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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술원의 모든 훈련이 필수이자 명령의 속성을 띠었지만 iso 명상은 모든 훈련들 중 가장 중요하고 높게 평가받는 훈련이었다. 만약 iso 명상 중에 빠지거나 제대로 마치지 못한 후보생이 있다면 그 후보생은 패널티도 패널티였지만 특수 과업 이사회에서 해당 후보생을 지도자로서의 자격 미달 후보생으로 취급해버린다는 소문이, 그리고 거의 기정사실화 될 정도의 후일담이 난무할 정도였다. 그만큼 청수는 iso 명상에 대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주었는데 문득 재문이는 어째서 청수가 iso 명상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분명 효율과 능력주의를 최우선 여기는 청수인데 독방 명상, 그것도 학술원에 널리고 널린게 차갑고 어두운 빈공간인데 굳이 잠수복을 입히고 해구까지 내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분명 iso 명상에서는 효율성보다 더 우위에 있는 무언가가 있었고 바로 그것을 청수는 어떻게 해서든 지도자 후보생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재문이는 추측했다.
바로 그 증거가 iso 명상 전에 있는 체력 테스트, 그리고 체력 테스트 이전에 가장 먼저 해야하는 영상에 대한 시청이었다. 체력 테스트 장소에 도착한 후보생들은 교관의 안내에 따라 한켠에 마련된 프로젝트룸에 들어가 앉았고 그곳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룸 앞에 있는 거대한 디스플레이에서 웅장한 음악을 시작으로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그 다큐멘터리는 후보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매번 플롯리 바뀌었지만 큰틀로 보면 똑같은 내용, 그리고 똑같은 교훈들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대한민국은 개개인의 강한 자아로 인하여 내부 분쟁이 시시때때로 발생하여 전멸을 자초하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정신적 독립을 하지 못한 자주성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주변 강대국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애국주의에 빠진 시민들과 그런 시민을 계몽시켜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무능한 지도자들. 귀족공화제가 아니었기에 지나친 상승욕구는 교육으로 집중되고 신분 상승이 주 목적인 가학적인 교육방침, 그로 인해 희생당한 어린 아이들. 위대한 아젠다를 찾지 못하고 경쟁의 패배감에 젖어버린 허무에 빠진 어른들.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실수까지 축약시킨 그 역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을 후보생들은 집중해서 보았고 혹은 어슬렁거리는 교관들 때문에 볼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때 재문이는 자신의 앞 줄 왼편에서 영상에 맞춰 시시각각 얼굴색이 변하는 26번을 발견하게 되었다. 얼굴색이 변할지라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그녀의 어두운 낮빛. 테스트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지쳐보이는 안색. 혹시 자신이 던진 독설 때문인지, 곧 치뤄야하는 테스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재문이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
그때 교관이 재문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영상에 집중하라는 경고를 주었고 그제야 재문이는 자신이 영상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분쟁의 역사를 마치고 자주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청수를 만났습니다. 단일민족이자 유일무이한 순수성을 가진 한국인만이 청수의 위대한 아젠다를 유일하게 수행할 수 있는 위대한 민족이자, 그것이 가지고 올 무궁한 영광과 힘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을 실현시켜야하는 지도자의 미덕과 사명감을 담은 한편의 영화이자 오케스트라, 천장이 웅웅 울리고 귀를 멍하게 만들 정도의 대서사시에 어울릴법할 음악과 함께 마무리되는 영상. 프로젝트룸의 불이 밝아지기도 전에 후보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무언가에 고취된듯한 눈빛은 영롱하고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박수 소리는 이내 곧 잠잠해지고 그렇게 찾아오게 된 적막감, 그 적막감에는 공포심이 서려있었고 본격적으로 후보생들의 비명이 난무하는 훈련이자 테스트가 시작됐다는 증거였다.
1번부터 50번은 B코스, 51번부터 100번은 A코스, 101번부터 150번까지는 C코스로 테스트를 받는다.
