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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팬픽] 시차

팬질

by @blog 2023. 11. 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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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것 같아. 그림을 지나가는 풍경으로 취급하지 않고 10분 넘게 보고 있는 저 사람을. 호기심이 너무 많아 그림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의심하고 경계하는 저 남자를. 그의 뒷모습을 한땀한땀 시선으로 더듬고 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고, 우아하게 끝이 올라간 눈매에 격동이라는 문이 열리면서 내 머리 속은 뒤집히다 못해 엉망이 됐다. 도망쳐야 해.
 
 

 

야 오랜만이다.
...
잘 지냈냐?

 
 

 
 

  지딴에는 반갑다고 인사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날카로운 비수가 있었다. 잘 지냈냐 씹새야? 세상 참 좁지 씹것아. 차라리 그렇게 말했다면 편했을텐데 예의바른 인사에 괜히 겁이났고 4층에서 3층, 3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도망쳤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시시한 상대를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백프로 내가 질 게 뻔하기에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거다. 하지만 큰 키와 어울리는 긴다리로 겅중겅중 걷더니 내 걸음을 따라잡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너. 더이상 도망치면 가만 안둔다는 경고를 알기에 난 걸음을 멈추었다. 
 
 
 

잘 지냈냐고 내가 묻잖아.
어. 잘 지냈지.
잘 지낸다고 하면 안돼지.
왜. 나는 잘 지내면 안돼?
 

 
 
 
  그는 내 대답에 제대로 화났는지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고 난 생존본능에 따라 그의 눈을 피했다. 칼이거든. 독이 묻은 칼이 아닌 독이 베어든 칼 말이다.
 
 

  
잘 지내면 안돼지. 넌 양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니깐.
난 너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없다면 넌 양심에 문제있는거야.
뭐가.
연애한지 하루만에 헤어지자고 말하는 사람,  그게 정상이냐?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온 미술관, 그것도 미술관 중에서 가장 조용한 공간인 미술관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업보는 언젠가 마무리 지어야만 했고 내 앞의 그 남자 역시 업보를 받을 차례가 됐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니깐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이지만 지고싶은 마음 역시 없기에 얼굴을 빳빳히 들고 대들었다.
 

 
 

 
야. 난 하루만 연애한 게 아니야. 4년동안 연애한거야.
 
 
 
 
 
 

*
 
 

 

 



 






 
  너와 나의 계산식이 뭔가 다르나보다. 그래. 연애라고 정의 내리는 시간이 각자 달라서 그러겠지. 내 기준으로 분명 너와 내가 사귄 기간은 4년이거든. 그러니깐... 너의 작은 취향부터 잠자리까지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고 다녔던 여자와 사귄 너를 지켜본 내 시간 2년, 그 여자 때문에 지독한 회의주의자가 되어버린 너의 곁에서 함께한 내 시간 2년. 신입생들 사이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졸업생을 앞두고 있는 시간까지 진행됐던 내 눈물겨운 외사랑에 넌 감동해야 맞는 거야. 하지만 넌 별로 감동하지 않더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쳐먹었던 것 같아.
 
 
 



 
다 끝났어?
응. 오래 기다렸어?
아니. 얼마 안 기다렸어.
 
 
 

 
 
  그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기말고사가 끝나고 중앙도서관에서 그를 기다렸던 초겨울 날, 샀을 때만 해도 뜨거웠는데 너무 오래 들고 있어서 차가워진 카페라떼를 건네주던 때였다. 왜이리 늦게까지 공부하냐고, 시험도 끝나는데 좀 놀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지. 요즘 꽂히는 작가가 생겨서 그 사람책만 읽는다고. 하나에 꽂히면 그걸 다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지만 이제 이것도 그만두고 취업 준비해야겠다는 푸념을 했지만 솔직히 그의 말은 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입김과 대비되는 그의 붉은 입술, 내 가슴속 뿌리 깊게 자리잡은 너의 입지,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입장만 뚜렷하게 기억났을 뿐.
 
 
 
 
 

 
그래서 나 취업스터디 하려고.
스터디?
따지고 보면 우리 이제 졸업생이잖아. 준비해야지.
그렇지. 누구랑 할껀데?
동아리 누나. 후원 팍팍 해준데.
오. 너 많이 아낀다는 그 분?
응. 완전 잘 해준데. 자기만 믿으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다나.
 
 



 
 
 
 
 

 
 
 
 



  잔뜩 들뜬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뛰었다. 왜냐하면 때가 됐거든. 동아리 누나라는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과 어떤 특별한 관계가 생기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야할 것만 같았거든. 나도 안다. 사람에게는 각자 분수가 있고 그 분수를 넘는 사람은 불행해지는 것을. 특히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나는 항상 지는 쪽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얼굴선과 날카로운 눈매를 모두 가진 중성적인 얼굴. 그리고 너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습관들과 너를 감싸는 아우라. 그런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기에 용감해진 나는 감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저기 있잖아.
응?

