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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갤문학 / DEICIDE] 그들이 오다 - 18

@blog 2025. 10. 6. 19:13

 

 

 

 

 



2005년 5월 7일 밤 11시 30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임시 의무실


  “깨어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의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외계인들이 급히 잡아왔기 때문에 그도 무척이나 경황이 없는 상태였다. 곁에 서 있던 동수가 다급히 물었다.

  “깨, 깨어나지 못한다니요?”
  “자세한 건 X-ray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동공의 상태와 목 부분의 경직으로 볼 때, 상태가 많이 안좋습니다.”
  “상태가 안좋다면요……?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 확실하게 드릴수 있는 말씀은 하나뿐입니다.”

  의사가 조용히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박정석 선수는 경기에 출전할수 없습니다.”

  의사의 말에 선수들은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경기 시작이 채 30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석이 출전할 수 없다니. 그들 중에서 가장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정석이 구하고 쓰러진 정민이었다. 

  “정석아……”

  정민은 자신을 구하려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정석을 보았다. 정석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모두에 대한 미안함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엄습해왔다. 바로 그 때,

  “고쳐라.”

  소리가 난 곳은 외계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이제까지 보던 외계인이 아닌, 화려한 옷을 입은 외계인이 뒤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불가능합니다. 이건…… 우윽!!!!”

  의사는 채 대답하지 못하고 외계인들 중의 하나에게 목을 붙들렸다. 그 외계인은 의사의 목을 책상에 내리 누르며 다시 이야기했다.

  “고쳐라.”
  “큭…… 큭…… 고…… 고친다고 해도, 당장은 도저히 깨어날 수 없습니다! 크윽……”
  “그만둬!”

  요환이 크게 외쳤다. 의사의 목을 누른 외계인이 요환을 노려보았다.

  “뭐?”
  “그러는 니들은 뭐하는 거냐! 죽이는 과학만 발달하고, 살리는 건 못하냐? 이 살인에 미친 자식들아!”

  무섭게 눈을 부릅뜬 요환을, 외계인은 잠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의사를 붙든 손을 놓았다.

  “캐액! 캑! 콜록, 콜록……”

  의사는 목을 붙잡고 땅에 엎드려 한참이나 콜록거렸다. 그리고 그 때, 외계인들 뒤에 서있던 화려한 옷을 입은 외계인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건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니, 너희들만을 탓할 수는 없겠군.”

  프로게이머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첫눈에 봐도 그가 외계인들 중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겠다. 선수 한 명을 보충해라. 경기 시작은 30분 남았다.”

  외계인의 말에 프로게이머들은 조금 안도했으나, 마지막 부분에 당황해했다. 홍진호가 먼저 나섰다.

  “잠깐, 다른 선수를 데려오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 때까지는……”
  “마침 여섯 명이 왔군.”

  진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려한 옷을 입은 외계인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는 슥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음……”

  그리고,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 놀란 표정으로 얼어버린 강민이 있었다.

  “네가 나간다.”
  “……!”

  외계인의 당혹스러운 지시에, 진호가 다급히 말했다. 이건 말도 안되는 명령이었다.

  “자, 잠깐! 민이는 손가락을 다쳤는데……!”
  “대신 맨 마지막 선수로 해주겠다. 더 이상의 아량을 바라지 마라.” 

  화려한 옷의 외계인은 그 화려한 옷깃을 펄럭이며 의무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남아 있던 다른 외계인들이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며 선수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선수들 중 누구 하나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미, 민아!”
  “민아……”

  선수들은 강민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던 강민은, 자기도 모르게 왼손을 살짝 구부려 보았다. 네 손가락은 무심하게도 여전히 아팠고, 그 통증에 강민은 씁쓸히 입술을 깨물었다.

 

 

 




2005년 5월 7일 밤 11시 50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중계스튜디오


  “전국에 계신…… 아니, 전 세계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게임 캐스터 정일훈입니다.”

  정일훈 캐스터가 입을 열었다. 외계인들의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겪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왔습니다.”

  정 캐스터는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곧 이어 말했다.

  “전 세계에서 이 방송을 보고, 또는 듣고 계실 많은 분들. 잠시후 12시 정각에 시작하게 될, 지금의 이 스타크래프트 경기에 전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오늘 경기에 출전하게 되는 다섯 젊은이를 응원해 주십시오. 저도 최선을 다 해서, 오늘의 경기를 여러분께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옆에는 오늘 도움 말씀을 주실 김동수 해설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동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인사를 했다. 경기 시작 직전에 터져버린 사고. 혼수상태인 박정석과 대신 출전한 강민. 그것도 손가락 부상을 당한 강민. 복잡한 생각들의 동수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김동수 해설도 한 말씀 해 주시죠.”
  “……”

  그 바람에, 정일훈 캐스터의 부탁에도 동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정일훈 캐스터가 한번 더 부르자, 그제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김동수 해설?”
  “……예. 이런 자리에 앉게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런 걸 상상이나 했을까요. 전 인류의 운명을 건 대결을 중계하다니……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늘 경기를 펼치는 다섯 선수와 함께, 모든 분들이 다 같이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해 주십시오.”

  동수는 거기까지 이야기했다.

  “예, 알겠습니다. 김동수 해설도, 모두 한 마음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 응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일훈 캐스터가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두워지던 목소리를 다시 힘차게 끌어올렸다.

  “자! 그럼 먼저 오늘 있을 경기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늘 있을 경기 방식과 경기 규칙입니다.”

