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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새해 소원 - 1

팬질

by @blog 2024. 1. 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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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같았으면 창문에 그린 손자국 하나에도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잘 지어냈을 텐데. 투명한 유리와 상반되는 뿌연 손자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행길과 같아서 안에서 보는 사람과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 모두 괴롭다, 뭐 그런 식으로 말이지. 그럴듯한 이야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 거, 그 누구보다 자신 있던 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기 하나 못 쓰는 문맹이 되어버렸고 결국 반강제적인 휴학과 절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서 글 병신이 됐다는 소리지.
 
  하루아침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고요? 글 쓰는 거 말고는 특별한 것 없는 사람이 그마저도 잃게 될 수 있냐고요? 어렵지 않아요. 글 못 쓰던 사람을 잘 쓰게 만드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끄적이던 사람을 한 글자도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쉬워요. 사랑을 해보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글을 써보시고요.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마음을 작은 글귀에 꾸억꾸억 집어넣으려고 욕심내는 순간 단어부터 문장까지 삐걱삐걱, 그리고 쿵.
 
  금을 쓰레기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초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기에 혼자 애도하고 혼자 포기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해 소원을 끝내주게 잘 들어준다는 미룡사에 가보기로 하며 혼자 새벽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곳에서 매우 낯익은 사람을 마주친 거 있지.
 
 






 
오. 동기!
...
맞지? 새해 소원 빌러.
 
 
 

  좋네. 새해부터 아주 복 터졌네.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작가 지망생을 병신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고 그의 등장에 절필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때려치라는 거지.
 

 
 
미룡사 가는 거 맞지?
그렇지. 거기 말고 그 지역에 볼 거 없잖아.
같이 가자. 옆자리에 앉아도 되지?
 
 

 

 
  안 그래도 키가 큰데 두툼한 검정 패딩까지 입은 그가 내 옆에 앉았고 순간 좌석은 빈틈없이 꽉 차면서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바로 숨을 쉬고 싶진 않아. 왜냐면 그가 급하게 달려왔는지 계속해서 날숨을 내쉬었고 그 뜨거운 공기를 마시는 순간 그가 내 안에 들어오는 거니깐. 난 그의 주변을 돌면서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인공위성처럼, 아니다. 인공위성이 뭐야. 이름도 붙여지지 않고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먼지처럼 혼자 의식하고, 혼자 훔쳐보고, 혼자 좋아하면서 그에게 파생된 모든 것을 피하려고 했다.
 
 
 

마침 혼자 가느라 심심할 것 같았는데 잘됐네.
그러네.
여주 넌 무슨 소원 빌려고 가는 거야?
나? 거기 가서 생각해 보려고. 
 
 

  이야기 지어내기 고수답게 난 얼굴 낯빛 하나 안 바꾸며 거짓말 쳤고 반면에 그는 진실의 보조개를 보여주면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있잖아. 이번 연도에는 뭔가 차분한 사람으로 변하고 싶어. 작년에 너무 기복이 심했거든.
그랬던가?
응. 유독 심했어. 다른 사람에게 이유 없이 짜증 내고 징징거리고. 그래서 소원도 빌고 108배도 해서 제대로 정신 좀 차리려고.
108배? 그 108번 절하는 거 말하는 거야?
맞아. 작년에 사고 친 것도 반성하는 겸 그 정도 고생해야지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듣기만 해도 무서운 108배라는 단어에 난 겁에 질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잘할 수 있다니깐. 보조개까지 보여주며 말했지만 그 보조개가 100세 노인의 주름처럼 보일 정도로 고행마저 즐기는 그의 성숙함에 나는 내심 놀랐다. 성격뿐만 아니라 정신연령에 있어서도 그는 변덕성 있는 남자였고 특히 재미있는 건 성별, 그는 성별에 있어서도 꽤나 변덕스러웠다. 버스 좌석을 꽉 채울 만큼 큰 체격의 남자지만 여자보다 짧은 턱과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깎여진 눈썹, 하나같이 여성성이 강한 이목구비로 얼굴이 이루어져 있었고, 진짜 예쁘더라. 손가락 기다란 거. 아름답더라. 속눈썹도 길쭉한 거. 아이와 노인과 여자와 남자를 모두 가진 그였기에 미소 하나를 지어도 네 명이 동시에 미소 지으면서 내게 유혹하는 느낌이었고 더이상은... 위험할 정도였다.
 
 
 
 
 

나... 잘래.
갑자기?
...
너 아침에 급하게 나왔구나?
....
그렇게 비리비리해서 미룡사가면 어쩌려고. 거기 사람 장난 아니게 많은데.
...
인터넷에 소문타서 작년보다 훨씬 더 많데. 깔려 죽을지도 모를 걸?
...
미안. 말 계속 걸어서. 어서 자.
 
 
 
 
 
  아니야. 난 전혀 졸리지 않아. 겨우 미소 하나에 천년의 다짐이 모두 박살날까봐 졸린 척 눈감고 내빼는 거야.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 그의 잔상에 가슴이 쿵. 이미 강진을 만나 산산조각 나버린 내 이성은 여진으로 인해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뼛속 깊숙이 후회해. 있어 보이는 척, 그럴싸하게 보이는 척하는 내 글이 한 겹이라면 그는 수천 겹의 사람이었기에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함부로 연구하지도 말고 정의 내리지도 말며 사랑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난 미룡사에 도착하자마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서 그를 몰랐던 때로 다시 되돌려 달라고 할 거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렸던 유일한 잔재주 역시 돌려달라고 할 거고 다시는 그를 위해 글 쓰지 않겠다고 나 맹세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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