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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새해 소원 - 2

팬질

by @blog 2024. 1. 1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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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나는 초심을 되찾아야만 해. 우린 서로 몰랐던 사이잖아. 같은 학과, 같은 동기,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 글로 뭔가를 증명받고 싶다는 욕심 외에는 비슷한 면이 하나도 없었잖아. 그래서 그가 오랜 기간 휴학한 끝에 복학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빈 강의실 책상 위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몰랐다. 좀 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에 더 가깝지만 말이지. 그래서 빈 강의실에서 그가 있음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나가려는 그때

 

 

안녕?

 

 

  아무도 없는 강의실은 마치 성당과도 같아서 그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잔잔히 울려 퍼졌다. 성당에서는 광휘가 내려오는 곳에 성자의 조각상이 있다면 강의실의 광휘가 내리는 곳에서는 그가 아픈 것처럼 누워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여주 너 진짜 오랜만에 본다.

너 나 알아?

완전 섭섭한데? 너 나랑 같은 동기잖아.

아...

아니면 너도 내가 재수없다고 해서 모른척 하는 거야?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보는 모습에 괜히 무안해지며 미안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그는 흐릿한 사람이자 같이 밥먹은 기억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없는 동기, 말 그대로 동기일 뿐이었다. 그래도 예의상 나를 알아봐 준 그를 위해 근황을 물어보았으니, 요즘 어떻게 지내? 너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혹시 머리 잘랐어? 아 원래 그 머리였다고? 미안...

 

 

그런데 왜 휴학했던 거야?

그냥... 좀 힘들어서.

힘들어? 아파?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글도 안 써지고. 인간관계도 힘들고.

그랬구나. 힘내야지.

 

 

  어느 정도 형식적인 대화를 적당히 나누었기에 그만 강의실을 나가려는 그때, 그는 유일하게 아는 동기를 만나서인지, 아니면 그 누구에게라도 말을 털어놓지 않으면 버틸 수 없어서인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들쑥날쑥 거리는 성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뭐?

쉽게 우울해하고 쉽게 기분 좋아지고 쉽게 토라지는 성격 같은 거.

글쎄.

안 좋지? 완전 미움받을 만한 성격이지?

예술가로서는... 좋은 성격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그런 성격이 전혀 좋지 않다는 뜻으로 책상 위로 머리를 올린 채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나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깊이도 깊어지는 것 같아.

...

글쓰기에 좋은 성격이라고 합리화하기 힘들 정도로.

...

스트레스의 영역까지 다다르지 않았나 싶네.

 

 

 

 

 

  내가 편한 걸까. 내가 만만한 걸까. 아니면 대화 상대가 없어서 그런 걸까.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하지 않을 은밀한 고민을 내게 털어놓았다. 고민을 말할 사람이 없으니 인터넷 속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사연을 털어놓는 아이, 처음 보는 스님에게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하는 아주 외로운 젊은이. 택시 기사 아저씨가 듣든 말든 저물어 가는 자신의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처럼.

 

 

...

...

...

...

 

 

  뭐해. 너 거짓말의 귀재잖아. 그럴듯한 말을 해서 빨리 이 어색한 분위기를 끝내버리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그냥 그를 보내버려. 저물어 가는 해처럼 저물어 갈 것 같은 그의 눈에 물이라도 나오기 전에,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의 진실에 거짓말로 대응하라고!

 

 

야.

...

넌 천재야. 동기들 사이에서 너가 제일 글 잘 쓴다고 소문났어.

...

나도 니 글 보고 질투심 느꼈다니깐. 그런 너가 힘들다면 나는 어쩌냐.

...

나는 뭐 자살해야 해? 하여튼 천재들은 존나 재수 없어.

 

 

 

 

 

  마음에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자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건강에도 안 좋은 사탕 같은 말을 던지고 봤다. 거짓말이 티났나?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걸 알아챘을까? 그는 피식 웃고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터라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지만 변덕 심한 성격답게 죽을 것 같았던 표정이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더라고.

 

 

정말 고마워.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

그래? 다행이네.

동기 좋다는 게 이런 건가 봐.

야. 너 모자.

 

 

  그때 나는 신의 축복을 모두 받는 것처럼 해질녘 주황빛을 모두 받고 있는 모자를 가리켰고 그는 그것을 집더니 내게 씌어주었다. 과연 변덕 심한 성격답게 예측 불가능한 괴악한 행동을 한 것이다.

