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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12

@blog 2026. 2. 25. 18:30

 


1
 

 
  10분 뒤면 청수재단에서 보낸 비서가 온다는 사실에 3번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집안 청소도 했고 평소 하지도 사지도 않는 생화까지 사서 꽃병에 꽂았음에도 3번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긴장감을 재문이가 한층 더 증폭시켰는데, 국경 외곽지역을 탐사 후 재문이는 아지트인 3번의 집에 돌아왔지만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좁은 방에 누워 잠만 잤다. 심지어 청수재단 비서가 온다는 말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누워만 있었다.
 

안 씻어도 되니깐 옷이라도 갈아입어. 너 청수재단에 갔을 때 후드티 입고 갔어? 아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문이는 그녀에게 등을 보인채 누워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혹시 감기라도 걸린건가 손을 뻗어 재문이의 이마를 만져보려는 그때, 탁! 그녀의 손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손길을 뿌리치며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재문이가 그렇게 나온 이유는 어제 벌인 3번의 실수 때문일 것이고 그러기에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는 그를 그냥 두기로 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깐.
 


저기, 왔어.
 

 
  그때 청수재단의 비서로 추측되는 사람이 누른 현관문 벨소리에 3번과 62번은 옷매무새를 점검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총기가 흐르고 왁스로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은 젊은 비서, 그리고 노신사라고 하기에는 젊고,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들어보이는 40대 중반정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저... 실례지만 저 분은 누구시죠?

 
  그 남자는 비서의 상관인 것처럼 비서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왔고 어떻게 보면 건방진 자세, 어떻게 보면 한참 상관인 것처럼 팔짱을 낀 자세로 둘을 훝어보았다. 비서와 같은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유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에게서 특유의 아우라를 풍겼는데, 학술원 교관들 같은 엄격함과 청수제단 비서에게서 느껴지는 정확함, 그리고 재문이에게 느껴졌던 침착함이 고루 섞인 복합적인 사람이었고 덕분에 어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때 남자가 자신의 직함을 소개하자 그 어려움은 몇백배로 증폭되었으니, 이름은 생략하고 소개하겠습니다. 청수재단 이사입니다. 
 


...
...
...
...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높아도 너무 높은 사람의 등장에 3번과 62번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반면 이사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않아도 되냐 묻자 3번은 얼마든지 편하게 앉아도 된다면서 새빨게진 얼굴과 버벅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62번은 그마저도 못하고 머리에 과부화가 온듯 얼어버리고 말았다.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은 정부 주도 하에 유지되고 있다하더라도 이미 청수재단이 모든 실권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3번은 물론 62번, 하다못해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만큼 청수 재단 임원진은 왠만한 정부 고위직 인사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장관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등장에 3번과 62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오죽하면 이사가 먼저 말을 걸었을 정도였다.


저기...
네!



뻣뻣한 자세만큼 뻣뻣한 말투로 3번이 말했다.



한재문군은 어디 있나요?

재문이요? 재문이는...

사실 재문군 보러 왔거든요. 원래 얼굴을 보며 집적 임무를 줬어야 했는데 상황이 안되가지고요.

 

 

  다른 임원진에 비해서 이사는 젋은 나이에 속했지만 청수의 미덕인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력이 높은 기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고, 재문이 역시 파종단 중에서 가장 어린나이라고 해도 미록보살돔을 통한 그의 평가, 그의 업적을 알았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학술원에서 파종단의 유력한 지도자라는 평가까지 첨부 받았을 때 이사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 보고 싶은 마음에 집적 임무를 하사하려고 했지만 스케줄이 되지 못했던 것. 그때 이후로 마음이 걸렸던 이사는 자신의 두눈으로 집적 파종단 유력후보자라는 애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고, 호랑이도 제말한다면 온다고 정장 차림의 재문이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서...

