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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닌 것을 더 사랑합니다 - 크라운 츄러스

에세이/가계부 대신 에세이

by @blog 2024. 10. 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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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어린이날만 되면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던 가족들이 참 부러웠다. 집안 형편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집구석에 잘 있지도 않던 애비, 가장 역할을 맡고 있는 엄마는 회사를 다녀서 시간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워낙 밖으로 돌아 다니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집구석에만 있었거든. 그런데 딱 한번, 5월 달에 있는 남동생 생일을 퉁치는 겸 어린이날 놀이공원으로 놀러 간 적 있다. 날씨도 우중충 했던 그날, 자유 이용권도 비싸서 개별 이용권을 끊어 기구 2 - 3개만 탔고 군것질도 핫도그나 햄버거는 꿈도 꾸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츄러스를 먹었었지. 사실 츄러스는 겉보기에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아니어서 내심 속으로 불평했거든? 뭔가 반쪽짜리 놀이동산 투어도 짜증났거든? 그런데 맛있더라고. 풍부한 계피향과 쫀득쫀득한 식감이 기억에 남았고 그 반쪽짜리 놀이동산 투어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갑자기 츄러스 땡기네.


 
  그런데 마침 마트에서 츄러스를 구현해낸 과자를 1+1으로 팔고 있었고 츄러스 특유의 쫄깃한 식감은 없었지만 바삭함이 생겼으니, 이거 딱 그 맛인데? 길쭉한 짱구 과자맛 말이야. 왜냐면 과자 츄러스는 많은 사람에게 판매될 것을 초점 맞춰서 대량 생산과 유통에 수월하게 만들어졌고 놀이동산의 츄러스는 유통을 위해서가 아닌 즉석에서 맛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깐. 그렇다면 과연 놀이동산에서 먹었던 츄러스와 과자 츄러스 중에서 무엇이 더 우월할까? 당연히 과자 츄러스가 놀이공원에 파는 츄러스의 복사본이기에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식감과 맛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는 놀이공원에 파는 츄러스가, 휴대성과 가격과 유통성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에게는 과자 츄러스가 더 우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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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질 들뢰즈 역시 서양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원본인 이데아와 그보다 질낮은 복제품들의 서열 대신 복제품에 대한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층위 따윈 없다고 했다. 그러니깐 장원영 병에 걸린 여자와 차은우 병에 걸린 남자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흉내내봤자 장원영 복제품, 차은우 복제품이 아닌 약간의 공통점만 있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위 여자들끼리 서로 견제하기 위하여 “그애가 내 옷차림, 내 헤어스타일 따라했다!“라며 자신의 고유성과 우월함을 강조하지만 질 들뢰즈에 따르면 약간의 공통점만 있을 뿐 명백한 차이점이 있기에 개성있는 객체라고 한다. 그러기에 과자 츄러스든, 놀이동산에 파는 츄러스든 무엇이 원조다, 무엇이 더 원본이다, 라고 따지지 말고 좋아하는 것을 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츄러스가 아닌 다른 것을 대입시켜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리얼돌, 합법화된 여성형 리얼돌 역시 여자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지만 진짜 여자보다 우수한 리얼돌만의 장점이 있다. 언제나 화장한 상태라는 거, 영원한 젊은의 상태라는 거, 거기다가 이상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리얼돌은 성관계에 있어서 거부와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 원할 때 언제든지 섹스할 수 있고 질린다면 언제든지 버려도 된다는 소리다.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본딴 인형이라며 리얼돌에 있어서 치를 떨지만... 착각하지 말아라. 리얼돌은 리얼돌이고 여자는 여자다. 마치 남자의 모습을 본땄지만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판타지로 채워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별개의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 남자보다 창작물 속의 남자를 여자들이 더 사랑하잖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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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더 많이 선택될 자신들의 복사본에 대한 출현에 있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감이 있다. 그러니깐 ‘모든 인간은 위대하다'라는 드높은 인권에 비하여 사람의 장점을 대체할 대체품들이 너무도 많이, 그리고 빠르게 탄생하고 있다는 것에 우린 너무 둔감하다. 실제 섹스 로봇이 나온다면 사람 안만난다며 눈에 불을 켜는 사람들이 있잖아. 회사 역시 지금 당장은 사람을 쓰고 있지만 사람보다 전문성이 뛰어난 비인간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바꿀 마음이 있어 보이고 말이지. 그리고 이미 생산직 부분은 자동화 로봇으로 인하여 사람보다는 로봇이 더 많은 노동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즉 인간 직원을 택함으로서 오는 장점보다 기계 직원을 택함으로서 오는’꾸준한 노동력이 우위이고, 회사는 인간의 위대함보다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더 선호한다.



  인권, 인간성 그게 뭐라고. 인간 그 자체를 장점으로 삼아주는 곳, 대체품보다 인간을 높이 평가해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는 걸. 그나마 인간다움, 인간스러움을 높게 평가해주는 분야는 당장 예술분야 밖에 없는데 그 분야도 비인간인 AI가 천천히, 야금야금 먹고 있지 않은가. 과거 나 같은 경우 역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웹소설 출판사 책표지 디자이너와 티격 태격한 적이 있다. 아니 소설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책 표지를 시안으로 자꾸 보내주잖아. 허나 지금은 AI를 통하여 충돌없이, 문제없이 작업을 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인간만이 가진 ‘인간성, 인간과의 수월한 소통’도 장점이지만 그것이 ‘전문성’을 대체할 정도로 좋은 기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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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람을 도구로 봐서는 안된다고 표면적으로는 말하지만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친애적인 관계보다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비즈니적인 관계가 더 많다. 당장 군대만 보더라도, 회사와 학교를 보더라도 비즈니스적인 관계, 전문성과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던가. 아무리 인간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일을 엉망으로 하는 직원이라면, 전문성이 한없이 뒤쳐지는 직원이라면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절대 엮일 수가 없다. 단순 친구로서는 좋겠지만 직원으로서는 영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비즈니스적인 관계에서 가장 미덕으로 삼는 ‘전문성’을 가진 비인간이 나타난다면? 사람은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상사인 내 말을 잘 알아듣고 일처리하는 로봇이 나타난다면? 우린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들이 고객 상담도 하고 있거든.
 



  간혹 난 필요성에 얶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 또는 그러한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사회의 역군으로서 활동하지도 않고,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정규 수업 과정을 탈출하여 자유롭게 자기 꼴리듯이 사는 모습을 말이지. 그러나 그런 사람을 비즈니스 관계로 맺어줄 곳이 아무도 없을테니 외로운 것도 있지만 굶어 죽겠지. 단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겨주는 곳은 당연히 없을테고 모든 인간은 필요성에 의해서만 판단할테니깐. 당장 나같은 경우에도 세상 사람을 필요성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사람이 아닌 필요성의 끝판왕이 짜잔하고 등장한다면 사람을 찾지 않을테고 인간의 위대함은 저절로 바닥을 다지다 못해 땅 끝까지 파묻히겠지. 그대는 마음의 준비가 됐는가? 사람들이 당신이 아니라 인간도 아닌 것을 더 선호하고 사랑한다는 현실을 말이다. 사실 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피가 흐르지 않지만 완벽한 그것을 선택하고 더 사랑할 준비를 말이지. 어차피 우린 모두 사전 연습했잖아. 어디 눈에 보이지 않은 신과 나타나지도 않을 완벽한 나의 연인, 그런 것들을 혼자 상상하며 사랑해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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