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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오로라 - 3

팬질

by @blog 2024. 8. 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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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상상이지 않을까? 지금 부모는 가짜 부모고 나의 진짜 부모는 어딘가 있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래. 신입생 시절 내 손가락을 꼬물거리게 만들던 남자가 없었다면, 가사를 쓸 때마다 지적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 미래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텐데. 어쩌면 한 소절 한 소절마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고 몇천 년 동안 사람들 입에 머무는 민요 같은 멜로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녀 한쌍이 끈적하게 뒤엉킨 것처럼 궁합 좋은 노래와 가사를 쓸 수 있다고. 내 인생이 통째로 바뀔지도 모르는 재능이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그것을 절실히 확인하고 싶은 나는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폐 안 쪽까지 동상에 걸릴 각오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설산 위를 올랐다.
 

 
안 되겠어요! 너무 위험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억을 지워주는 오로라를 진짜 볼 수 있다고, 자기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들뜬 가이드조차 눈보라가 너무 강하니 돌아가야 한다고 소리쳤고 난 가이드에게 조금만 가면 도착하지 않냐고 대꾸했을 뿐 뒤로 물러서지 않았더. 가이드는 그런 거 됐고 당장 돌아오라는 뜻으로 손짓했고 나처럼 오로라를 보고 싶어서 뒤따라 온 그 역시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내게 엉망인 결과만 주는 그가 소리쳤다.




나는 괜찮으니깐 좀 더 나아가 볼래.
돌아와. 가이드도 오라했잖아.
안돼! 나는 꼭 봐야한다고!
위험하다고!
안 위험하다고!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입 다물어!
...
이건 내 선택이야!
...
그러니 내게 더 이상 어떠한 통제력도 가하지 마!
 






 

 
 

 
   
  지금 나랑 장난 하냐는 협박, 조금만 참으면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회유, 진심을 담으면 반드시 통한다는 조언, 그리고 좋아요로 나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내가 너를 좋아했을 때나 통하던 수법이지 이젠 쥐뿔도 없다는 걸 넌 좀 알아야 해. 그래서 난 내 눈동자 위로 서리가 내리는 한이 있어도 오로라를 보기 위하여 산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독립이 필요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눈보라가 그친 날 다시 올라가면 되잖아! 왜 위험한 행동을 하는 건데?
그래? 그러면 오로라가 다시 나타난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분명 기회가 오겠지.
아니! 절대 없어. 이번에 놓치면 영영 끝이야.
아니야...
왜 그러냐? 너 한번 끝내면 영원히 끝내기로 유명한 애잖아.
...
너 칼 같은 놈이잖아. 냉정한 애잖아. 그런데 왜 이상한 희망
 
 
 
 


  그 순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불어 닥친 산의 시련, 아까보다 몇 배는 강한 바람이 왼쪽, 오른쪽, 나의 모든 면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패딩까지 찢어버릴 것 같은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움직임의 주인이 내가 아닌 눈보라여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바위처럼 쥐 죽은 듯이 웅크려보려 했지만, 10시간 동안 좁은 책상 앞에서 꼼짝 못하던 회사 때처럼 가만 있어보려고 했지만 바람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꾸 날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보냈다. 결국 필사의 힘으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눈보라는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들 모두 눈으로 덮어버리면서 날 절망적이게 만들었다.
 
 
  그때 검정 오로라, 아니 검정색 패딩을 입은 남자가 내게 돌진하여 눈보라로부터 감싸 안아주었으니,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엄마처럼 내 머리카락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어 지켜 주었다. 보지 않아도 그 손의 주인을 난 알 수 있어. 손가락 표면에 흐르는 진갈색의 빛과 반지의 빛깔까지 아는 나인데. 다만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그의 손이 이렇게 용감했었는지, 양수가 마르기도 전에 엄마에게 소중히 어루만져지는 갓 태어난 아기의 손처럼 이렇게 많은 사랑이 담겨있었는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내가 주고도 잊고 있었던 사랑을 넌 아직도 쥐고 있었던 거니. 그래서 난 따뜻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남자를 있는 힘껏, 사랑하고 싶은 만큼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이제야 너에게 바쳤던 내 노래가 왜 찬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넌 사람이 아니거든. 거대한 산맥은 등허리가 되고, 가장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는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떫은맛 과일이 열린 나무와 절벽에 매달린 나무 줄기는 머리카락으로, 변덕 심한 눈보라는 모순적인 성격으로, 그렇게 소녀를 끝으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설산이 남자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게 바로 너겠지. 그렇게 녹은 눈 때문에 온몸이 젖은 남자는 눈 속에 숨겼던 본심을 가지고 소녀가 사는 마을로 내려왔지만 수 백년, 혹은 수 천년이 지났는지 마을은 이미 사라지고 집터의 흔적, 동물 가죽으로 조잡하게 지어진 텐트촌만이 그곳에 자리 잡았겠지. 남자가 참담한 표정으로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자 부족 아이들이 부르는 돌림노래가 그를 위로해 주었으니, 산이었던 남자를 자신의 입술로 닦아주세요.
 