 
  소문의 주인공은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눈에 총기 하나 없어보이는 앳된 남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튀어보이는 패션 때문에 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재문이는 청수재단에 갔을 때처럼 2세기 뒤쳐진 디자인의 정장과 여성복을 입었는데 그 사실에 이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수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확인하러 오길 잘했다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서는 현재 임무는 어떻게 됐냐고, 브리핑을 시작하라고 했다.


브리핑이요...?

 
  3번은 현재 상황을 따로 정리한 브리핑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를 못받았다고 말하려던 찰나, 재문이가 그들의 중앙에 서서 간단한 상황 브리핑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허나 브리핑이라고 말하기도 참 뭐한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머릿속에 벌어진 일을 끄집어 내어 청수재단 임원에게 전달해주는 입브리핑이었지만 재문이는 긴장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첫째날, 청수재단에 찾아가 비서에게 사건의 배경에 대해 보고 받고 임무를 부여받음. 그리고 주동자 중 한명이었던 77번을 심문하여 정보 협조에 동의 받음. 저녁 때는 충원 인력으로 온 3번과 62번과의 접선과 동시에 주동자가 행한 것으로 추측되는 자동차 폭발 사고에 휘말림. 둘째날, 주동자에 대한 탐색 시작. 학술원 번호 174번과 91번을 만났지만 큰 성과 거두지 못함. 셋째날, 174번에게 여명의 빛 교회 신도들로 추측되는 실종자 리스트와 비서에게서 받은 여명의 빛 교회 영상을 대조하여 그들이 있을 만한 장소에 대한 탐색 시작. 그리고 해당 지역에 찾아갔지만 뚜렷한 성과 얻지 못함. 그러나 또다시 주동자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방어에 성공. 그러나 주동자를 생포하지 못함. 고용된 사람 역시 고용주에 대한 정보에 대해 전무함. 이상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깐... 지금까지 이룬 성과가 하나도 없단 소리네?
네, 맞습니다.
파종단 출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명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룬 성과가 하나도 없습니다.

 

채광 좋은 3번의 집은 아침부터 햇빛이 거실 고루고루 내려앉았지만 청수재단 이사의 낮빛은 상당히 어두웠다. 거기다 이사 역시 학술원 출신이다보니 오랜 훈련으로 인하여 몸태는 물론 눈빛 역시 특수부대원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웠기에 심각한 표이  무섭게 보이기까지했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때보다 심각해보이는 표정, 이룬 성과가 하나도 없다는 말에 실망한 눈빛, 그의 미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재문이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이건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파종단이 됐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서, 제 손에 청수의 미래가 달렸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서 실수를 벌였습니다. 더 능동적으로, 더 철저하게 했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제 잘못이 더 큽니다!
 


그때 3번이 재문이의 바로 바로 서서 책임을 물으려면 자신한테 물으라고, 왜냐면... 임무에 자꾸 사적인 감정을 집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친언니이다 보니깐... 그리고 부모님께서 아직까지도 언니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찾아다니고 계시니깐 자꾸 사적이 마음이 들어서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요원으로서 자격미달인 저를 벌해주세요!

... 누나

제가 가망성이 없다고 말해도 오히려 호되게 혼내시기 때문에... 왜냐면 아직도 언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 보니깐 저 역시...

 



분명 62번과 3번에 대해 다 알고 있다 생각한 재문이었지만 전혀 모르던 뒷이야기에 눈이 커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서, 왜 주동자의 혈육이 이번 임무에 투입된 거지? 아니 감정적 동요가 생길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계산 못한거야?

 

  갑자기 비난의 화살이 비서에게 쏠리자 비서는 진땀을 빼며 자기도 그 부분을 염두하고 있었지만 최종 시뮬레이터의 결과에 따르면 3번이 임무에 투입됐을때가 훨씬 성공확률이 높다고 했다. 더군다나 셋의 유기성이 다른 졸업생 요원들과 비교할 때도 우수했으며 그러기에 이번 임무의 성공할 확률이 무려 92%나 됐다는 말도 함께했다. 그러자 셋은 말도 안된다며 동시에 소리쳤는데, 왜냐하면 높은 성공 확률 치고 셋은 현재 얻어낸 성과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을 뿐, 간신히 주동자의 공격에 방어하기에만 바빴을 뿐인데 90%가 아득히 넘는 성공확률을 보일리가 없었으니깐. 그때 차가운 표정 연기하고 있었던 이사는 그제야 환한 표정을 지으며 최종시뮬레이터와 자신의 생각이 같다고 했다.