프로젝트룸에서 나온 후보생들은 스트래칭을 하여 몸을 풀거나 교관에게 배정받은 코스에 맞는 훈련실로 향했고 그 중 재문이와 26번을 포함해 B코스를 배당받은 후보생들은 사격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일렬로 늘어져 있는 테이블과 그 위로 놓인 두툼한 총기깔개, 그리고 그 위로 놓인 분리된 총. 총의 디자인부터 탄창까지 보아하니 부정할 것 없는 기관권총이었고 반동력이 상당한 총이었기에 사격하는 것은 물론 조준하기 까다로운 총이었다. 특히 의수를 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가혹한 총이었다.
의수를 끼고 있지 않았음에도 37번은 자신의 일인 것처럼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때, 재문이 바로 옆으로 걱정의 주인공인 26번이 자리 잡았고 그녀는 딱히 재문이를 의식했다기 보다는 하필 그 자리가 비어있었기에 왔을 뿐 사적인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총기조립에 있어서는 의수를 끼어도 잘할 수 있다는 비장함이 넘치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그렇게 후보생들은 각자 한자리씩 차지하고 두툼한 귀마개를 끼게 되면서 마무리된 준비, - 삐이이이이이이, 전자팔찌에 울리는 버저음보다 몇배는 시끄러운 소리가 훈련소를 가득 매우면서 본격적인 테스트가 시작됐다.
버저음이 울리는 순간 훈련실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단단한 재질의 퍼즐이 맞춰나가지는 소리, 약간의 속도 차이는 있을지는 몰라도 훈련생들의 총기 조립 속도는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했다. 다만 매끄럽고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진 의수를 가진 26번은 탄창에 탄피를 넣는 간단한 행위조차 버벅거렸고 다른 후보생들이 총기조립을 거의 끝마쳤음에도 26번은 조립조차 시작하지도 못하였다. 현저하게 떨어진 자신의 실력에 수치심이 느낀 건지 얼굴이 새빨게진 26번.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했던 총기조립에 누구보다 뒤쳐지자 자존심이 바닥 저 끝까지 내리 꽂히면서 조립속도는 느려지다 못해 그녀의 손은 정지해버렸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37번이 교관이 알아볼 수 없을거라 생각할만큼 엄청난 속도로 총기를 대신 조립해주었고 37번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속도로 조립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할 정도로 오류와 오차와 결점 없이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하지만 재문이의 친절은 곧 교관을 통해서 발각, 교관은 이상행동을 보인 후보생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37번! 너 뭐해!
교관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재문이는 타겟을 향한 사격을 시작했고 교관의 목소리는 엄청난 연사력을 가진 총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두개골 깊숙한 곳까지 뒤흔드는 기관권총의 반동력. 개머리판도 없이 온몸으로 반동을 제어해야 사격테스트. 그러나 재문이를 포함해 후보생들은 이미 총에 익숙하다 못해 하나가 된지 오래였기에 목표물을 향한 완벽한 사격을 했고 아직 의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26번 역시 깔끔한 사격실력을 선보였다. 그렇게 전쟁터를 방불캐하는 엄청난 소리와 화약냄새로 가득한 훈련소는 타겟이 사라짐에 따라서 다시 조용해지게 되었고 재문이는 귀마개를 벗고 다음 훈련장으로 가려던 찰나, 교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37번. 너 무슨 짓 했어.
...죄송합니다.
혹시 협동 훈련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이건 개별 훈련이다. 몇번이나 해봤으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
정말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37번과 26번, 너희 둘 다 감점이다. 26번. 불만 있으면 37번에게 말하도록.
그 말에 26번은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교관은 등을 돌려버리면서 변명할 기회도 없었고 이에 재문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너 내가 그렇게 싫냐?
...
아주 날 구렁텅이에 빠트리려고 작정했구나.