 

 

어때? 보기보다 완전 따뜻해.

...

좋지? 이거 쓰면 군밤 장수처럼 변하지만 말이지.

 

 

  모자 속에 숨겨진 그의 체온과 냄새가 동시에 밀려 들어오는 순간, 아! 그 애였구나! 그제야 난 그의 이름, 그의 첫인상, 그가 썼던 시와 문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 시 창작 수업 때 모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긴장감 묻어나온 시를 선보였고 그중에서 가장 늙어 보이는 글, 캐치티니핑처럼 똘망똘망한 눈빛을 가진 애가 고승의 사리 구슬같이 짙은 연륜이 묻어나온 글을 선보였었지. 그 순간 강의실에 침묵이 흘렀으니, 그건 백이면 백 그의 실력에 기가 죽었거나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였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이유 모를 미움의 대상이자 비난의 표적이자 거만함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왜냐면 아이처럼 높고 낮은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그와 동시에 노인처럼 넓은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우린 천재라고 부르고 다들 천재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미워하잖아.

  미워할 수밖에 없잖아. 모든 지 다 잘하는 천재를 말이야. 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천재라는 나의 거짓말조차 진실로 만드는 진짜 천재를 말이지. 성당처럼 고요한 빈 강의실에서 빛을 한 몸에 받으며 웃는 그에게 기묘한 감정을 느꼈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모자를 씌어주는 느낌은 신에게서 축복받는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었던가.

 

 

 

*

 

 

 

 

 

자?

...

아니면 눈만 감고 있어?

...

만약 안 자고 있으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버스가 산간 지역을 달리면서 아침 햇살이 산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을 때 그는 인문대에 떠도는 어떤 기괴한 소문에 대해서 내게 물어보았다. 어떤 여자애가 남자애를 좋아했고 고백 편지 쓰려다가 글자 강박증에 걸렸다고. 그러니깐 하루 종일 연애편지에만 매달려서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아보려다가 문맹이 되더니 휴학까지 해버린 머저리가 있다고. 그 남자에 미친 여자에 대한 소문에 자기 역시 비웃었고 어이없어했지만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나와 절묘하게 비슷하다고. 혹시... 너 아니지?

 

 

 

 

 

너를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런데 너무 절묘해서.

...

아니지? 절대 아니지?

...

만약 사실이라면... 진짜 편지 쓰려다가 그런 거면 나한테 꼭 말해줘.

...

여주야?

 

 

  난 눈을 뜨지 않고 대답하지도 않으며 오랜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라는 건 이래서 좋은 거다.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면서 내 자존심도 지킬 수 있으니깐. 하지만 언젠가는 사실대로 말해줄게. 그 소문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언젠가는 내 입으로 말해줄게. 우선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여자는 남자에 미쳐서 그런 게 아니야. 정확히는 사명감이 발동해서 그렇게 된 거지.

 

 

 

 

 

 

  그녀가 학교 수업을 뒷전으로 미루고 집에서 혼자 집필에 몰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 것 같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읽기만 해도 변덕스러운 마음이 진정되고 외로움도 일순간에 사라지며, 질투심에 막연히 비난받는 그를 지켜줄 어떤 기적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해열제이자 진통제이자 석탄을 금으로 바꾸는 현자의 돌에 버금가는 현자의 문장을 찾고 있었던 거라던데. 힘들 때 자신이 쓴 글을 보고 그가 평온을 되찾을 수 있도록, 신앙심을 잃을 때마다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어떤 성경 같은 글을 쓰려고 한 거라던데. 그런데 결국 수은 냄새에 뒤져버린 연금술사처럼 그녀도 만용이라는 악취에 뒤져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이게 모두 그녀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니고 스티븐 킹도 아니고 검증된 작가도 아닌데 글자를 함부로 다루어서 그렇게 된 거다. 무슨 수학 문제 풀듯이 대입시켰다가 말았다가, 퍼즐 조각 맞추듯 더듬거렸다가 말았다가, 앞과 뒤를 바꾸다가, 도치법을 했다가, 결국 모든 글이 풀리지 않는 미제로 보이는 수준으로까지 갔으니...