  왜냐고? 너희들은 두번이나 계획적인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두번 모두 방어에 성공했어. 적의 공격을 역이용해 오히려 생포하려는 작전을 생각했나? 그건 너무 큰 욕심이야. 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킨 것만으로도 너희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들이 공격할 차례다. 적이 너희들의 정보를 알아내어 공격했던 것처럼 이제 너희들도 정보 탐색 후 선제공격 하면 돼.

  방금전까지만해서 차가웠던 거실 분위기가 격려로 인하여 따뜻해지면서 셋의 긴장어린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이사는 오직 재문이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 네! 알겠습니다! 온몸이 굳어서는 아무 말도 못했던 62번이 들뜬 목소리와 들뜬 행동으로 둘을 이끌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고, 오버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형에 활기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재문이는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넓은 거실에는 오직 둘, 첫인상부터 분위기까지 닮은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고 더 강해진 아침 햇빛만큼 이사는 재문이에게 더 살가운 미소를 보내며 친아들 대하듯 친근하게 말했다.


기분이 어때?
네?
파종단 리더의 유력 후보자가 되어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이 된 기분이.
 

 
  다른 사람도 아닌 청수 지도부 중 한명인 그가 집적 말하자 재문이는 뭔가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침착한 얼굴빛과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그래. 너희들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라이카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구원해주어야하니깐. 씨앗을 우주로 향해 던진거야. 물론 그 씨앗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사명? 무슨 사명?
새행성 테라포밍을 성공하고 청수 사람들은 그곳으로 이주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이사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는지 자세를 고쳐잡고 자기 옆에 앉아보라고, 괜찮으니깐 편히 앉으라며 소파의 빈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재문는 너무나도 높은 직급의 사람이 보낸 살가운 행동에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파종단의 수장이 되실 높으신 분이 왜그러시냐며 재문이를 높여 부르는 뼈있는 농담을 보냈고 결국 옆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엉덩이를 소파 끝에 앉아 있는게 불편한 모습에 이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으니, 어깨에 힘 좀 빼고 좀 더 안 쪽으로 앉아봐 임마.

 


혹시 사명이라는 게... 위대한 아젠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요즘 후보생들은 그런 있어 보이는 단어로 불러? 나때는 그냥 사명이라고 했는데.
그냥... 미륵보살돔에 계시는 분들이 그렇게 부르셔서요.
그 위대한 아젠다가 없었다면 우린 파종계획 자체를 하지 않았을테니깐.


  3번이 사서 꽂아둔 생화는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계속해서 냄새를 풍겼고, 인간 역시 자신의 멸종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파종 계획을 했다지만 청수재단은 달랐다. 얼마나 더 오래 살고는 중요하지 않아. 인류라는 종이 멸종하든 멸종하지 않든 그건 내 알바 아니야. 다만 같은 인간인 이상 그들이 어떻게 살아아 할지는 관심을 가져줄 필요가 있어. 그리고 이사는 그동안 숨겨왔던 확답을 원하는 눈빛을 보이며 이제 너가 말할 차례라고, 거대한 실수의 여파로 하루살이처럼 픽픽 쓰려져 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서라도 반드시 새행성에서 부여해야하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행동예측과 상담사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입만 미소 지은 것이 아닌 빛처럼 부드럽게, 거실 나무 바닥에 부드럽게 깔린 빛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사의 질문. 그 순간 재문이는 어린시절 마주한 거대하고 드높은 청수재단의 건물처럼 엄청난 압박감에 숨이 막히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숨 한번에 저울의 방향이 바뀌는 것처럼 이 대화 하나에 모든 것을 바꿔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재문이는 알고 있었기에, 정말 잘못하다가는 박재문 박사의 일마저 들통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오직 논리의 방향에서만 대답했다.