26번은 재문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재문이 역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훈련에 있어서 시간 역시 점수에 포함되었기에 둘은 지체할 것도 없이 다음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훈련실로 향했다. 다만 재문이와 어떻게 해서든 떨어지고 싶은 그녀는 쏜살같이 달렸고 바로 턱걸이 훈련을 먼저 받음으로서 재문이와 떨어질 수 있었다. 자신을 피하려고 하는 26번의 의도에 기분이 상한 재문이는 팔짱을 끼고 과연 그녀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그때, 자신 뿐만 아니라 꽤 많은 후보생들이 26번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수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바로 훈련에 투입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패널티었기에, 특히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26번을 보는 사람들. 마치 강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처럼 신기한 반, 흥미로움 반이었지 그 안에 걱정어린 시선이라고는 단 하나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오직 재문이만이 그녀가 끼고 있는 의수 이음새를 주의 깊게 살펴 봤을 뿐이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나 재문이의 우려와 달리 체력 테스트 때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던 26번의 실력은 의수를 껐음에도 불구하고 변치않았고 턱걸이는 물론 곧바로 이어지는 레그턱 역시 다른 후보생들보다 빠른 속도로 마치게 되었다. 다음 테스트인 윗몸일으키기도, 그 다음 테스트인 달리기에서도 이상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26번. 하지만 외줄 오르기를 할 때에는 내내 고통스러운듯 인상을 썼고 발굽혀펴기 할 때는 그녀의 자세가 점점 무너지더니 결국 재문이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끼고 있는 의수는 타이핑이나 치는 사무직 요원이나 연구원들에게나 어울렸지 고강도 훈련을 자주 받아야하는 요원 후보생에게는 전혀 적합한 타입이 아니었으니깐. 게다가 의수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 역시 조금도 주지 않고 바로 훈련에 투입 되었기에 여러모로 가망성이 없어보였으니, 이건 단순 패널티를 넘어선 레드 카드나 다름 없었고 그녀는 곧 퇴장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만약 퇴장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겠지.
아악!
테스트의 막바지로 다가갈수록, 온몸이 땀으로 젖어 유니폼이 온몸에 달라붙는 지경이 될 때 쯤 훈련소 곳곳에는 힘을 쥐어짜는 후보생들의 비명이 들렸다. 처음에는 지도자 후보생으로서의 기품을 지킨답시고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훈련의 극단에 치닫자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면서 추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어느 누구도 그러한 후보생의 모습에 비웃거나 신기하게 보지 않았다. 왜냐면 모든 후보생들이 그러한 몰골을 가졌기에, 또 남 신경 쓸 시간과 힘이 전혀 없었으니깐. 한쪽에서는 전쟁터를 방불캐하는 총소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기합 소리, 그리고 교관의 고함소리. 총기와 사람 몸에서 나오는 열기와 상반되는 차가운 훈련기구들, 그리고 교관의 냉정한 눈빛. 그야말로 훈련소는 모든 온기와 모든 소리를 담고 있는 생지옥 그자체였다.
하아....하아...
특히 4살이나 어린 나이 탓에 늘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던 재문이는 몇시간 내내 이어지는 훈련으로 인해 땀으로 머리카락이 다 젖었지만, 얼굴에 묻은 땀을 대충 닦고 남은 기력을 모두 쏟아내어 마지막 테스트인 근력 테스트실로 향했다. 만약 여기서 긴장을 풀어버린다면 온몸이 늘어져 버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훈련을 끝마치는 것이 재문이의 전략이었고, 특히 근력 테스트는 한 후보생의 팔을 부러트리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을 만큼 난이도가 높은 테스트였기에 긴장을 풀어서는 안됬었다. 물론 사격 테스트처럼 숙련도나 기술을 요하지는 않고 그냥 가로로 놓인 쇠막대기를 있는 힘껏 밀면 될 정도로 요령은 간단했지만 매일 근력 운동을 하지 않으면 커트라인에 도달하기 힘들정도로 성실성과 순간 집중력을 많이 요했다.
그런 근력 테스트의 무시무시함을 아는 후보생들은 다른 모든 테스트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근력 테스트에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심해 명상을 했을 때 누구보다 가장 앞선 것처럼 근력테스트에서도 재문이는 눈치만 보고 있는 후보생들을 뚫고 교관을 향하여 거리낌 없이 말했다. 37번. 근력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보생들은 두손으로 쇠막대기를 잡는 재문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떨리는 두 손부터해서 긴장감이 서린 표정 하나하나 지켜 보았다. 그러나 이내 재문이는 그 모든 것을 거둬내고 힘밖에 쓸 줄 모르는 무식한 들소처럼 쇠막대기를 있는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다.