 
 
 
하아...하아...
...
하아... 하아...
 
 



  내가 그의 품을 떠나 고개를 들었을 땐 고요의 중심에 선 것처럼 눈보라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설산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남자의 거친 숨소리, 날 대신해서 눈보라를 온몸으로 받아내어 앞머리부터 속눈썹까지 젖은 남자, 오로라 빛 역시 온몸으로 받아내어 빛나는 그가 있었다. 민트색, 핑크색, 코발트색, 크림슨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통솔하는 그는 무드등 아래서 반했을 때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크림슨 색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입술 감촉을 나 언제나 갈구하고 있으니, 역시 사랑에 빠지려면 멋진 조명과 미안함이 필요해. 그치? 기억이 지워져도 또다시 입술 타령, 사랑 타령, 아기 때는 옹알이하듯 말하다가 죽기 직전에는 유언으로 남길 만큼 질리도록 말할 것 같은데. 그런 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렇게 집요한 나를.
 
 



 
오로라.
...
그 오로라야.
 
 


 
  감정이 벅차올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 모습이 코발트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 안으로 자리 잡았을 때 밤하늘 위로 새하얀 오로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오로라는 그의 입술색과 닮은 크림슨 색을 찢고, 코발트색, 민트색 오로라의 배를 비집고 태어난 집요한 오로라였으니, 그의 눈동자 안에서 반사되는 빛만 보고도 온몸이 굳어져 버려 쓰러질 정도였다. 이게 가이드가 주구장창 말하던 감마선의 위력인가? 감마선, 우주 주파수 타령할 때 비웃지 말걸.
 
 



 
- 쿵






  내가 눈 위로 눕자 뒤이어 누군가도 눈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니, 우리 지금 나란히 같은 오로라를 보고 있는 거 맞는 거지? 한 번 더 말하지만 눈 속에 파묻혀서 느끼는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움직임의 주인이 처음부터 오로라였던 것처럼 어떻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제 여자가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가사 쓸 수 있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억을 지워주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하얀색 오로라가 만개하면 만개할수록 눈하나 깜박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귓가에서 들리는 박자감 가진 북소리, 내 심장 소리인가? 푸른 하늘 아래서 이국의 아이들과 소녀가 부르는 멜로디, 혹시 바람 소리인가? 들판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연주는 과연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노래가 점점 커지고 노래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본격적인 의식이 시작됐다.
 







 




 
  - 둥둥둥둥




  너 혹시 어린 시절에 매미 본 적 있어? 크기만 더럽게 크고 시끄럽기는 엄청 시끄러운 매미 말이야. 여름이 끝날 때쯤 되면 매미들의 사체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대부분은 차에 밟히거나 개미 떼들한테 둘러싸여 뜯겨 먹히곤 하지. 그 커다란 날개를 한 짝 뚝 때서, 짝을 찾기 위해 울부짖던 목청을 툭 뜯어가는 개미. 방금 오로라가 삼킨 너의 목에서 나 듣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듣고 싶은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정말 많았는데.
 


찾았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저 개미들은 매미를 먹고 쑥쑥자랄테고 누군가가 개미를 먹고 커질 것이며, 또 그 누군가가 누군가의 밥이 되겠지. 내 기억 속의 너를 먹은 오로라는 과연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려나, 정령이나 바람, 직관의 속삭임도 괜찮은데 말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을 외국인처럼 낯설게 대하는 그에게, 이젠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그에게 그의 나라 언어로 말해주세요. 니가 너무 보고 싶어.
 
 
 



 
찾았다고! 두 명 다 있다고!
 


 
 
 
  그렇게 내 기억을 가져간 오로라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린 나는 가이드의 뜀박질 소리, 갈수록 희미해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그래. 실컷 자 두어야지. 그리고 눈을 뜰 때면 나 사랑 노래만 쓸 거야. 너가 사랑하는 노래가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일 수 있도록. 산이었던 남자의 이름을 노래로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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