이제 우리 관계...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무엇을?
너와 나 사이.
...
그러니깐 졸업한 후에도... 그리고 앞으로 계속 만날 수 있는 사이였으면 좋겠어.
그야 당연히 우린
좋아해.




 

  방금 전까지만해도 따뜻하던 분위기가 내 말 한마디에 급속도로 굳어버렸고 그의 동공은 그 어느때보다 커졌다. 오랜시간동안 내그 친절하게 대해준 이유, 수업이 없는 날에도 도서관 앞에서 기다려 준 이유, 카페라떼를 건네준 목적과 의도를 뒤늦게서야 눈치챈 그. 그리고 난 유난히 커진 그의 눈 속에 숨은 마음을 읽어보려고 했고 부디 그 안에 내가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보이는 것은 소문 때문에 너를 음흉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작은 이야기에도 크게 흔들렸던 시간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그녀와의 기억과 상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난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미안해.
...
너가 절대 싫어서가 아니야. 다만 아직은 누굴 만날 처지가 안되서 그래.
...
아직은... 미안. 정말 미안해.
 
 
 
 
 


 
  차이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그는 계속해서 사과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그의 모습에 다정하고도 따뜻한 사람이라 는 것을 다시한번 깨우쳤다. 그리고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으로 나보다 높이 있는 그 어깨를 토닥토닥, 등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이해해. 각자마다 생각이 다르고 타이밍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이 위대한 거다. 태어난 시간조차 다른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깐. 그러기에 같은 공간에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않다고 해서 그는 죄책감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난 반드시 그와 내가 같은 감정을 가지는 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있었다. 왜냐하면 정말 자신있거든. 언제든지 기다리고 사랑할 수 있거든. 그가 가지고 있는 의심과 불신, 다른 사람보다 농도 짙은 경계심을 관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니깐.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엄청난 만용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멍청했다던가.
 
 
 
 
 

 
*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난 참 순진했어. 약간 미련한것 같아 보이고.
왜.
그냥 눈치채고 단념했어야 했어. 널 좋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좋아. 직설적으로 말할게. 넌 날 가지고 놀았어.
무슨 소리야?
남녀 사이에는 연인으로 넘어가는 평균적인 시간이 있는거야. 그런데 너는 그 시간이 유난히도 길었어. 마치 날 가지고 논 것 같은 망상이 들 정도로 말이야.
알잖아. 그때는...
알아. 전여친 때문에 상처 받아서 함부로 시작할 수 없었다는 거. 그런 너를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나는 무식하게 기다린거야 거야. 마치 침흘리고 밥 시간 기다리는 개새끼처럼.
그래서 어쩌자고. 그때를 후회한다는 거야?
응.
...
그때의 널 좋아했던 걸 정말 후회해.
 
 
 


 
  그 순간 그는 모르는 사람에게 기습적으로 칼에 찔린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아파하는 표정을 지었다. 몰랐니? 나 역시 품안에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단다. 과거 그의 대답 하나에 목매던 불쌍한 사람에서 반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자 내 스스로 멋져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달라졌다. 과거 이별 하나 가지고 몇년동안 아파하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바로 반격했고, 자기도 후회한다고, 마음을 열지도 말고 시작도 하지 말아야할 애를 사람 취급해줬다고, 대학교 cc했던 그 미친년이나 나나 인간 폭탄이고 그런 폭탄을 피하기 위해 신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되지도 않는 충고까지 했으니
 



 
 
 





 
너 어디가서 연애하지 말아라.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뭐?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넌 다른 사람 상처만 주는 사람이니깐.
니가 뭔데 날 판단이야?
당연히 알지. 너의 애절한 고백까지 받은 남자인데.

 
 
 

저기 총각? 아가씨?
?
좀 지나가도 괜찮을까?
  
 
 
 

 


  우리 둘의 감정의 골이 최고조로 깊어졌을 때 한 백발의 노인분이 말을 거셨고 그제야 우리 때문에 윗층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의 행렬을 보게 되었다. 어디 가을 패키지 여행을 오신 건지, 아니면 양로원에서 단체 소풍이라도 오셨는지 머리가 백발이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 뒤로 한가득 있으셨다.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길을 비켜주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셨고 조금이라도 걷기 편하시라고 우린 그림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우리를 무슨 미술품으로 착각하셧는지 하나 둘씩 감상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한창 좋을 때다. 행복할 때다. 제일 행복할 때다. 저때가 가장 기억에 남지.
 
