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esFORCE 취중진담) 조용호

외부 스크랩

by @blog 2021. 1. 18. 23:28

본문

 

 

 

 

 

나는 프로다, 고로 아름답다

신동(神童), 목동(牧童), 인동초(忍冬草). KTF 조용호는 별명도 많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신동’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저글링과 울트라리스크를 환상적으로 사용하면서 ‘목동’이 됐다.

데뷔한 지 6년만에 에서 우승컵을 안으며 고난을 이겨냈다는 뜻으로 ‘인동초’라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별명은 진화해 갔다. 2006년 우승 이후 성적이 추락하며 데뷔 이후 가장 큰 위기를 안았던 조용호는 2007년 부활의 기지개를 펴고 있다. 2007년 그가 갖고 싶은 새로운 별명은 ‘프로’ 조용호가 아닐까.

조용호의 각오와 목표를 소주 잔에 담았다.

남윤성 기자 force7@ 사진=이 건 기자 force6@

할머니와 술

조용호는 술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술을 마셨다. 다른 사람들보다 상당히 일찍 접했다. 그가 일찍 술을 마시게 된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다. 부산에서 조용호가 살던 곳과 할머니가 계시던 곳은 걸어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 사셨기 때문에 조용호는 자주 할머니 댁을 찾았고, 그 때마다 할머니는 식탁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내오셨다.

“할머니께서 치매로 고생하셨어요. 식사할 때마다 아버지가 오신 줄 알고 탁주를 반주로 내오시는 거에요. 그 때마다 “할머니 저 용호에요. 아직 어려서 술 못 마셔요”라고 거절했지만 맛있다면서 꼭 마시라고 하시더라고요. 하도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한 번에 다 마셨어요. 달착지근하니 맛있던데요.”

할머니가 내주시는 술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용호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몰랐어요. 한 잔씩 마시던 막걸리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계속 가슴에 남네요.”

"원래 프로토스였어요”

조용호가 처음 스타크래프트를 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정규 수업을 마친 뒤 학원으로 가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PC방으로 자취를 감춘 것. 조용호도 호기심에 이끌려 <스타크래프트>를 처음하게 됐다.

“친구가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준다면서 우쭐대더라고요. <헌터>에서 1대1을 했는데 제가 3게이트웨이 질럿 러시로 이겨버렸어요. 만약 그 경기에서 졌다면 <스타크래프트>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에요. 승부욕이 강하면서도 포기도 빠르거든요.”

친구가 처음으로 가르쳐준 종족이 프로토스였기 때문에 조용호는 계속 프로토스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큰 깨달음을 얻어 종족을 바꿨다. 무한 맵에서 저그와 게임을 하던 중 갑자기 ‘소 떼’가 우르르 달려 나오더란다. 질럿과 드라군으로는 아무리 때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유닛을 보고 저그의 매력에 빠졌다. 유닛의 이름은 울트라리스크였고, 훗날 조용호는 이를 활용해 ‘목동’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가출, 그리고 데뷔

조용호는 17살 때부터 게이머로 활동했다. 당시에는 가장 나이 어린 게이머였고, ‘어린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게이머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중학교때까지만 하더라도 전교에서 상위권에 속하면서 성적이 상당히 좋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2000년 3월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적이 좋았던 아들이 갑자기 게임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받아줄 부모가 몇이나 될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 조용호는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배틀넷을 통해 알고 지낸 형들이 많았어요. 주로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안양에서 PC방 후원을 받으면서 게임을 하더라고요. 무작정 안양으로 갔고, 거기에서 김은동 감독님을 만났죠. 당시 PC방 사장님이셨어요.”

가출로 인한 아픈 추억도 갖고 있다. 아직 초창기라 선수들의 활동비를 가로채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는데 조용호도 그 희생양이 됐다. 당시 50만원을 갖고 있던 그는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동안 팀의 운영비로 50만원을 모두 썼다. 돌려주겠다던 팀원들은 매니저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주지 않았다.

“사무실을 이전한다고 하더니 사라졌어요. 저도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소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김은동 감독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은퇴한 나경보 선수와 함께 팀을 꾸렸어요.”

 

 

 

 

천재성 때문에 오해 사기도

조용호는 2001년말 프로게이머 인증을 받은 뒤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지 불과 1년만에 온게임넷과 MBC게임 개인리그에서 결승전에 동반 진출했다. 두 대회 모두 이윤열을 만나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그쳤지만 주위에서는 강도경, 홍진호의 뒤를 이을 저그의 재목이 나타났다고 추켜 세웠고, ‘천재’, ‘신동’ 등 새로운 닉네임이 생겼다.

