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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오로라 - 1

팬질

by @blog 2024. 8. 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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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딩에 달린 두꺼운 모자를 벗는 순간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찬 바람, 그리고 가려졌던 시야가 탁 트이면서 오로라가 보였다. 액정 너머로 봤을 땐 빛의 커튼처럼 우아하게 보였지만 실제 두 눈으로 보니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뱀, 그런 뱀이 쉴 새 없이 허물을 벗으며 죽음을 피하려는 것처럼 처절하게 보이더라고. 하지만 오로라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설산에 오른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야 했다. 제대로 된 국제 공항, 관광지 하나 없는 외딴 나라에 우리들이 온 이유, 장장 1시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산을 오른 목적은 다 그것 때문이니깐. 그래서 나를 포함해 설산에 오른 사람들은 오로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다. 눈보라가 잠잠해지고 귀 끝이 추위에 빨갛게 물들며, 숨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리는 시간까지. 그렇게 오로라가 죽을 때까지.
 



야이 사기꾼 새끼야!
 


  그러나 기억 속에 사는 사람들은 불사신이었고 그 때문에 침묵을 찢는 갈퀴 같은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가이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뿔태 안경이 새하얗게 서릴 정도로 진땀 빼는 가이드. 무안한 표정으로 같이 진땀을 빼는 불쌍한 현지인. 나 역시 어째서 기억이 지워지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워낙 아주머니, 아저씨 한 쌍이 두 눈 빨개지도록 열변을 토하고 있는 바람에 내가 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저 아저씨랑 아줌마, 패키지여행 내내 그렇게 싸우시더니 가이드와 맞서 싸울 때는 천생연분이 따로 없군. 나도 오로라를 보는 내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그의 손가락에 낀 반지, 반지에 반사된 빛까지 기억해 내는 것으로 보아 천상 사랑꾼이 따로 없었다. 분명 무의식 저편으로 내려보냈는데 왜 그 모습 그대로 역류한 건지. 역류된 기억에 온몸이 젖어 오히려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는 것을 넌 아니?

  
 
 
 
하아.
...
후우.

 

 

 

 

 

 

 
  그래 너 말이야 너.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해 입김을 불고 있는 너.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군계일학처럼 다른 사람들과 심리적,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남자. 오로라 색에 맞춰 색깔이 변하는 눈덮인 설원과 달리 절대 변하진 않는 그의 진갈색 피부. 그는 다른 세계 사람인 것처럼 소란의 중심에서 떨어져 오로라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오로라와 그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서 몰래 감상했다. 오로라를 보는 너를 보는 나. 오로라 > 너 > 나.



 
  하지만 이 불공평한 부등호의 관계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난 반드시 이 공식에서 해방될 것이고 내 기억 속의 너를 산산조각 낼 건데 각오는 되어 있니? 하지만 이국적으로 생긴 두툼한 입술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오로라와 입 맞춘 듯 미묘한 색으로 빛났고, 그곳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너의 부분, 결을 느껴보고 싶었던 소망의 장소, 그리고 오로라로 인하여 가장 먼저 사라졌으면 하는 곳이더라.
 
 

 





 
2
 

 


 
 
  무슨 이터널 션샤인도 아니고 오로라 본다고 해서 기억이 지워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당신들은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강아지 구충제를 먹어서라도 희망을 붙잡아 보려는 말기 암환자와 같은 내 심정을 모른다면 함부로 지껄이지 말란 소리다. 오직 혼자서 무언가와 맞서 싸워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자신을 괴롭혀 온 과거의 기억과 만성적으로 싸워 본 사람은 잘 알거라고. 낮과 밤을 가로질러 모든 계절을 관통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제 전문가의 힘 좀 빌리겠다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어떻게 못 하겠네요. 전문가 불러야겠네요. 맞아요. 그래서 전문가를 부르는 겁니다. 꼬인 성격의 그 애와 꼬인 감정성을 풀 수 있다면 미신이라도, 무한으로 가면 0%에 가까워질 미약할 확률이라도 해볼 것입니다.
 