  아니에요. 저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요. 제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대학교 졸업식이었어요. 졸업식 꽃다발 냄새가 베어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우리 진짜 사귀는 거 맞냐는 질문에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묘한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도 난 좋아서 날뛰었지. 한단계 나아갔으니깐. 완벽한 거절에서 모호함으로 발전하는 단계가 됐으니깐. 하지만 졸업식에서 받은 꽃다발을 잊어버린 채 빈손으로 지하철을 타던 그 순간, 뒤늦게 찾아온 사소한 의심이 이별을 촉발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냥...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헤어져야겠다 생각이 들더라.
...
내가 목빠지게 기다리던 시작이 이렇게 밍숭생숭 했던가.
...
남들이 다하는 불타는 사랑의 단계로 가려면 얼마나 노력해야할까. 그리고 언제까지 너의 허락만 기다리는 입장이 되야 할까.
...
너는 너무 무겁고 단단해. 오래 잡기 힘든 사람이야.
...
아니면 나한테만 그랬던 거니?
 
 
 



  내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진짜 그림인것처럼 벽에 찰싹 붙어있을 뿐 아무말도, 아무 대답도, 그리고 내게 시선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있는 쪽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을 뿐이다.






*




 


  손해가 큰 건 사실이다. 하루를 얻고자 4년을 바쳤으니깐.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진실되게 사랑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어쩌면 난 어장관리 당한 것일 수도 있고, 언제든지 더 좋은 사람으로 넘어가기 위한 환승역 취급 받은 것일 수도 있으며, 연애 대상으로 전혀 고려가 되지 않는 심심풀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실되게 사랑했으니깐 그걸로 됐다. 그리고 앞으로도 난 다른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방법 밖에 모르는 사랑의 천재가 되는거지. 그리고 사랑의 천재답게 애프터 서비스 역시 확실했는데 그에 대한 감정,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아. 뭔가 까부듯 장난끼 많아보이는 성격도 좋고, 그와 상반되는 신중한 성격도 좋고, 아닌 척 하지만 외로움 잘타는 성격도 좋고, 이목구비 그냥 다 좋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뭐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딱 한잔 사줄 수 있는 좋아함이랄까.




 
 






  미술관을 나온 우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음에 만나자, 잘지내라,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떨어지듯 걸었지만 뭔가 미묘하게 다가왔고, 다시 가까워진다 싶으면 또 떨어지듯 걷는 것이 마치 지구 주변을 당연하게 도는 달처럼 규칙적인 운동이자 본능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옛날처럼 너가 마실 커피를 사와 건네주었고 너는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았고, 또 나는 그걸 당연하게 좋아했다. 마치 나의 본질처럼.
 
 
 

 
 

아 미안. 너 아메리카노 못 마시지.
...
거기 가만히 있어. 카페라떼 사가지고 올께.
됐어.
?
이제 아메리카노 잘마셔.
진짜?
진짜.
와. 변했네.
변했지. 언제적일인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아메리카노 없이 못사는 사람처럼 가볍게 들이켰고 우린 걸을 때마다 낙엽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미술관 옆 공원길을 걸었다. 그때와 같은 초겨울이었는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더이상 안절부절하지 않는다는 점? 그래. 그냥 이런 평범한 산책이 좋아.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찾은 느낌이니깐.

 
 
 


그런데 있잖아. 너 나한테 카페라떼 줬을때 혹시 아이스로 줬어?
뭐? 언제?
그때. 기말고사 끝나고.
아. 그때?
응.
당연히 뜨거운 걸로 샀지.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그냥 생각이 나서.
...
갑자기 생각나서.
 
 
 
 
 
 
 
 
 
 
 
 
 
 

 
 
 

+

 

 
 
 

 
  
  뭐랄까. 사랑의 진행속도가 느린 남자와 진행속도가 빠른 여자,
매우 신중한 남자와 본능에 이끌려서 사랑을 시작하는 여자,
그렇게 어긋나버린 사랑의 시간차이에 관해서 한번 써보고 싶었다.

 


내 생각으로 사랑의 속도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거나
아니면 한쪽이 그 속도에 맞춰 주는 수 밖에 없는데,
후자는 오래 이어진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위의 남녀 같은 경우에도 결국 이어지지 못한 것이
자꾸 사랑의 시간이 어긋나서 그런거다.
그 사람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랑의 흐름 속도가 다르기에,
그러니깐 사랑만 가지고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지.
 
 
 
+
 
 
 
 
김남준의 사랑의 속도는 매우 신중하고 느릴 것 같단 말이지.
 
물론 추측이다.
 
 
 
 
+
 
 
 
 
오랜만에 쓰고 싶은 주제와 쓰고싶은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역시
섹시원탑
큐티원탑
존잘원탑
예술원탑
뮤즈원탑
랩남준
넌 만인의 멋진 뮤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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