으으윽....
알고 있다. 고작 이런 힘 가지고는 점수를 충족시켜야만 울리는 버저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좀 더 강하게 밀어야만 했다. 좀 더 세게 힘을 주어야만 했다. 핏줄이 다 터질 것 같은 느낌과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느낌이 동시는 드는 순간의 끝에 도달해야만 가능했기에 재문이는 젖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짜냈다. 그러다 잠시 숨을 돌리는 것으로 페이스를 조절, 그러나 너무 지체하다가는 점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오래 쉴 새도 없이 바로 쇠막대기에 온 힘을 주었다.
으윽...! 윽!
이렇게 많이 힘들 때면,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때면 자기는 다른 후보생들보다 어리니 제발 봐달라는 유혹에 재문이는 시달렸다. 저는 다른 사람보다 한참 어리잖아요! 일찍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 죄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봐주세요! 제가 조금만 더 클 수 있도록 봐달란 말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찾아오게 될 패널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교수진들. 그리고 26번이 보여주었던 차갑고 냉담한 반응. 그런 최악의 상황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재문이었기에 결국 자신의 마음 속 징징 거리는 아이를 향해서 있는 힘껏 발길질을 했다. 6살 그 아이는 이미 멍투성이에 상처투성이었지만 그 아이가 죽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고 그 아이가 입을 다물어야만 이곳에 버틸 수 있었다. 제발 때리지 말라는 아이의 멱살을 잡고 주먹 한 방을, 퉁퉁 부운 얼굴로 질질짜는 아이를 향해 다시 한번 주먹을. 결국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입을 다물면서 더이상 재문이에게 어떠한 소리도, 어떠한 투정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진심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성숙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 삐이이이이
귀를 찢는 버저음이 울리고 그렇게 재문이는 이번 훈련에서도 패널티를 이겨내고 무사히 체력 테스트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후보생들로부터 하여금 두려움과 질투심과 복잡한 마음이 담긴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으나 재문이는 그것들을 상대할만큼 힘도, 정신력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숨쉬는 것조차 너무 힘든 몸을 이끌고 그렇게 비틀거리며 탈의실로 향하는 그때
26번. 근력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너무도 익숙한 번호가 들리자 재문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멈춰섰고 고개를 살짝 돌림으로서 그녀가 과연 이 테스트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재문이에게 지켜봐달라는 뜻으로 평소 보여주지 않던 애틋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 시선을 완전히 거두고 쇠막대기를 있는 힘껏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문이가 우려했던 대로 그녀의 오른팔은 매끄럽고 극한의 강도를 버텨내기 힘든 의수였고 왼팔은 그러한 의수를 대신하여 많이 사용된 탓에 부어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근력테스트까지 한다면 의수는 물론 왼팔의 안정성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점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녀의 눈이 오래도록 굶주린 육식동물처럼 날카로워질수록, 우지직거리는 의수가 금가는 소리. 결국 금이 점점 커지더니 의수는 불꽃놀이처럼 수많은 파편들을 만들어내며 와장창. 산산조각난 파편들은 테스트실 바닥 곳곳에 나뒹굴었고 재문이 바로 앞에도 하얗고 단단한 조각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점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왼팔을 재빨리 쇠막대기 정중앙으로 옮겨 잡고서 사자와도 같은 기합소리를 내며 테스트를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후보생들 모두 적을 상대할 때 보여주는 무서운 페르소나가 있었고 26번 역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문이는 어떠한 감정도 일체 엿보여주지 않는 차가운 페르소나를 가졌다면 그녀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광기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었다. 팔에 금이 생기든 말든, 피멍이 생기든 말든, 부러져 양손 모두 의수를 쓴다고 해도 이미 광기의 페르소나에게 사로잡힌 그녀는 오직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붙었다. 그리고 끝내 버저음을 울리게 만드는데 성공했으니, 무엇보다 두손이 아닌 오직 한손으로 해냈다는 사실에 후보생은 물론 교관들조차 얼굴이 창백해졌다.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
재문이는 분명 자신의 모든 감정을 절제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더 이상 어린 아이도 아니었고 불쑥 튀어나오는 마음의 소리도 일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무덤덤해졌으니깐. 그러나 단 하나, 분노의 감정만큼은 쉽사리 제어하지 못했는데 하필 지금 재문이가 사로잡힌 감정이 바로 분노, 자꾸만 굶주린 늑대처럼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것이 이 감정을 일으킨 당사자를 물어 뜯지 않으면 절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특히 iso 명상을 위하여 잠수복을 입고 있는 후보생들 사이로 보이는 26번, 뒷일 생각 안하고 무식하게 나온 탓에 피멍이 들어버린 왼팔을 감싸쥐고서 아파하는 그녀를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다 못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화가 풀리는 살의의 감정까지 느낄 정도였다. 자신이 그렇게 주의를 줬음에도 빡대가리 같은 행동만 하는 그녀를 결코 가만 둘 수 없었다. 박재문 박사가 말했던 혼내야 할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형, 누나. 잠깐만 밖에 나가있을래?