 

 







 
다시 써.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가 꼬인 성격의 소유자이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난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과 성공을 쉽게 할 수 있는 천재라는 단어에 눈이 멀어 내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 컸다. 여름 소나기 때문에 카페 안까지 찝찝했던 그날, 필요 이상으로 높은 습도보다 나를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이상한 고집, 그리고 그 고집을 다 받아줘야 하는 나의 불쌍한 처지. 물론 머리로는 프로 수준으로 프로듀싱하는 그애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알지만 노래를 다 만들었는데, 아니 무명 생활이 더 길어지기 전에 단 한 곳이라도 더 지원서 내야하는데 가사 하나에 목맨다는 게 말이 되냐고. 거기다가 동갑 프로듀서인 그는 수요도 없을 것 같은 사랑 이야기, 사랑에 있어서 의심 많은 남자를 여자가 사랑한다는 가사를 요구했다.
 
 
 

왜. 이번에도 진심이 안 느껴져?
그래.
어디가. 어느 부분이.
전부 다.
너가 말한 내용으로 썼잖아. 여자가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
그 어떤 사람보다 널 사랑해. 내 마음 변치 않을 거야.
...
나를 의심하고 밀어낼지라도 난 언제까지나 널 사랑해. 현실에는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잖아! 도대체 뭐가 또 불만인 건데!
 


 


  순간 커져 버린 내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는 덜떨어진 학과 선배를 상대했을 때처럼 긴 침묵을 유지하여 이 싸움의 우위를 절대 놓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억지로 쓰지 말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쓰라고.
자연스럽게 쓴 거야. 진심을 담아서.
아 그래?
...
그런데 왜 나는 구라까는 것처럼 들리지?
 
 
 

 

  그는 거짓말의 포식자인 것처럼 거짓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서는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딴 짓 하지 말라는 뜻으로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소나기가 내린 후 한결 깨끗해진 햇빛 때문인지 안 그래도 쭉 찢어진 눈매는 흉기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게다가 앞머리까지 소나기에 젖어 뾰족했으니 그야말로 1+1, 실력과 재량으로도 이기지 못하는데 흉기까지 들고 있으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건데. 결국 그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나무 테이블보다 더 진해 보이는 갈색 손, 그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큼지막한 반지, 한국에서 판매할 것 같지 않은 이국적인 디자인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우리 대화도 딱 이러지 않아? 이국적인 대화, 자기 나라 말만 하는 외국인들의 싸움처럼 상대방의 말을 서로 소음 취급하고 있잖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졸업식 때 같이 작업 해보자고 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주지 말 걸 그랬나보다. 괜한 평가를 빌미로 그에게 사랑 노래들을 보내주지 말 걸 그랬나보다. 신입생 환영회 때 다른 애들처럼 그냥 신기한 애로만 볼 걸 그랬나보다. 하긴 신입생 때부터 그는 눈빛 하나로 선배를 이겼을 정도로 보통 기 센 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 잠시 잊고 있었다.
 
 
 
 
 
 
 
 
 





 


 


코쿤캅. 사와디캅.
아니라고! 흑인들 입술이 저런다고. 왓섭 브로 해야 맞지.
아니아니 잘 봐봐. 동남아 쪽 느낌이라니까? 사와디캅!
 

 
 

 



