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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02번의 사인이 심해 동물의 습격으로 인한 잠수복 손상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확한 사인은 아니었다. 99번처럼 불량 장비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해구를 향하여 다이빙을 할 때 핼맷이 손상 받아 기압차로 인해 사망했을 수도 있으니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해라 어디서 무슨 상황이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고 구조 요청을 해도 구조 되기 전에 먼저 사망해버리는 드높은 죽음의 파라미터. 학술원 훈련보다 엄격하고도 가학적인 심해 환경에 재문이 역시 당하지 않는다라는 보장도 없었다. 만약 어떤 기적적인 확률로 잠수복에 물이 샌다면? 정말 어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위치도 파악되지 않는다면? 천하의 재문이도 그 상황에서는 심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 것이고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재문이는 우선 침착하게 교관에게 SOS를 요청, 그러나 우주보다 변덕스러운 심해였기에 계속되는 통신장애가 걸렸고 그 사이 점점 바닷물은 잠수복의 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기지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으로 왔고 잠수복의 비상대처기능 역시 죄다 먹통인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결국 차가운 바닷물은 허리, 가슴, 그리고 어깨까지 차올랐고 머리까지 덮쳐지기 직전에 재문이는 있는대로 숨을 들어마시며 꾹 참았다. 귀 속으로 물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잠수복은 바닷물로 완전히 채워져 버렸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 숨참지 말고 빨리 죽는게 낫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발작에 가까운 기침이 나오면서 입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버렸다. 쿨럭. 쿨럭. 폐는 본능적으로 물을 뱉기위해 심한 헛구역질을 했지만 이는 오히려 부작용이 되어 폐 깊은 곳까지 물로 채워버리는 비극의 상황. 재문이의 신체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온갖 본능적인 발버둥과 몸부림을 쳤지만 넓고 깊은 심해에서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간은 고작 1미터 뿐이었고, 그 몸부림으로 만들어낸 물방울 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지면서 청수에서 나름 유망했던 인재 한명은 그렇게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심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살생유택. 사람에게는 그것이 미덕일지도 모르지만 심해는 태어난 생물을 축복해주지도 않고 죽은 생물을 슬퍼해주지도 않았기에 오래도록 기억도록 만들어 주지 않았다. 형태를 온전하게 두지도 않았다. 그렇게 육지에서 태어난 소년의 몸은 물로 인하여 변질이 시작됐고 이목구비는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르다가 조각조각 분해됐다. 그 모습을 발견한 심해동물은 먹이인줄 알았지만 단단한 잠수복으로 인하여 결국 포기, 재문이의 신체는 늙어 죽어가는 조개처럼 단단한 껍질 안에서 부패하고, 썩고, 녹아내려 결국 쪼개질대로 쪼개지면서 물이 들어왔던 정체모를 구멍으로 모든 것이 빠져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살이 아닌 뼈는 형태를 유지하며 잠수복 안에 그대로 있었고, 달그락 달그락. 해류에 잠수복이 움직일 때마다 뼈와 잠수복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재문이는 심해를 떠도는 유령의 모습으로 환복하게 되었다. 심해 명상을 하기 위하여 해구 속으로 뛰어드는 26번을 지켜봐줄 수 있고 지켜줄 수도 있으며, 26번이 미세한 인기척에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아도 단순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미지의 무언가로 다시.
하아...
