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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곡선문답

팬질

by @blog 2023. 12. 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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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시선의 중심이 되는 느낌은 어때. 좋니? 아니면 기분 나쁘니. 사실 너의 좋고 싫고는 중요하지 않아. 이미 넌 내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변함없으니깐. 나의 모든 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갈 때쯤 열패감에 나 자신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어. 인스타그램 어플 삭제하고 계정도 삭제했지만 게시물이 업데이트 됐다는 알림을 보자마자 금붕어처럼 까먹고서는 또다시 보고 있더라. 이것이 바로 사랑인 건가? 왜냐면 사랑에 빠지면 어떤 사람이든 빡대가리가 되니깐.

  하지만 기뻐해 줘. 너의 통치, 너의 독재, 막강하고 무서운 너의 권력, 오늘부로 완전히 끝이니깐. 물론 미련이라는 잔당들이 설치겠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처럼 학과가 갈라졌으니 우린 서로 남남이 되겠지. 그렇지?

 

 

 

 

몰랐던 거야?

...

인스타그램 기록 남는 거 진짜 몰랐다고?

응.

와. 완전 석기시대 사람이네.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끝내려고 했던 내 사랑은 학과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내가 했던 쪽팔린 행동들에 대해서 그가 이유를 묻기 시작하면서 들통나고 말았다. 남자 후배들을 위해서 만든 인스타그램 부계정 중 내가 가장 많이 찾아왔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도 내가 제일 많이 봤다고. 나는 부끄러움을 담당하는 신체가 볼따구가 아닐까 들었을 정도로 얼굴이 새빨게졌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분명 13년 만의 한파다 뭐다 뉴스에서 난리였는데 온몸이 땀에 젖어서 패딩이고 뭐고 다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 그냥...

그냥?

그냥 데셍 연습할 때 모델이 필요해서.

그거 남자 후배들 보라고 올린 사진인데.

...

여자애가 보라고 만든 곳은 전혀 아니었어. 상의 탈의한 사진들도 많을텐데.

...

아무튼 정말 본 거 맞지? 그 아이디 너 맞지?

 

 

  그는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하는 어린아이처럼 뚫어져라 쳐다봤고 난 그를 스쳐 지나가 인문학과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한 곳이 차가워질 정도로 겨울 공기를 힘껏 들이 마시며 달렸지만 생각보다 집요했던 그는 무슨 초대형 거인도 아니고 하얀 입김을 내뿜어내며 바짝 쫒아았다.

 

 

어디가?

화실! 짐 놔두고 왔거든!

화실은 미대에 있는데 왜 인문대로 가?

몰라.

그러니깐 너 내 인스타 훔쳐 본 거 맞지?

아 모른다고!

 

 

 

 

*

 

 

 

 

 

 

 

  좋아. 그러면 반대로 내가 너에게 물어볼게. 내가 뭘 알았냐? 너가 만든 인스타그램 부계정이 남자 후배들만 보라고 만든 곳인 줄 누가 알았냐고. 그냥 학과 애들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들어가 본 것이 다였다. 하지만 몸 선이 뚜렷하게 감도는 그의 사진을 본 순간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처럼 내 세계는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이다. 그만큼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서 나는 가슴 깊숙히 후회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할걸. 미리 예방할걸.

  서둘러 핸드폰을 끄고 눈감고 자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선들,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는 점선, 손가락 끝에 매달린 곡선, 그리고 등으로 내리꽂는 단단한 직선이 떠올랐고 순간 눈이 번뜩 떠진 나는 그 육감적인 선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켰다. 그때부터 나의 인스타그램 염탐질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난 다른 스토커들과는 달리 자기 객관화도 할 줄 알고 스스로 안 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면 지나갈 줄 알았던 내 마음이 액체의 속성을 가진 수채화처럼 자존심의 경계선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더라. 만약 유화였으면 그 위로 덧칠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수채화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신입생이라고는 10명도 안 되는 학과 살려보겠다고 모델까지 자처한 그의 책임감이, 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밥 먹듯이 수업을 빼먹는 교수를 대신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사명감이, 남학생들에게 종종 보여주는 엄격한 모습, 모든 걸 다 던져 버리고 싶다는 약한 모습의 목격자가 되면서 내 마음은 빠른 속도로 가열 됐다. 이제 내 마음은 특이점에 도달했기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이카루스보다 현명했기에 무모하게 먼저 앞서지 않기로 했고 절대 고백할 일은 없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그와 내가 나눈 대화가 10마디 이상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그런 사이에서 고백은 재앙인 것을 아니깐. 하지만 결국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거지같은 인스타그램 방문자 보기 기능 때문에 말이지.

 

 

 

 

*

 

 

 

 

 

 

콜록 콜록. 너 여기서 작업했어?

아 진짜! 왜 따라오는 거야! 가라고!

이렇게 추운데서 그림 그렸어? 콜록콜록. 너 진짜 대단하다.

 

 

  호흡기가 약해서인지, 아니면 나한테는 익숙하지만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그런건지 그는 심하게 기침했다. CC들은 물론 썸남썸녀들이 맨날 죽치고 껴안기로 유명한 장소, 인문대 5층 창고. 나는 이곳에서 짐을 풀어 나만의 작업실로 이용했고 고백하고 싶다는 무모하고 욕심이 들 때면 여기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바닥 곳곳에는 아이돌 브로마이드를 붙인 팬의 방처럼 그를 그린 그림들이 널려있었고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보이는 족족 집어 구겨버렸다.

 

 

왜 화실을 두고 여기서 작업한 거야?

화실에 자리 없거든.

왜?

컴퓨터가 다 차지했어.

뭐? 벌써?

그래. 생성형 ai 뭐시기 학과 벌써 생겼다고.