심해용 잠수복을 입은 채로 수다를 떨고 있던 후보생들은 자기가 무슨 교관인 것마냥 나가라고 명령하는 재문이를 아니꼽게 보았지만 상층부에 있었을 때 26번에게 잠깐 보여주었던 눈빛, 청수의 지도자에게나 어울리는 거대한 얼음 암벽같은 눈빛에 탈의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 특히 이번 훈련에서도 역시 4살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마쳤다는 점, 게다가 지진해일 때 영웅적인 업적까지 남기면서 시딩 프로젝트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생으로 지목 받았던 점에서 본인의 안위를 위하여, 후에 리더가 될 사람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의 말에 따라 탈의실을 나왔다. 그렇게 탈의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직 철조망에 찔려 아픈 상처를 혼자 보듬어 감싸 안은 사슴처럼 위태로워보이는 26번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재문이는 사슴을 노리는 늑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26번이 자각하지도 못할 새에 그녀 앞에서 섰다. 가까이서 보니 26번의 팔 상태는 훨씬 더 엉망이었고 안에서 뼈가 부러진 것처럼 피멍이 들고 퉁퉁 부운 것이 지금 당장 응급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방치한다면. 재문이는 자신도 모른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고 갈려진 뼛가루를 삼키며 26번에게 말했다.
야. 26번.
...
너 그렇게 뒤지고 싶냐?
...
그러면 생고생 안하고 효율적으로 죽는 방법 알려줄게. 총기 훈련소로 가. 거기서 총 하나 집은 다음 입에 넣고 쏴. 어때? 쉽지?
기력 다 빠진 26번이라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일 힘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7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난히 거슬렸던 이유는 이미 그가 사람의 마음을 찌르다 못해 후벼파고 조정할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 되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괴물을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26번. 자신이 만든 걸작품을 집적 마주한 그녀는 힘 다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
개좆같은 새끼... 아주 사이코패스 새끼 다됐네... 너 그렇게 싹바가지 없이 말하는 태도 대체 누구한테 배운거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는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변했는데.
...
누구 때문에 사이코패스 새끼가 됐는데.
...
필요 있으면 귀여워하고 귀찮으면 버리고. 그치?
순간 역린을 제대로 찔린 26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말 찍찍 갈기는 버릇 없는 남자 앞에 바짝 섰다. 분명 사슴인 줄 알았는데, 다 죽어가는 기력없는 사슴이라 생각했는데 재문이보다 큰 키로 내려찍듯이 내려다보는 26번의 눈은 우두머리 늑대마저 제압할 수 있는 호랑이의 눈이었다. 평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낼 때 무섭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처음으로 재문이 앞에서 화낸 모습을 보인 그녀는 매우 위압적이었지만, 그건 재문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쭉 찢어진 눈, 삼백안 때문에 간신히 보이는 검은색 눈동자, 그런 눈을 감싸는 검정 그을린 자국. 극도의 비밀성과 비인간성으로 무장된 조직의 리더에게나 어울릴 법할 눈으로 그녀를 차갑게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야말로 불과 얼음의 싸움이었다.