순간 목구멍 깊숙히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고 어두운 심해 대신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늘 봐오던 익숙한 기숙사 천장. 천천히 현실감각이 돌아오고 나서야 재문이는 그것이 단숨 꿈, 그것도 요즘 자주 꾸는 악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 지진 해일의 위험에서 벗어난지 꽤 됐는데. 게다가 자신만 살아남는 것도 아닌 학술원 모든 후보생들을 탈출시켰고 영웅취급까지 받았는데 왜 그때 벌어질 수 있었던 최악의 순간이 자꾸만 꿈에서 나타나는 건지. 재문이는 그때의 일은 가짜, 말끔하게 수리된 학술원 역시 가짜, 오직 땀으로 젖어버린 자신의 몸과 지금의 감각만이 진짜가 아닐까라는 우울한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침울한 생각을 마른세수로 떨쳐내고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하여 재문이는 무거운 몸을 이끌로 욕실로 향했다. 사실 오늘 휴일이고 늦게까지 잘 수 있었지만 곧 있을 컨퍼런스에서 높으신 분이 하사하는 상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꽃단장을 해야만 했다. 용기와 모범심으로 무장하여 학술원을 지킨 영웅에게 내리는 훈장. 언제는 후보생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막아버려 놓고서는 뒤늦게서야 기특하다고 상을 주고 사료에 간식까지 입에 넣어주는 꼴이라니.
하지만 재문이는 그러한 감정을 마음 속 해구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며 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씻고, 물기 묻은 몸을 구석구석 닦으며 한켠에 곧바르게 접혀져 있는 하얀 와이셔츠와 검정색 정장, 검정색 장갑과 검정 넥타이를 매면서 최소한의 격식을 차리게 되었다. 그런 무채색의 패션과 상반되게 넥타이 핀은 금색으로 상대적으로 튀어보였는데 예전 학술원 후보생들이 참가했던 컴퍼런스 땐 분명 넥타이 핀이 태극무늬 마크였지만 지금은 어떤 기묘한 모양, 점점 커져가는 세개의 파도 형상이 그려진 넥타이 핀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의전팀이 실수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국가가 완전히 저물고 새 국가가 시작됐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조였고 재문이는 그 엠블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새로운 넥타이핀을 매며 컨퍼런스가 열리는 상층부로 향했다.
*
청수의 중요 심해 기지인 미륵보살 돔은 돔이라고 일컸었지만 지상에서 볼때만 돔처럼 반구형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지 심해로 들어가면 거대한 하나 건물,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거탑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고위관료들은 상층부에, 과학자 및 무기개발자는 중간층, 심해 깊은 곳으로 가면갈수록 보안과 함께 프로젝트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햇빛이 도달하지 못한 가장 아래층에는 청수재단이 직속 관리하는 학술원이 있었다. 이처럼 학술원엔 누구도 쉽게 들어오지 못했지만 학술원 후보생들 역시 보안의 이유로 쉽게 나갈 수 없었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재문이만 상층부로 갈 수 있는 스케이프를 허가, 그리고 그곳으로 도착했다.
와...
높으신 분들이 있는 곳이기에 평소보다 감정을 더욱 절제하겠다 다짐했던 재문이었지만 상층부 복도의 전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높은 수압과 햇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위치 때문에 학술원에는 절대 없는 거대한 유리막이 오른편을 차지하고 있었고, 아침의 해를 받은 바닷물, 그리고 그 바닷물을 통과한 황금색 빛들은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앉으면서 상층부의 전체적인 모습은 황금으로 이루어진 천국과도 같았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햇빛에 재문이는 입까지 벌리며 그 광경에 심취해 있었을 때 뒤늦게서야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제야 재문이는 자신이 컨퍼런스 때문에 상층부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서둘러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갔다.
컨퍼런스룸은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테이블마다 검붉은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생화가 담긴 꽃병, 그리고 귀빈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있었는데 재문이는 자신이 이름이 적혀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고개를 푹숙였다. 모두들 반가운 인사와 재미있는 남의 이야기, 그리고 급격하게 부상하는 청수재단의 이야기로 끼리끼리 뭉쳤지만 손자뻘되는 재문이는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에 끼기도 싫었고 낄 수도 없었다. 물론 아주 어린시절 자신을 학술원으로 추천해준 물리학자 스티브 한 선생님을 만난다면 먼저 인사를 건낼 자신이 있지만 이 수많은 과학자와 귀빈들 사이에서 그 한 분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또한 연락 안한지도 오래 되었기에 자신의 인사를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야. 아빠 찾으러 왔어?