 

 

 

 

 

  순간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고 나는 괜히 말했나 내심 후회했다. 이해는 한다. 같은 폐과 소식이라도 대충 학점을 때우기 위해서 설렁설렁 수업을 듣던 학생하고 학과를 살려보겠다고 동분서주 바쁘게 움직이던 과대가 받는 여파는 상대적으로 다르니깐.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금방 들통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림도 치워지고 석고상도 다 치워졌어. 우리 사물함도 치워졌을걸? 

아직 방학도 시작 안 했잖아.

학교에서 빨리 없애고 싶어서 그런 걸 어떻게 해.

그래서... 이런 곳에서 그린 거야?

그렇지 뭐.

 

 

  예술의 신은 스토커의 사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는지 거기까지만 사랑하라고 천벌을 내리셨고,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그와 나의 유일한 공통점인 미술 학과는 폐과가 확정됐다. 후배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주겠다는 그의 노력도, 그런 그를 잘 그려보고 싶다는 내 열정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헛짓거리로 보였나 보다.

 

 

 

 

 

 

  그래도 나, 무슨 피카소에 빙의한 것처럼 어떤 사명감에 그를 누구보다 열심히 그렸다. 히터라고는 없는 5층 창고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매드사이언티스트처럼 그의 신체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렸고 누구보다 잘 그릴 수 있다며 혼자 뿌듯해했다. 그냥 골격 위에 가죽만 덮어 진 것처럼 보이는 다른 남자들의 등과 달리 그의 등은 좀 더 살아있는 무언가와 같아서 기록해보고 싶었거든. 단순 후배들을 위한 과대의 노력이라고 지나가기에는 고귀했기에 오래도록 남기고 싶었으니깐. 그러다보니 나의 드로잉 대상은 언제나 그의 신체에 매달린 슬픈 선들이었고 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흑연가루의 집합에는 늘 그가 있었다. 현실에서는 만나지 못하니깐 팬픽을 쓰면서 망상하는 아이돌의 팬처럼, 실제 거대한 로보트를 가지지 못하니깐 허접한 플라스틱 장난감 로보트라도 가지고 싶은 소년처럼, 복제의 복제의 복제의 복제의 그녀라도 좋아 죽는 오타쿠처럼 나 역시 좋아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뿌듯이고 나발이고 그림의 주인공이 알아차리기 전에 스케치북을 치우려고 했고 내 손길을 막는 사람 역시 그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왜 치워. 좀 보자.

그냥 연습용 그림이라니깐!

이거 나 맞지? 나 이러고 사진 찍은 거 인스타에 올렸는데.

아니야! 쫌!

아니 모델이 보고 싶다는 데 왜 막아?

완전 이상하다고!

 

 

  한겨울에 씨름하는 것도 아니고 우린 스케치북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런 신경전, 초등학교 이후로 진짜 오랜만이었다. 내 허락도 없이 내 유희왕 카드 쓰겠다는 남동생과 다툰 이후로 이런 유치한 싸움은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나는 나보다 몇십센치미터나 큰 그에게 꽤나 선전하며 스케치북을 지켜냈지만

 

!

 

  흑연 가루로는 절대 재현할 수 없는 그의 뜨거운 날숨이 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볼이 새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붉어졌고 결국 스케치북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정신없이 열어보는 그에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시작했다.

 

 

 

그냥 적당량의 근육이 있어서 질감 표현하기도 좋고 음영 그리기 연습에도 좋고

...

절대 음흉한 의도는 전혀 없어. 그냥 그림 대상으로 좋았을 뿐이야.

...

그리고 학과를 위해 애쓰는 모습도 멋있고

...

아니! 너한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

너... 내 말 듣고 있니?

 

 

 

  이미 그의 모든 감각은 내가 그린 그림선에 쏠려 있었고 길면 30분, 빠르면 5분 만에 그렸던 허접한 그림을 무슨 미술관에 걸린 작품처럼 진중하게 보았다. 스케치북이 넘어갈수록 단순 손가락만 그리던 그림에서 발목, 어깨, 뒷통수, 그리고 내 마음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의 얼굴을 그렸고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괜히 창피했다.

 

 

 

 

 

 

  잘 그렸니 못 그렸니. 하긴 너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고 내가 만들어 보고 싶어서 만든 것이니깐.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갔어도 나는 그를 그렸을 것이고 폐과가 확정된 이 학과를 선택했을 거다. 왜냐하면 생긴 것만 따뜻하게 생긴 차가운 햇빛이 그와 그가 그려진 스케치북 위로 내려앉았을 때, 금붕어처럼 또 까먹고서는 다시 한번 그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계속해서 반복되는 의지. 계속해서 하고 싶은 내 마음. 끊임없이 딥러닝 하는 인공지능처럼.

  하늘 역시 오직 이 사람밖에 없다는 뜻으로 햇빛이 그에게만 내리비추어졌고,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고 예술의 신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어두운 창고에서 유일하게 빛이 내리는 곳은 그의 이마 위였다.

 

 

 

야. 너 나를 이렇게 생각했었냐?

...

진작에 좀 알아챘을 걸.

 

 

 

 

 

 

 

 

 

 

+

 

 

 

김남준의 등짝을 볼 때마다 한번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 빛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저 감각적인 사진을 보고 쓰고 싶어지더라. 

 

 

2D 캐릭터를 실제로 만날 수 없으니깐 그녀의 복제의 복제라도 가지면서 사랑하려는 오타쿠의 마음처럼

실제로 고백할 수 없었던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복제품이라도 그리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나 역시 김남준의 복제품인 사진의 복제품인 인스타사진의 복제품인 팬픽을 쓰면서 그 안에서 만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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