보자보자하니깐 누나한테 계속 기어오르고 있네! 너 나한테 뒤지고 싶냐? 먼저 총 구해서 너부터 쏴 죽일까? 개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어!
...
그래! 나 하나 살아보려고 그렇게 행동했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챙겨줘야만 하는 사람이니깐! 기댈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내가 지켜주고 돌봐줘야하니깐!
그래. 그게 바로 누나야. 더럽게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
...
그러니 누나답게 살라고. 뻔뻔하게 끝까지 살라고.
?
이해못해? 당장 훈련 그만두라고! 팔 잃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이건 분명... 데자뷰였다. 훈련 받기 전 복도에서 재문이를 통해 느꼈던 어떤 기묘한 감정, 예전처럼 다시 좋은 사이로 갈 거라고 착각할 만큼 은은하게 느껴지는 걱정 어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보안프로그램에 쌓인 바이러스처럼 본래의 성질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냈으니, 부드러운 과즙을 가지고 있지만 날카로운 가시와 차가운 표정으로 먼저 상대방을 찌르는 선인장과 같았다. 26번도 알고 있다. 걱정하고 애타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재문이의 인성은 뒤틀려질대로 뒤틀려져 버렸다는 것을. 명령과 복종과 상대방에 대한 견제의 언어로 이루어진 학술원, 그런 학술원에 어울리는 차가운 언어로 밖에 마음을 표현 할 수 없었고 자기 역시 그러한 표현 방법을 가지도록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그러기에 26번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개떡같은 그의 말에 찰떡같이 답해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이건 훈련이 아니고 무조건 따라야하는 명령이야.
박사님한테 바락바락 따질만큼 사는 것에 집착하던 누나 아니었어?
그런 괜한 짓을 해서 미운털까지 박혔으니 더 빠지면 안되지.
훈련에 대한 사명감이 그렇게 대단한 거건가? 죽을 걸 알면서도 자처해서 갈 정도로 엄청나게 말이야.
...
아니면... 위대한 아젠다에 제대로 세뇌 당해서 그런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위대한 아젠다에 제일 복종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재문이가 그런 소리를 하자 26번은 뭔가 미묘하면서도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내가 자살폭탄테러라도 할 정도로 세뇌되서 훈련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거냐? 그것도 아니면 여기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까지 도달한 거라 생각한 거야?
그러면 뭔데?
하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청수가 아니였으면 우린 모두 다 죽었을 거라는 사람을 볼 때면 가끔 영웅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재문이는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팔짱을 꼈고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다는 뜻으로 그녀 앞에 꼿꼿이 섰다.
당장 훈련 그만두고 내 자유를 찾아서 학술원을 나간다면, 그래. 보통 사람들처럼 의무교육을 받고 대학교를 나온다면 난 평범한 직장인이나 공무원이 되어 있겠지. 학술원 중퇴라는 어디 써먹지도 못하는 이력 하나 들고서. 청수를 위한 충성심도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는 독박까지 쓰면서.
그게 뭐 어때. 살았잖아.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중요하다고? 장난해? 내가 시덥잖은 사람들의 민원에 꼴받아 하고 있을 때 학술원 동기는 내가 모시는 상사의 상사의 상사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 되어 있을텐데? 30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셨던 우리 아버지를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내쫒을 수 있는 청수가 인정하는 최고의 인재들이자, 내 자식의 자식이 아무리 피땀흘려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귀하신 분으로.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당장 너는 청수의 미래가 달린 시딩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실 분이잖아. 이렇게 마주서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높으신 분이 될텐데. 알겠니 재문아? 썩어도 여기서 썩고 죽어도 여기서 죽는 게 맞는 거야. 이건 내가 청수에게 세뇌 당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충성심을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야. 이기적인 마음인거야. 잘먹고 잘 살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에게 꿀리고 싶지 않은 욕심.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내게 세뇌당한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청수가 한국을 장악했을때 지도부의 통제와 지도자 후보생 육성 산업에 누구보다 심여를 기울였던 것은 사람들을 세뇌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 사람들이 세뇌 당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던 것.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말든, 자유를 사랑하든 말든, 체게바라처럼 혁명과 반기를 꿈꾸어도 행동이 통제 당한다면 그 사람은 세뇌 당한 사람이다. 세뇌는 즉 행동이다. 행동을 통제하고 반복시키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세뇌는 시작된다. 그런면에 있어서 교관이 어떤 명령에도 참고 버텨낼 각오가 되어 있는 37번의 모습이, 교관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37번의 모습이 26번이 보기에는 누구보다 깊이 세뇌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녀의 말에 입을 곧게 다문 37번. 26번을 그저 계획성없고 철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나이의 연륜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 통신기능을 겸비하는 26번의 팔찌가 시끄럽게 울렸고 통신을 받자마자 그곳에 37번이 있냐고 묻는 교관. 네 있습니다. 훈련이 힘들었는지 아주 죽으려고 하네요. 하지만 교관은 되지도 않는 26번을 거짓말을 금새 간파했고 지금 당장 37번과 함께 집합 장소로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제 정말 가야할 시간이 왔다.