인터럽트 같은 것입니다.
인터럽트? 그게 뭐지?


  집요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이사를 마주보지 않고 아주 오랜 과거를 회상하듯 창밖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은 그 기능이 사라졌지만 과거 컴퓨터에는 인터럽트라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컴퓨터가 위기의 순간이 발생했을때 대처해야하는 메뉴얼, 절차, 그리고 우선 순위 같은 것입니다.
그렇군.
그리고 지금 한국은 위기에 빠져 인터럽트를 작동시킨 컴퓨터와 같습니다. 외세의 침입은 물론 지형적인 문제, 정치적 갈등, 그리고 거대한 실수까지. 다른 나라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명령어를 실행하고 있을 때 저희는 살기 급급하게 인터럽트 발동시켰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뚜렷한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저희들은... 오직 인터럽트만 발동시켰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청수는 우리나라를 구해주는 인터럽트 같은 것이겠군.
 
 

그 순간 차분하던 재문이의 눈매가 매서워지더니 마음 속의 울분이라도 쏟아내는 것처럼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까지 인터럽트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럽트 기능만 계속 수행하는 고장 난 컴퓨터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청수재단이 모든 것을 시작하자마자 한국인들은 길을 찾은 것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과거 강대국이었던 일본에게 자비까지 배풀수 있을만큼 막강해졌다는 것을. 그것은 청수가 인터럽트가 아닌 진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안정적으로 변했다에 가깝지. 드디어 친부모를 찾은 아이처럼.

 
 
  청수재단 이사는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대화를 유려하게 이끈 재문이가 너무 기특한 나머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재문이는 정말 오랜만에 받아 보는 어린아이 취급에 부끄러웠는지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볼살이 붉게 물들었다. 부처와 제자 마하가섭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만 짓고 있는 가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미소의 원인은 서로 달랐는데 청수재단 이사는 기특한 마음에 미소 지었다면 재문이는 위대한 아젠다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자기 밖에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박재문 박사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자, 하물며 당신마저 내 앞길을 방해한다면 청수재단 임원진이라고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경고를 담은 미소였다. 이심전심이 아닌 동상이몽의 미소였다.
 
 

  잘들어. 위대한 아젠다는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미덕과 일맥상통하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자아를 가라앉히고 무아로 가서 자비를 배풀어라. 거대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존의 인류로 지내서는 안 돼. 조금은 고통스러운 희생이 따르더라도 새로운 사상에 도달해야만 해. 인간인 이상 가질 수 밖에 없는 불완전성과 그것에 대한 극복의 문제, 알지? 새행성으로 가 목숨을 유지 시키는 게 중요한게 아니야. 이 사상이 없으면 결국 인류는 또다시 멸종의 위기에 처한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 시킬 수 있는 이 위대한 아젠다를 새행성에 전파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너가 해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상에 반대되는 부적격자들이 새행성으로 떠나는 것을 막는 것도 너의 임무고.

 


알겠습니다.

다들 위대한 아젠다를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고 제대로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어. 하지만 재문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하군. 괜히 젊은 현자라고 불리는게 아니었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엽게 생겼어.
 


 
이사는 도톰하게 오른 재문이의 볼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긴 후 볼일 다봤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그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기억났는지 재문이 쪽으로 얼굴을 쭉 빼며 말했다.

 


좋은 소식 하나 전해주는 걸 깜박했네.

?

지금 부여받은 임무, 이 임무에 대한 과정은 모두 데이터화 되어 최종 시뮬레이터로 간다. 그리고 그 최종 시뮬레이터는 당연히 파종선 메인컴퓨터에 연결이 되겠지.

...

그리고 그 메인컴퓨터는 파종단을 이끌 지도자를 추려낼 때 사용될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