  너 하루에 30페이지 쓰고 3분 만에 지운 적 있어?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의 까칠한 질감을 뇌리 깊숙이 느껴본 적은? 선인장을 씹어먹은 것 같은 어떤 거부감은? 그런 글을 자신이 썼다는 걸 알았을 때는? 욕심은 더럽게 많은데 재능은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미련하게 몰락해 버린 거야. 감히 천재 앞에서 천재적인 글로 구원해 주겠다고 깝친 대가를 제대로 치른 거지. 성경도 구원받고 싶은 신도가 쓰는 거지 구원 해주는 신이 쓰는 건 아니잖아. 누가 누구를 구원해 주겠다는 건지.

 

 

 

거의 도착했어.

...

...

...

와. 봐봐. 사람 완전 많아. 보여?

 

 

  나의 자는 척 연기는 계속됐고 심지어 햇빛이 내 얼굴을 뒤덮어서도 계속됐다. 지금 내 연기가 티 나나?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연기라는 걸 알아채고도 일부러 속아준 것일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연기가 아닌 진실이 있다면 너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와 기회를 잃어버렸고 그것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는 거야. 다만 그 사실은 절대 내 입을 통해서 나올 수 없는 진심이지만 말이지.

 

 

 

 

 *

 

 

 

 

 

 

 

어떻게 사람 짱 많아!

장난 아닌네?

우리 절까지 들어갈 수는 있을까? 돌탑까지 가야 하잖아.

 

 

  인간의 3대 욕구 중 소원 비는 욕구가 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미룡사 근처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얼마나 많을 정도라면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1cm도 전진해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벽에 갇혀버린 상황. 혹시 조금의 틈이 있지 않을까 살펴보았지만 빵빵하고 두꺼운 패딩, 목도리와 모자와 같은 방한용품을 한가득 껴입어서 더욱 틈이 없었고 특히 소원, 하필이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소원을 들고 왔기에 그들은 조금도 틈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론 안 되겠어. 여기서라도 소원을 빌자.

안돼. 여긴 절 안도 아니잖아!

절까지는 너무 멀잖아. 방법이 없어!

 

  적당히 타협하려는 나와 달리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절에 들어가려고 눈에 불을 켰고 조금이라도 있을 빈틈을 찾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소원을 간절히 빌어야 이루어진다, 내일 로또 당첨자 100명 나오겠다, 꼭 건강해질거다, 스님이 곧 종을 치신다, 종을 치면 꼭 소원을 바로 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난 스님이 치신다는 종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 우웅

 

  스위치를 내리자 일순간에 작동을 멈춘 기계들처럼 사람들은 흰 입김을 내뿜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열기, 치열했던 길목 싸움, 짜증 섞인 볼멘소리는 종소리에 모두 죽어버렸고 순간 난 타임머신을 타고 첫 시수업 강의실로 돌아오는 느낌을 느꼈다. 그의 시를 보고, 그러니깐 천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평범한 사람은 소원을 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침묵의 시간으로 말이야.

 

자... 가자.

 

 

  그리고 그 시간을 만들었던 남자는 내 손을 꼭 붙잡고서 소원을 비느라고 차분해서 사람들 틈을 해쳐나갔고, 어느덧 미룡사 입구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풀지 않고 두 손 꽉 잡으며 소원을 빌었다. 버스에서 내게 말한 변덕스러워지기 싫다는 소원을 빌고 있는지, 아니면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또 다른 소원을 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중하게, 혹은 아파 보이는 표정으로 소원을 비는 그. 나 역시 단 한 번도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신이시여. 난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이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걸 알았습니다. 간절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무슨 패널티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들어주지 않으시고, 악인을 사랑하시고 선인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모습을 보시고 제대로 느꼈지요. 하지만 규칙이 없는 것이 당신의 속성인 것처럼 신의 축복을 받은 천재 역시 그러한 사람인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광년의 속도로 노인에서 아이의 마음을 가로지르고 수많은 감정의 진폭을 거스르는 사람, 당신을 닮은 이 사람을 난 사랑해.

  한 번만 더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할 기회를 줘. 한 번만 더 그의 사색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줘. 연애 편지 쓰려다가 강박증에 걸리고 비웃음당해도 좋으니깐 한 번만 더 기회를. 그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보답을 할 수 있도록. 눈을 감아도 보이는 그의 아름다움을 나 다시 한번 더.

 

 

 

 

 

+

 

 

 

 

이보다 더 미학적으로 천재를 찬양하는 글이 어디있어.

이보다 더 변덕스러운 사람을 천재라 칭하는 글이 어디있어.

변덕은 신의 속성이자 천재의 성격이다.

이번 팬픽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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