  데스크 옆의 허공에, 화면이 나타났다. 이 화면이 실제 방송인 것이다. 그 곳에 경기 방식 등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먼저, 경기 방식은 스타크래프트 1 vs 1, 5전 3선승제로 치르게 됩니다. 지구 대표선수 다섯, 외계인 대표선수 다섯이 출전하여 한 선수가 한 경기씩을 하게 되며, 경기의 모든 규칙이나 진행은 이전에 진행되던 스타리그와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한 경기의 승패는 한쪽이 전멸하거나 패배를 선언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으음.”

  정일훈 캐스터가 다음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경기에서 패배한 선수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지구인도, 외계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바란다면, 우리 선수들 중에서 목숨을 잃는 선수가 나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김동수 해설. 맵은 어떻게 적용됩니까?”

  정일훈 캐스터는 더 말하지 못하고 김동수 해설에게 말을 넘겼다. 동수는 그것을 잘 받아서 이야기했다.

  “예, 맵은 이제까지 완전한 미정 상태였습니다. 방금 전 열한시 경 외계인들이 공지한 사항에 따르면, 매 경기가 시작될 때, 현재까지 각종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사용되어져 왔던 맵들 중, 30개에서 랜덤하게 선택되어지게 됩니다. 사실상 특정 맵을 준비해서 연습한다는게 불가능하지요. 선수 개개인의 능력과 감각, 그리고 스타급 센스를 통해서 이 난관을 헤쳐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 그렇군요. 그러면, 오늘 지구 대표 선수들, 선발 엔트리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확인된 사항인데요…… 여기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습니다.”

 

 

 

 



2005년 5월 7일 밤 11시 55분
서울 여의도 MBC, 경기장 계단 앞


  “드디어 다 왔네.”

  임요환이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구를 대표하는 프로게이머 다섯 명은 지금 경기장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굉장한 숫자의 외계인들이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소란스러웠지만, 줄이 잘 맞추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선수들이 경기를 치를 때의 관객들과는 달리,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프로게이머들이 이기기를 바라는 이는 없었다. 강렬한 몇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선수들을 비추었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우주선, 그 주변을 맴돌고 있는 수천 대의 비행접시들, 땅 위에 우글거리는 외계인들, 그리고 6층 높이의 높고 긴 계단 앞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선수들은 너무나도 작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래, 다 왔다.”

  윤열도 계단 위를 슥 올려다보며 말했다. 처음 ‘그들’이 온 날로부터 여기까지 올 때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윤열은 아라를 떠올렸다. 가지 말라고, 출전하지 말라고 애원하던 그 목소리. 그 눈물. 분명히 지금 어디에선가 나를 응원해주고 있겠지. 아라와 같이, 나를 믿고 나를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라야, 지켜보렴. 모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라 너를 위해서, 오늘 이윤열은 최선을 다해 꼭 이길 테니까.

  요환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갔던 민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항상 최고였고, 앞으로도요.’ 민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난 그의 목숨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믿었다. 나 자신조차 포기해버린 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질수 없었다. 나는 패배할 수 없다, 절대로. 요환은 다시 한 번, 절대로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호는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났던 아가씨의 눈빛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참 인상적인 눈빛이었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떠오르면서도, 그 깊었던 눈빛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스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프로게이머라는 사람은 더욱 모르던 그녀. 하지만, ‘사람’을 믿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워진 상황에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건네준 ‘Black-Bean' 이라는 종이쪽지는 이제 그 뜻을 알았을까? 지금도 그 곳에 그대로 있을까? 경기에 출전하면 나를 알아 볼까? 이름은 뭘까? 진호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씩 미소지었다. 모든 해답은, 경기에서 승리한 다음에, 얻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꼭 이겨서, 그 모든 해답을 얻어낼 것이라고, 진호는 굳게 다짐했다.

  강민은 동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을 용호와, 갑작스러운 사고로 출전하지 못하게 된 정석. 주장을 할 때 가장 옆에서 많이 도와 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친 정석이 대신 출전하게 되었다. 내가 정석이보다 잘 할수 있을까? 이런 손을 가지고? 내가 마지막 경기이기도 하고,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볼 수도 없다. 그러니 내 차례까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하지만, 강민은 약해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설혹 마지막 경기인 내 차례까지 오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강민은 한번 크게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 아까 의무실에 챙겨온 무엇인가를 찔러 넣었다.

  정민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많은 것이 혼란스럽고, 많은 생각들이 수없이 머리를 스쳐갔다. 나 대신 다친 정석이의 쓰러져 있는 모습. 출전을 반대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비웃음.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많은 결심들, 그보다 더 많이 스스로에게 자책하고 자학했던 조롱과 비판들. 자신감과 자괴감, 희망과 절망이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 속에서 들리는, 붙잡을 수 있는 분명한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이겨라, 김정민.’

  “우리, 파이팅이나 한번 할까?”

  요환이 돌아서서 선수들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엘(gl)."

  그러고 나서 요환은 씩 웃었다. 그러자 동료 선수들도 피식 웃었다. 지엘(gl). 굿 럭. 행운을 바란다는 스타를 시작할때면 의례적으로 해 왔던 인사가, 오늘따라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정말 오늘처럼 행운이란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날이 또 있었던가. 강민이 그 위에 손을 얹으며 화답했다.

  “굿 럭.”

  그러자 다음은 홍진호와 윤열이 차례로 손을 얹었고, 맨 마지막으로 정민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지엘.”
  “지엘.”
  “굿 럭.”

  모두의 손이 얹히자, 요환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섯 개의 손이 하늘로 번쩍 치켜 올라가며, 밤하늘로 다섯 청년의 맑은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