그때 성인도 되지 않는 남자 아이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이 신기해 보여서인지, 혹은 가소롭게 보였는지 한 중년 남자가 가만히 있던 재문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면 엄마 찾으러 왔니? 누구 엄마 아들이니?
...
어른이 물었으면 대답해야지. 어린애가 여기서 무슨 볼 일 있냐고.
..
이놈 고집있는거 봐라? 야. 여기가 뭐 심심하면 오는 곳인 줄 알아?
강박사 그만해. 몇년 지나면 당신네 부서 통째로 없애버릴 수도 있는 분이니깐.
그때 검정 롱코트를 입은 인상 좋아보이는 노신사가 호통 쳤고 중년 남자는 그 노신사의 부하 직원이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섰다. 그리고 노신사는 모자를 벗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재문이에게 예의를 차린 인사와 함께 사과를 했다.
학술원 후보생 맞지?
...
대신 사과하겠네. 학술원 후보생에 대한 정보는 워낙 극비라서 아는 사람도 없고 학술원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으니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귀하신 몸이 이런 곳에 집적 찾아와주시다니 영광이군. 학술원 후보생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야. 유령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존해 있었다니.
그런데도 들켜버렸네요.
왜냐면 그애들에게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거든. 뭔가 섬뜻한 아우라 말이야.
...
게다가 내게 있어서 학술원 후보생은 조금 특별한 존재거든. 까딱하면 적이 될 뻔도 했었고.
...
왜 그러지? 나와 대화하기 싫은건가? 하지만 아직 컨퍼런스까진 시간이 남았고 난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 안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시, 배려 속에 숨긴 공격성을 파악하자 재문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고 인상 좋은 노신사의 눈매 역시 날카로워졌다. 그제야 재문이는 그가 군인 특유의 단단한 눈빛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챘고 분명 군 고위급 장교, 혹은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추측을 시도,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아직도 옛국가의 미덕을 예찬하는 사람들. 게임으로 따지자면 도시를 관리하는데 있어서 자꾸만 불행도를 높이는 내부의 적. 결국에는 제명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존재가 건낸 관심을 거절한다면 오히려 그건 약점으로 보일 수 있기에 재문이는 계속 대화하자는 뜻으로 가볍게 미소지었고 노신사는 그의 뜻에 따라 옆에 앉으면서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오해하지 말게. 다 과거 일이야. 쓸데없는 정의감에 사로잡혔던 과거.
괜찮습니다.
호기로운 시도였지. 손자 손녀뻘 되는 애니깐 모두 방심하고 우습게 봤던거야. 하지만 이미 학술원에서 자란 애들은 사회 곳곳에 자리잡다 못해서 무슨 요원들처럼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더군. 우리가 손을 써볼 수도 없이, 반격할 기회도 없이 완벽하게.
...
그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철저한가.
글쎄요.
그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완벽한가.
글쎄요.
그들이 받았던 커리큘럼들, 그건 인간인 이상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스케쥴이던데. 건장한 성인 남자도 못하는데 어떻게 어린 애들이 할까 생각했지.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지.
...
철저함과 완벽함의 이유는 거기에 있더군.
왜요? 그래서 방심한 게 후회라도 되시나요?
살짝 화가 담긴 재문이의 말에 노신사는 손사례를 치며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럴리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불가능한 싸움이었는 걸.
...
이길 수 없었던 게 당연한거야.