조용호는 그다지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빠른 손놀림을 갖고 있고, 상황에 대한 판단도 빠르다. 상황 대처 능력도 좋다. 한 번 당한 전략에는 다시 당하지 않는다. 천재나 신동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재성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샀다. 에서 우승한 뒤 여세를 몰아 6월에 열린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1에서 결승전에 올랐을 때만 하더라도 조용호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느니 마재윤과 조용호가 저그의 양대 산맥을 이룰 것이라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 성적이 떨어지자 찬사와 박수는 비난과 질타로 변했다.

“슬럼프에 빠졌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잠시 방황한 것은 맞지만 슬럼프라고 말할 정도로 컨디션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면서 ‘조용호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 ‘정말 게으르다’, ‘요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 등등 루머가 퍼지는 거에요. 2006시즌 하반기에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조용호에게 2006년은 잔인한 해였다. 프로게이머로 활동한 지 6년만에 찾아온 첫 슬럼프에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개인리그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뒤 두 달만에 PC방 예선으로 떨어져 있었다. 다른 선수들이 우승자 징크스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는 순간 나락에 자리를 펴고 있었다.

심리 치료 효과 톡톡

“연습 스타일을 바꿔보는 등 다각도로 노력을 해봤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잠을 반으로 줄여보기도 했고, 아예 마인드 컨트롤만 한 적도 있어요. 답을 못 찾고 헤매고 있으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던 와중에 팀에서 실시하는 심리 치료에 참가했죠.”

KTF 매직엔스는 올 시즌을 준비하면서 심리 치료를 도입했다. 연세 휴클리닉 노규식 박사를 초청해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심리적으로 강화 훈련을 시키고 있다.

조용호도 심리 치료에 참가해 큰 효과를 본 케이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우황청심원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로 소심했던 조용호는 노 박사와의 상담을 통해 마인드를 바꿔 가졌다.

“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6년을 살아온 것 같아요. 강박 관념이 생기고, 스트레스로 바뀌더라고요. 오죽 심했으면 탈모 증상까지 나타났어요.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사고 방식을 긍정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사님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고, 저도 적극적을 따랐죠.”

고민이 있어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던 조용호는 심리 치료를 받는 동안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변화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노출시켰다. 처음에는 그래도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하지 못했지만 믿음이 생기면서 사적인 이야기까지도 모두 할 수 있게 됐다고.

“연습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길도 박사님이 보여주셨어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정리해 주시더라고요. ‘네 방식대로 해라’가 답이었어요. 개인리그에서 성적이 좋았던 2006년 초에 그렇게 했거든요. 반복 훈련을 많이 하는 것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집중력을 살려 연습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3개월 동안 꾸준히 이 방식으로 연습하고 있고, 요즘 성적도 올라가고 있으니까 자신감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프로페셔널’ 조용호

올 해 조용호가 이루고 싶은 꿈은 ‘프로페셔널’의 개념을 찾는 것이다. 6년 동안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두루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덧 24살이 되고 앞으로 길어야 2~3년밖에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없다는 한계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07시즌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무언가를 제시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임)요환이형이나 (강)도경이형은 특유의 무언가가 있잖아요. 한 번 연습에 들어가면 미친 듯이 달리는 요환이형, 카리스마 넘치는 언변과 행동으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도경이형처럼 조용호만이 갖고 있는 프로페셔널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요. 앞으로 e스포츠를 이끌어갈 후배들이 ‘용호형처럼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

두 시간이 넘는 술자리에서 조용호는 ‘프로’라는 말을 100번도 더 꺼냈다. 자신있게 ‘프로게이머’라고 말하는 조용호. 프로 정신이 있기에 조용호는 아름다웠다.

수범? 우범? 아무튼 술 한 잔 받아

조용호는 다음 주자로 삼성전자 최수범을 선택했다. 한 때 개명한다고 해서 우범으로 해야 하나, 수범으로 해야 하나 논란이 일기도 했던 그 선수다. ‘3 신드롬’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조용호와 최수범은 게이머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게이머를 시작해 서로 공감대도 많다고. 조용호는 “최수범이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서 잊혀진 것 같아 지명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출처 : blog.daum.net/wmfdltpa12/13397523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