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남준 팬픽] 오로라 - 2

팬질

by @blog 2024. 8. 8. 00:04

본문

 
 
 
 
 
 
 
 
3
 

 


 
  많은 산이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깎이고 다져지고, 잘려 나가는 치욕을 겪었지만 아직까지도 정복되지 않은 산, 야생성을 지키는 설산 하나가 있다고 하자. 그 산은 사람에 대한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365일 눈보라가 불어닥쳤고 길은 어찌나 험준한지 산 중간부터 얼어 죽은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치자. 그러한 산을 이겨 먹겠다고 오르는 사람을 우린 어떻게 봐야 할까. 허락과 정복의 차이를 모르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에베레스트산을 수차례 등반했던 등산가들도 산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산을 정복하려고 하는 자, 바람에 찢겨져 나갈 것이고, 산의 외면을 받은 자, 잘못된 길로 돌아가 영영 해매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에베레스트산과 달리 그 설산은 모두에게 냉정했고 심지어 바람에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표면화된 지옥이 따로 없었으니, 결국에는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관심 받고 싶은 사람, 스스로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만이 그 산으로 향할 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때 눈보라가 녹아내려 만들어진 호수에 사는 부족, 그 부족에서 자란 소녀가 산을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왜냐면 자신 있었거든. 부족의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눈보라에 강한 털옷과 산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거든. 자신의 뜨거운 마음으로 눈보라를 녹여 보이겠다는 생각에 서리를 밟고, 눈을 밟으며, 눈 속에 썩지도 않은 시체를 밟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산 입구부터 시작된 산의 시련, 난 소녀가 눈보라로 인하여 다른 시체들처럼 비명 지르는 표정을 하고 얼어 죽는 줄 알았다.

 

  그래. 위험하다고. 시작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한 산,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야 하는 산이니깐 그냥 버리라고. 그러나 눈보라가 만들어 준 호숫물을 마시고 자라서 그런 지 제법 잘 버텼고, 그 와중에 간악한 산은 소녀가 평지에 있을 때보다 절벽을 타고 오를 때 더욱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산을 사랑했던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자, 학식이 높은 지혜로운 남자, 인생에 대하여 통달한 척하는 사람보다 집요하고 이기적이었으니, 그래서 끊기기 직전의 밧줄을 버리고 절벽에 매달린 나무줄기를 타고 꾸역꾸역 오를 만큼의 지독함이 있었다.
 
 

 

 
 
 

 



하아... 하아...
 


 
  그렇게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얼음 절벽을 그 누구보다 먼저 올라가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니깐 갑자기 많이 좋아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눈보라가 덜 불고 눈이 적게 쌓여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는 풍경이 소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의 연속. 자신의 마음을 단 한 톨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산의 집요함으로 탄생 된 겨울보다 더욱 추운 계절. 만약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딛는다면 죽여버리겠다는 산의 의지. 절벽을 오르느라 손톱이 다 깨지고, 가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져서 맛없고 떫은 열매들만 따 먹으며 버텨 온 그녀의 집요함도 산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였다.


 
  물론 미약하게 보이는 오로라가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 아니겠는가. 이제 지겨운 거다. 진심 밝히기 놀이 같은 거. 무덤덤한 반응에도 힘이 빠진 거야. 결국 그녀는 뜨거운 마음이고 뭐고 뒤돌아서서 자신이 살았던 마을로 돌아갔다고 한다.
 
 




 
 



 
 
 
 
 
 
 

 





재 뭐냐?
 

 


 
  이제 그 저주받은 산으로 내려와 따뜻하고 온화해 보이는 산을 오르고 있는데 감정 하나 보여주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내게 마음을 보여주었다. 화난 거니? 그것이 정확히는 분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붉은 눈을 부릅뜨며 우리 둘을 죽일듯이 노려봤다. 도서관 창가의 빛이 가장 풍부하게 내리는 곳에 서서, 그를 중심으로 부드럽게 갈려져 나가는 빛이 날개처럼 보이는 현상과 함께.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마음 아니겠는가. 이제 지겨운 거다진심 밝히기 놀이 같은 거콧대만 높았지 눈치는 낮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난 꽃동산과 계속해서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 주제가 바뀔 시점, 그가 서 있었던 빛이 풍부하게 내리던 곳을 다시 봤을 땐 이미 떠나고 없더라고. 너가 가진 나의 마음이 딱 그 정도라는 거야. 몇 분짜리 미움, 몇 분짜리 노려보기. 그리고 몇 분 후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우리 사이.
 