그래놓고서는 노신사도 아차했는지 “한 번 더 말하지만 절대 오해하지 말게. 난 청수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고 뭣도 모르고 날뛴 내 과거의 과오를 반성한다는 소리야. 아무런 감정, 아무런 미련도 없다네.”라며 뒤늦은 변명했다. 그러나 재문이는 노신사의 목소리에 숨은 미묘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쉬움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니, 목소리만 아니라 이미 얼굴부터 일그러진 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인정하지 못하는 노장, 새나라의 군주에게 자신의 머리를 쳐주길 바라는 망국의 장군처럼 노신사는 재문이 앞에 낙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 조명이 꺼지면서 노신사의 표정은 어둠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강당 앞에 유일하게 조명빛을 받는 파도 모양의 형상, 청수재단의 엠블럼을 재문이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
시상식은 재문이가 예상했던 대로 별탈없이 지나갔고 재문이가 작성한 소감문 역시 그 누구의 비위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기립박수까지 받으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수많은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양손 가득 꽃다발과 상패를 들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케이프를 타려는 재문이. 그러나 스케이프 주변에는 워낙 사람들이 많았고 또 낮선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재문이는 비상 계단을 이용하여 내려가기로 했다. 그렇게 한층을 내려가다가 상층부처럼 높은 천장과 복도 오른편에 거대한 유리벽이 차지하고 있는 다른 층에 도달하게 되었고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어느 금발의 단발머리 여자, 한쪽 팔을 붕대로 감아서 목에 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의 여자, 26번. 재문이는 26번을 다른 곳도 아닌 상층부에 만났다는 사실에, 게다가 낮선 사람들과 영혼없는 인사를 주고 받아서 심적으로 지쳐있었는데 그녀를 만나자 반가운 나머지 달려갔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재문이 앞을 막아섰다.
37번 후보생. 맞지?
네?
학술원 후보생 맞냐고.
네.
특수 과업 운영 이사회 정신의학과, 박재문 박사다.
재문이는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지만 그는 재문이를 무슨 연구대상 보듯 뚫어져라 쳐다 보았고 이에 질세라 재문이 역시 그의 의중을 파악해보려고 눈을 봤지만 햇빛에 반사된 안경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사 눈이 보였다고 하더라도 미륵보살돔 사람들 특유의 심해 같은 눈빛과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 때문에 쉽사리 심리를 파악하지 못했을 터, 결국 재문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부담스러움 눈빛을 건뎌내며 박재문 박사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불러냈는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수상을 축하하네. 상층부부터 모든 곳에서 너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과찬입니다.
과찬이긴. 너 아니었으면 후보생들 전원 사망처리 됐을텐데. 안그래?
아닙니다.
극박한 상황인건 사실이잖아. 스케이프도 작동안되고 계단도 막혀버리고.
...
혹시 위에서 내린 판단에 서운함을 느낀 건 아니겠지?
...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네.
황금빛이 감도는 그곳이 천국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천국을 가장한 함정, 눈 덮인 산을 뒤지고 다니는 배고픈 사슴을 잡기 위하여 과일을 쌓아놓은 달콤한 덫. 만약 여기서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어진다면 곤란해지리라는 것을 재문이는 알고 있기에 컨퍼런스에 있을 때처럼 다시한번 마음의 가면을 쓰고 오직 원하는 대답만 해주는 기계처럼 작동했다.
아니요. 적확하고 효율적인 판단입니다.
...
저희가 요원 겸 지도자가 될 후보생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후보생이니깐요.
...
후보생보다는 지금 바로 청수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박사님을 구하는 선택,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도 옳은 판단입니다.
검정색 슈트를 입은 재문이와 정반대로 박재문 박사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터라 후광을 받은 천사처럼 눈부시게 빛났고 햇빛에 반사된 안경 역시 절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신의 얼굴처럼 빛을 잃지 않았다. 단 복도 의자에 앉아있는 26번은 속내 다 보이는 감정을 보였는데 재문이의 대답에 매우 실망했는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았으나 재문이는 그녀의 시선을 일절 무시, 어떠한 명령을 내려도 복종할 수 있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박재문 박사를 올려다 보면서 그렇게 대답과 반응을 기다렸다.
얼추 맞춘건지, 아니면 정말 너의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대답을 한 건 사실이군.
...