봤지? 너와 잠깐 이야기 나누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 정말 노력 많이 해야한다고.
...
...
...
간다.
더이상 재문이와 감정적인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 26번은 탈의실을 나왔고 제발 현명한 판단 좀 하라고, 멍청한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 온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재문이는 알고 있었다. 누가 그녀에게 가지말라고 말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났는데. 누구 하나 살리기 위하여 저런 일을 당했는데. 타인을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위압적이던 재문이의 언어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재문이 본인 스스로에게도 공격적이었고, 항상 독한 말에 기죽고 폭행으로 인하여 상처를 달고 사는 재문이의 마음 속 6살 아이가 성숙한 소년이 된 재문이에게 처음으로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너는 거대한 실수를 해버렸어.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
하아....하아...
26번.
네?
너 괜찮아?
03이라는 숫자가 크게 쓰인 게이트 앞에서 후보생들이 두꺼운 잠수복을 입은 채로 문이 열리기 기다리던 그때 핏기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아픈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26번을 보고 교관은 물었다. 37번은 이때가 기회다 싶은 마음에 26번은 잠수복 게이터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손이 망가졌다고 말하려던 찰나,
아니요! 컨디션 최고입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
정말 괜찮다고?
제 기분은 제가 알잖아요. 37번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교관에게 그녀의 상태를 일러받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37번의 낌새를 눈치 챈 26번은 재빨리 가로막았고 재문이에게는 안타까운 일, 하지만 26번에게는 다행히도 교관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재문이에게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말이 고작 컨디션이 좋다고, 역대 최고로 컨디션이 좋다는 말이었다.
되도 않는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아니야. 왜냐면 이렇게 마음이 홀가분한 적은 오랜만이거든. 너한테 누나값 제대로 하고부터 진짜 살 것 같더라.
...
왠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빛과 그림자는 분명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게 물리학적으로 맞지만 그녀는 정말 그 어떤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보이는 활기찬 미소, 혹은 광기에 찬 표정과 함께 창백한 얼굴빛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말 제대로 미친건지 게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모든 후보생들을 재치고 가장 앞장서서 달려나갔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행동을 하는 그녀가 불안해 미칠 것 같은 재문이는 온힘을 다해 쫒아갔다. 두꺼운 심해 잠수복을 입었음에도 짜증날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그녀. 가기전에 게이터 조절은 할 수 있는지 확인 좀 해보자고 말하고 싶은 충동.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빨리 돌아가라는 말. 그러나 그녀의 의지는 너무나 확고했고 자신은 용기가 없었기에, 내심 바라는 것은 많지만 소심한 이중인격자였기에 그런 사람이나 할법할 소리를 그녀에게 건냈다. 무사히 돌아와야해.
왠일이냐. 너가 그런 좋은 말도 하고.
내 말 흘려 듣지마. 무슨일이든지 제발 장담 좀 하지말라고.
걱정마 재문아. 누난 불사신이니깐 절대 죽지 않아. 그리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으니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하고싶은 거 뭐. 그놈의 어리고 잘생긴 남자랑 병신같은 데이트?
왜. 해줄거야?
...
...
...
...
그 사람이...