 
 
 
 
 
 
4
 
 


 
아씨 진짜



 
 
  동물 가죽을 엮어서 만든 전통 방식의 텐트 안에는 얼음 절벽 위보다 더욱 살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난 재빨리 도망쳤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설산에 내려오고 난 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뽀뽀하고 장난치고 하더니 결국 같은 텐트를 쓰는 내게 말하지 않고 아저씨를 불러와서는, 씨발.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뜨겁고 끈적이는 애정행각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고 대신 아저씨가 있었던 텐트, 공기도 같이 섞어 마시고 싶지 않은 그애가 있는 가죽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추운 입김이 나오는 밖과 달리 따뜻함이 감도는 텐트 안. 지그재그 패턴 문양의 천으로 덮인 의자. 사슴뿔인지 순록뿔인지 모를 것들이 매달려 있는 천장. 그리고 슬퍼 보이는 긴 목을 가진 남자.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난 방언 터지듯이 이번 여행에 불만, 짜증, 사적인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태양 폭풍에서 오는 감마선은 기억 상실의 효과를 주지만 이 지역 산들의 자력으로 인해 부작용만 없애줄 뿐 단기 기억 상실증 효과를 준다?
...
어디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을 너 정말 믿고 있었던 거야?
...
그런데 거기에 속은 나도 진짜 멍청하다 멍청해.
 


 



 
 

 
 
 


  그는 무리한 등산으로 인하여 내 말에 대꾸할 힘이 없었는지, 아니면 기억을 지워준다는 오로라를 보지 못하여 실망한 건지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화롯불만 보고 있었다. 녹아내린 눈 때문에 촉촉해진 앞머리. 전보다 훨씬 더 말라서 윤곽이 선명해진 얼굴. 스모키 화장을 한 것처럼 눈가의 그을린 자국도 여전했고 추위를 겪다가 다시 찾아온 따뜻함이 좋아서 윤기가 흐르는 그의 입술. 그리고 두툼한 입술의 소유자답게 과연 입도 무거웠는지 패키지 여행 내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화딱지가 난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건너편,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마주 보며 앉았다.
 
 


 
 
잘 지냈어? 요즘 어떻게 지내?

...

나는 요즘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었어. 미안.

...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연락하기 싫어서 안 했어.

...

그런데 너가 먼저 뜬금없이 뜬금없이 패키지여행 상품 딸랑 보내더라. 여행사에 취직했니?

...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도 노래 만드니? 그곳에 계속 다니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주 열심히 잘?
 

 
 
  난사되는 내 질문에 그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고 화롯불의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엮어진 동물 가죽 안은 아주 조용했다. 오죽하면 옆 텐트 아줌마 아저씨의 격한 사랑 소리가 더 컸으니, 어떤 남녀는 좋다고 서로 얼싸안는데 왜 우린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일까. 아니면 나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불만 많은 내 시선의 끝에는 그가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 안에는 나도 없었고, 다른 사람도 없었고, 오직 불만 있었다.
 
 



 
 
 


 
 
 
 
 
 

 
 


 
  너가 너의 안부를 말하기 싫으면 내가 먼저 나의 안부를 전해줄게. 좋지만은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나에게 맞는 시간이 아님을 절실히 느껴. 너와 내가 노력했던 시간은 공백 기간으로 취급되어 면접관의 혀 차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노래를 사랑했던 내 과거는 허세 떠는 철없는 짓으로 취급받더라. 내 감정을 부정하고 축소하는 것이 이 곳에서는 미덕인 거야. 자기 자신을 부정할수록 회사 사람들은 좋아해.
 