그래.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 청수재단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국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우린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정말 몹쓸짓을 한 게 맞다.
...
하지만 청수의 눈으로, 그리고 현재 국가의 입장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
지금 우린 변곡점을 넘어섰다. 천천히 죽어가고 있어. 과학자는 물론 항공우주공학자, 물리학자 그 모든 일손이 부족해. 반면 후보생은 언제든지 다시 뽑을 수 있고 다시 교육 시킬 수 있다. 타이트하게 스케줄만 짠다면 한다면 몇년 안에도 가능해.
그리고 박재문 박사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준 재문이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그때 후보생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던 변명, 혹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했던 것은 주제 넘은 사람들의 시간이 너무 길었고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설치한 덫에 걸려 철조망을 휘감은 사슴이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늑대와 승냥이를 보고 기세등등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나이에 맞지 않은 작은 옷을 입고 자신이 아직도 아이라 생각하는 어른과도 같다. 자신을 모르기에 싸운 것이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며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가축화가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같은 가축의 살을 탐내는 본능적인 짐승새끼, 아침마다 살점과 피 묻힌 입을 보여주며 주인을 분노하게 만드는 돼지새끼들.
강한 자아가 이 나라을 부강하게 만들어주었느냐. 강한 마음이 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느냐. 사실 그 전부터 징조가 계속 보이지 않았느냐. 조금이라도 타인을 갈구하는 목소리. 조금이라도 뭉쳐보려는 어떤 본능에 입각한 문화. 붕괴와 괴리로 스스로 죽음의 길을 만드는 선택. 청수가 아니었으면 우린 모두 죽었어. 소리지르지 않았다면 범 아시아 협력체에게 뼈도 못추리게 먹혔을거라고. 수도까지 먹혀버린 상황에서 무슨 희망을 찾으라고. 어느 나라의 식민지가 되거나 무정부 국가가 되어 모두 진짜 짐승이 될뻔했다고.
철조망을 잘라주고 사슴에게 약까지 발라준 우리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 건데. 사슴에게 호랑이를 피하고 호랑이를 섬겨야 한다고 알려준 우리가 어떻게 적이 될 수 있는 건데. 호랑이로 태어난 자들을 구분하고 알려주는 건 지혜로운 자의 행동이다. 이에 반해서 자연이 정해놓은 균형을 역행하는 자는 치열한 엔트로피의 싸움만 하다가 소멸될 것이고. 그리고 드디어 이치와 본분을 찾지 못했던 분쟁의 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지금, 우린 변곡점을 이겨나가야만 해. 그 모든 것보다 이것이 최우선이야.
박재문 박사위로 햇빛을 담아낸 황금색 물결이 일렁거렸고 재문이는 그 모습에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은 그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기에 어떠한 사람의 본심도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또 자신은 그 누구보다 본심을 잘 숨기고 있기에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박재문 박사를 만나고 나서 생각을 바꿔먹기로 했다. 괴물은 알 수 없기에 괴물이다. 그 중 심해에서 사는 괴물을 상대하지 말아라. 재문이는 방금과 같이 충성하는 척하는 똘망똘망한 눈을 보여주지 않았고 대신 고개를 푹 숙이며 그의 긴 연설의 감상평을 말했다. 박사님 말이 옳습니다.
그래. 37번은 다른 후보생들보다 똑똑하니 잘 이해했을거라 생각한다. 그에 반해서...
?
혹시 저 여자애하고 친한가?
박재문 박사는 곁눈짓으로 26번을 가르켰고 재문이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동기입니다.
팔을 크게 다친 거 같던데.
그게... 지진해일 때 저에게 큰 의지와 도움을 주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것을 기록화하고 수치화 할 수 있나?
...
너가 모든 잠수정을 오토 드라이빙했다는 기록 것처럼 어떻게 보고서로 올릴 수 있는 증거가 있냐고.
...아니요.