와! 진짜 빨리도 눈치챈다! 눈치 더럽게 없는 사이코패스 모솔 아다 확정!
누나 말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왜냐면 나는 잘생긴 남자에 포함되지 않으니깐.
이야! 치명적인 오류충! 자신감도 없는 모솔 확정! 짜식... 어쩔 수 없이 내가 소중하게 모셔드리고 살아야겠네.
...
그래... 너한테는 나 밖에 없는거야.
그때 훈련 내내 지겹도록 들리던 버저음이 둘의 대화를 가로 막을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짠내 나는 바닷물과 차가운 바람이 복도 저 끝에서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바람을 맨 앞에서 맞은 26번은 머리칼이 흩날림과 동시에 어떠한 감정을 깨달았는지 눈동자가 평소보다 2배는 커졌고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 감정은 매우 강렬했다. 잠수복 입은 그 아이의 뒷모습을 수없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었던 진심을 그가 섰던 곳에 똑같이 서는 순간, 마치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유령이 된 것처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공허하고 텅빈 눈동자를 가지며 후보생들을 재치고 맨 앞에 섰던 것은 사실 겁대가리 없어서가 아니었음을. 어떠한 애착도 없는 균일한 말투와 실수 하나 하지 않는 완벽주의, 그리고 따뜻함이라고는 엿보이지 않는 행동은 혼자 이불을 부둥켜 안고 울었던 시간이 그 누구보다 길었기에 가능했음을.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질투의 소재가 되었고 형과 누나는 끽해봤자 경쟁자, 약한 모습을 절대 보여서는 안되는 경쟁자였고 그나마 친절했던 사람은 자기 사는 일에 무엇보다 최선이었기에 친절은 오래가지 못했겠지. 결국 뻗어나는 나무가지를 자르듯이 재문이는 자신의 감정을 자르고, 사람에 대한 미련을 자르고, 결국 마지막에는 몸통만 남은 나무가 된다고 하더라도 가위질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그 나무는 물 한점조차 삼킬 수 없는 바짝마른 흉물이 될테지만 그러면 뭐 어때. 그때 되면 죽으면 되지. 이제 재문이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죽느냐 사느냐는 원초적인 감정 뿐이었고 그래서 겁도 없이 맨 앞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빨리 끝을 맞이하고 싶다는 비툴어진 바램, 아주 나쁜 바램도 있었다.
그런 거였네.
...
잘난척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네.
...
아니었던 거야. 그게 아니였던 거야.
...
재문아. 이제야 니 마음을 알 것 같아...
누나. 이제야 내 마음을 안 거야? 날 이루고 있는 근간은 사실 죽음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거야? 불면의 시간을 혼자 걸으면서 불쾌한 자각몽 사이로 거닐던 나를. 그렇게 많이 외로웠던 나를. 그러나 재문이는 펑펑 우는 그녀를 보고도 어떠한 말도,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분명 자신도 같이 울어야 하는 게 분위기상 맞지만 공감은 물론 위로 한마디를 해줄 수 있는 마음의 온기가 없었기에, 빠짝 말라버린 나무는 더이상 나무가 아니었기에 나무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다는 사실에 재문이는 슬픈 감정을 느꼈지만 그 마저도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만 내릴 수 있는 평정심을 되찾았으니,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닦고 공부방을 나와 교실로 향하던 그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무감각해졌다.
어느덧 바닷물이 무릎 위까지 차오르게 되자 심해용 잠수복은 자동으로 핼맷을 씌어주게 되었고 물은 빠르게 허리, 어깨, 그리고 머리위를 완전히 뒤덮혀 버렸다. 재문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눈인사라도 해준 후에 심해평야로 걸어나갈거라 생각했지만 슬픔의 감정 하나 느끼지 못하는 기계와는 더이상 대화하기 싫은 건지 뒤돌아보지 않고 게이트의 끝으로 나가 자기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재문이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교관의 이동하라는 호출을 듣기 전까지 어두운 심해 속을 혼자 걷고 있는 잠수부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우주 속을 끝임없이 유영하는 백색외성처럼 환하게 빛나지도 않았고 따뜻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미련이 남은 건지 재문이는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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