  내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날 기운 빠지게 만드는 새벽, 꿈에 대한 미련이 커지고 예전에 썼던 노래를 들출 수밖에 없었던 후회의 시간, 요즘 노래 트랜드는 어떠한지, 지망생들은 아직도 힘든 건지, 나처럼 포기하는 애들은 많은지, 잘난 사람은 여전히 잘났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던 그때, 검색 결과가 나오고 노래가 나오면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박혀 있는 노래를 재생, 와. 질리도록 익숙한 멜로디인데 처음 듣는 것처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왜냐면 함께 만든 노래를 들고 같은 회사에서 면접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면접관은 우리 둘을 자꾸 나누려고 했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대상은 그였으니깐.  현대예술처럼 미려하고 세련된 멜로디와 부자연스럽고 감정 이입할 수 없는 가사 사이의 승자는 뻔했으니깐. 아니, 돌이켜보면 가사가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가사 중에 성공한 가사도 많으니깐. 다만 그의 멜로디 라인과 나의 가사는 물과 불처럼 서로를 돕기보다는 방해되는 관계였고 면접관 역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것처럼 우리 둘을 하나의 팀이 아닌 상반된 객체로 보았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는 이번에도 내가 아니었다.


   봤지? 너의 프로듀싱은 완전히 실패했고 우리가 탄 배는 선장인 너 빼고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어. 그래서 난 단칼에 인연을 자르는 그보다 한발자국 더 빠르게 자름으로써 처음으로 그에게 복수를, 그리고 승리를 했다. 하지만 남는 거 하나 없는 승리, 해봤자 뭐하는데.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되돌릴 수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영원히 그의 노래의 일부가 될 줄 알았지만 난 언제든지 벗길 수 있었던 허물이었고 그렇게 나를 두고 유유히 지나가는 뱀처럼, 그리고 유려한 음악처럼 세상 잘만 돌아갔다. 


  그 와중에 새벽 이 시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의 노래. 실패한 음악가의 방안을 부드럽게 잠식시켜주는 파동. 유치한 사랑 노래 가사가 아닌 경계심과 반가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국 소년의 이야기는 전통 방식의 텐트 안에서 몸을 섞는 남녀처럼 멜로디와 너무 잘 어울렸고. 천재성을 풍기는 저 노래의 일부가 되지 못한 나는 너무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많이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시작할 거야.
...
여자가 남자를 많이 사랑한다는 가사 같은 거 이제 단 한 줄도 쓰지 않을 거야.
...
아름답게 표현하지도 않을거고 있는 그대로 써야지. 아주 지 생각밖에 안 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써야지.
...
이거 좋을 거 같은데 어때? 같이 노래 부르는 동료에겐 개같은 파트만 주고 자기는 클라이막스만 부르는 가수 이야기.
입 다물어!
 


 

 
   미안함이라는 자물쇠에 잠겨 절대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입이 열렸고 동시에 아줌마 아저씨들의 소리는 누가 들어도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격해졌다. 하지만 내 심장을 화롯불처럼 분주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소리가 아닌 언제 들어도 날 긴장하게 만드는 너의 목소리.
 
 


 
너는 왜 자꾸 나를 어떠한 감정도 없는 사람 취급하니?
...
대학교 때도 그랬어. 일방적으로 시작했으니깐 일방적으로 끝내도 된다고 지 멋대로 생각하고.
...
내가 너한테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한 이유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
새벽마다 내가 무슨 생각에 잠식되어 있는지 알기냐 하냐고. 왜 니 멋대로 날 정의 내리는 건데?
 



 
  화롯불에 맞춰 일렁이는 우리 둘의 그림자.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사이 좋은 남녀의 소리. 그리고 병신같은 변명의 연속. 분명 같은 나라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알아먹는 말만 하는 그. 그는 자기가 한 말에 혼자 감정이 벅차오른듯 눈시울을 붉혔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감정을 눈보라 속으로 숨겨버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거대한 바람의 실체를 내 두 눈으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감상평은 이거야. 꼴값 떨고 있네.

 
 
 
 
저기요? 안에 계세요?
 



 
  그때 텐트 밖으로 가이드의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것은 들뜬 가이드의 표정, 그리고 밤하늘의 거대한 오로라. 아까 설산에서 봤던 오로라가 실뱀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오로라는 용, 아니 모든 오로라의 어머니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로 큰 것이 밤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오로라는 산통을 겪고 있었는지 아까보다 더욱더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며 색을 계속해서 바꾸었으니, 그야말로 보기만해도 기억이 빨려 나가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바보가 된 것처럼 입을 벌리게 되었다. 이렇게 오로라의 끝자락에 있는 산 아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빠져 나가는 느낌인데 오로라의 중심부에서 보면 얼마나 기억을 빼앗길 수 있을까. 내 마음 속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가이드가 자기 말이 진짜라고, 설산에 올라가면 기억이 지워지는 게 확실하다며 모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