증거가 없다면 없는거야. 증인의 주장만으로 사실이 되지 않지.
알겠습니다.
게다가 저 후보생, 사상이 많이 의심되는 후보생이더군. 우리를 보자마자 화내더라. 왜 스케이프를 잠궜냐고. 양심이 찔리지도 않느냐면서 말이야.
...
저런 덜떨어진 애가 어떻게 후보생이 됐는지 모르겠군. 가서 잘 가르쳐주게. 말 안들으면 혼내기도 하고.
그렇게 긴 담화를 마친 박재문 박사는 청명한 구두소리를 내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고 넓고 높은 복도에 남아있는 사람은 이제 막 남자의 태를 갖추기 시작한 37번과 그보다는 좀 더 성숙한 26번 뿐. 심해의 입장에서 본다면 둘은 공기로 가득찬 어항 안에 자라나는 금붕어였고 특히 37번은 완성의 나이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도 먼 새끼금붕어였다. 조심하고 사려야 하는 나이대, 누구의 심기도 건들지 말고 숨죽여야 하는 위치였지만 그는 매우 위헙적인 표정과 한손에 주머니를 넣고 짝다리를 짓는 건방진 자세로 26번 앞에 섰고, 26번은 그의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단념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덥잖은 말만 재문이에게 건냈을 뿐이다.
여기 진짜 좋다. 심해라고 해서 다 같은 심해인 줄 알았는데.
...
적어도 여긴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잖아.
...
공기도 왠지 더 깨끗한 거 같고. 마음도 따뜻해지는
꼭 그렇게 외국인 티를 내야겠어?
재문이가 내뱉은 가슴 속 뜨거운 응어리는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 급속도로 식으면서 날카로운 칼이 되었고 그 칼은 26번의 후두를 정확히 찌르면서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26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건방진 소리를 한 그 애를 올려다 보는 순간, 복도의 온기가 일순간에 차가워지는 감각의 오류를 느끼면서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각은 촉각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공감각의 영역에 있기에 이 모순이 가능하다. 이때까지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러니깐 단순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똑똑한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그에게는 교관들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눈, 아니 교관을 넘어서 오래전 한 번 봤던 청수의 총수가 가지고 있던 한기를 눈 안에 똑같이 담고 있었다. 심해의 깊음과 변덕에도 결코 녹지 않는 거대한 지형이자 거대한 축이 되어버린 빙하 지대. 두드려도 깨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성.
재문아. 내 할머니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거지 난 외국인이 아니야. 오히려 너보다 더 한국에서 오래 산 천연 한국인이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누나 첫 인상은 딱봐도 외국인인데. 머리라도 검정색으로 염색하던가.
말하는 싸가지 봐라. 왜 또 시비야.
왜 그런 말을 했냐고. 양심이 있니 없니라는 말 왜 했냐고.
화나잖아! 나도 그렇지만 너도 죽을 뻔 했다고! 이런 취급 받는데 어느 누가 화 안나겠어!
우리가 무슨 보호받고 구출받아야 하는 왕자 공주님인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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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슨 최우선으로 보존 되어야 하는 국보인 줄 알았어?
...
어리다고 지켜주고 보호해 줄 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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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나 형들이 나한테 그렇게 대해 주지 않는 것 보고 눈치챘는데.
재문아!
그러면 그렇게 이해하고 행동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튀고 싶어서 난리인건데.
...
왜 그런 소리를 해서 밉보이려는건데.
이제 황금의 시간이 지나가고 복도를 채우는 황금의 색은 좀 더 위협적인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재문이의 손에 들린 꽃들 역시 기존의 색들과 무관하게 붉게 변했다. 하지만 황금색을 띤 그녀의 머리카락은 붉은 빛을 받아도 황금빛을 유지했고 그건 재문이의 칠흑색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원래의 색을 잃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에게 그딴 소리나 하다니.
...
진짜 니가 제일 나쁘다.
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2 (0) | 2025.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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