 
  말이 신입생 환영회였지 사실 군기 잡기, 신입생 무시하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불편했던 그 날, 그의 얼굴을 보고 동남아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냐고 낄낄거리며 웃는 선배들. 그리고 침묵이라는 세련된 방법으로 되돌려 주었던 그. 덕분에 신입생 환영회의 분위기는 씹창 나버렸지만 그의 세련된 대처 방식에 난 좋은 노래를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어두운 술집 무드등에 간신히 보이던 그의 얼굴은 정말 선배의 말대로 두꺼운 입술과 새까만 피부, 그리고 유난히 짧은 턱 때문에 이국적으로 생겼지만 내가 보기에는 닭장같이 똑같은 아파트 사이의 미려한 곡선을 유지하며 지어진 예술적인 건축물처럼 세련되게 보였다. 덕분에 그는 어려움 없이, 그리고 아주 쉽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애는 얼굴값대로 자기 나라 언어를 쓰지 않으면 쉽사리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외국인 것처럼 다른 사람과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니깐 대놓고 그랬다는 건 아니야. 겉으로는 잘 지내. 그것도 아주 잘. 다만 마음을 열법할 시간이 왔음에도, 그리고 그런 장소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너무 잘 유지해서 상대방이 거리감을 적지 않게 느낀다는 것이다. 본능이 나올 법할 2차 술자리에서 취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말 한마디 잘 못 하면 차갑게 등 돌리는 과감함. 투비컨티뉴가 없는 사람, 단 한 번이면 끝이라고. 하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 혼자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는지 무리에 대한 미련이 없이 잘만 행동했고, 수업 시간에 만든 노래 역시 멸종 되어버린 소수민족의 민요처럼 귀에 쏙 들어오는 이색적인 멜로디만 잘 잡아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좋아. 아주 좋아. 미인은 떼 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내 신조에 넌 너무도 잘 맞는 사람이야. 내가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넌 천재가 분명해. 물론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주관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직감이, 그러니깐 내 친구 서울대, 하버드, 카이스트 대학원생이라고 떠들어 대는 소음이 만들어 낸 가짜 천재들에 대한 찬양에 질식해 있던 내 직관이 속삭이더라. 저 터질 것 같은 입술을 가진 남자가 진짜니깐 당장 잡으라고.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아우라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로 나 한 걸음,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긴장시키게 반드는 그에게 노래를 바치며 다시 한번 한걸음. 늦은 새벽, 부담없이 평가해달라고 보냈던 그 노래는 정확히 어떤 가사에 멜로디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좀 야했던 거 같은데. 아닌가?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바닥을 닦는 현대판 성경 느낌이던데. 맞나? 비 때문인지 눈 때문인지 온몸이 젖어있는 남자. 그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 입술로 물기를 닦아 온기를 전해주는 여자의 용기 있는 음감. 구름 위로 누운 것처럼 흰 침대 위로 누워 그 기분을 만끽하는 남자. 금방이라도 만개할 것처럼 부푼 그 남자의 입술 끝으로 나오는 신비로운 가사.
 


  돌이켜보니 그건 사랑 노래보다는 찬가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남들에게는 어렵고 차가운 사람일지라도 나한테만큼은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에 가까운 노래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는 동기를 위한 허례 의식이 담긴 평가 뿐이니, 그것은 날 기운 빠지게 만든 것 같은데. 사랑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기분이던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느낌으로 쓰라고?
그래.
넌 내가 그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쓴 줄 알고 그래?
몰라.
...
그냥 그때 쓴 가사가 괜찮아서 너랑 같이 해보자고 한 거야.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도 예전 폼이 안 돌아와서 문제지.
미안한데 그런 가사 이제 다시는 쓸 수 없어.
왜.
그야... 못하니깐.
너 회사에 들어가서 프로듀서가 가사 쓰라고 해도 못 한다고 할 거야?
그거랑 그거하고는 달라.
뭐가 다른데. 너가 썼잖아. 너가 한 거 아니야?
내가 한 거 맞아. 하지만 이제는 못 한다고.
지금 나랑 장난해?
 
 
 
 
 
  이번에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그애였고 또다시 카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지만 우린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경기가 우선인 거다. 만약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 뭉게질테니깐. 하지만 그는 타국땅에 수십 년을 머물러 있어도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지 않으면 절대 마음도, 사랑도 주지 않은 향수병 걸린 이국 사람처럼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커피 한잔을 마셔도 음악 이야기 외에는 사적인 이야기에는 입을 꾹 닫아 버리는 그의 행동에 빈틈 없음을 느낀 이유는 모두 그것 때문인 건가? 분명 같이 졸업했고 같이 노력했으며, 같은 무명 생활을 보내왔기에 같은 나라 사람으로 대우해 줄거라 생각했지만 그에게 있어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 나 혼자만 느꼈던 친근함이 독이 되어버리면서 힘이 쭉 빠졌다.

 
 
 
그래... 알았어.
...
알았다고. 우리 프로듀서님 말에 무조건 따라야지.
...
니가 원하는 대로 실컷 써줄게. 됐지? 그러면 만족하지?
...
정말 이렇게 빡세게 프로듀싱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아주 대형기획사 수준이네. 거의 빌보드 수준이야.
 


 
  그의 젖은 앞머리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우리 둘의 대화는 끝났고 난 노트를 가방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카페를 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가벼운 위로나 열심히 하라는 말 대신, 최대한 빨리 써라, 라는 말로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의 테두리를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거 아니? 너 완전히 실수한 거야. 왜냐면 여자는 본능적으로 나르시시스트고 남자는 왕자병이기 때문에 너가 원하는 가사에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거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깐. 그건 남녀의 오랜 본능이자 나 역시 직접 경험해 본 완전한 규칙이거든.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 너의 무능한 프로듀싱 능력만 뽀록날텐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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