 2020>에서도 현대 시대에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이별이 펼쳐진다. 전설의 개발자 알트커닝햄이 아라사카에 납치되어 있을 때 그녀는 가상세계로 피하게 되면서 현실세계의 조니 실버핸드와 원치 않은 이별을 하게 된 것처럼 말이지. 물론 <사이버펑크 2077>에서 그 이별은 다시 만남이 되면서 현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미래식 사랑과 이별이 펼쳐진다. SF 영화 <HER> 역시 미래에 다가올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한쪽은 사람이고 한쪽은 기계지만 사랑인 것이 확실하고 이별 역시 확실하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역시 새로운 사랑과 이별, <미키17> 역시 새로운 사랑과 이별, 랭보가 말하는 사랑의 발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명되어 질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점점 많아지는 사랑과 이별의 종류 앞에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명확하게 구분하고 휘둘리지 말라는 거다. 호구가 되면 안된다는 거다. 음... 난 미래에 어떤 사랑을 하고 있으려나. 나중에 엔터테이먼트에서 아이돌의 뇌지도를 프로그래밍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디지털 영혼을 판매한다면? 나는 거기에 푹 빠져 살려나? 엔터테이먼트 회사에서 업데이트할 때마다 비용을 내라 할 것이고 나는 그런 사랑에 돈을 쪽쪽 빨리려나? 미래가 두렵다. 남용과 오용이 판치는 다양한 사랑에 있어서 속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어떤 사랑을 할 때 가장 나답다고 느낄까?

그나저나 결국 이노센스는 어떻게 되나요? 이별만 있는 건가요? 라고 한다면 헤어짐이 있는 곳에 만남이 있는 법, 모토코 역시 바토를 잊지 않고 그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와주게 된다. 그것으로 보아 모토코 역시 바토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기억을 가진채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공안 9과 사람인 바토에게 접근하고 도와준다라... 자칫하면 공안 9과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강제로 끌려가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바토를 만나러 온다라... 클라이막스에서는 아예 가이노이드 하나에 빙의되어 집적 도와주고 당신이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마나 나는 언제나 곁에 있을게, 라는 로맨틱한 대사까지 날리게 된다. 자유를 선택하면 바토에 대한 기억을 잃고, 바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려면 자유를 포기해야하는 모토코. 그런 모토코가 두가지 모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수호천사가 되어 그의 곁에 배회하는 수 밖에 없었다. 랭보가 말하는 사랑의 발명이다. 새로운 사랑 방식인 거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사랑 속에 남용과 오용이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하는데 적어도 둘사이의 사랑에 조건이 없는 것을 보니... 진짜 사랑이 아닐까?
이런 공각기동대 이노센스가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고요? 철학적이고 어려운 SF 영화라고요? 저얼대 아닙니다. SF는 로맨스 영화고 로맨스 영화는 SF입니다. 과학은 늘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랑 방식을 이야기하는 조금 변칙적인 로맨스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