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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더 많이 세련된 피노키오 이야기 (bts - 피땀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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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명작이다보니
유튜브에 보면 그에 대한 극찬과 감상평과 평론이 많은데
그 중 꼭 끼어있는 짜증나는 평론,
유바바의 목욕탕에서 일하는 치히로의 이야기는 
부모님 때문에 성매매 업소에 일하는 여자 이야기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평론이 있다.
 
 
 
 
 
물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자유고 
나 역시 통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작품 속에 터널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자의 성기인 질 같고,
설국열차에서는 기차가 남근이라는 인터뷰에 말이 많은 것처럼
어떤 작품을 굳이 성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평론 자체의 품격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한데
당장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평론으로 예시를 든다면
부모님을 구하기 위하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소녀 이야기
vs
이름을 잃어버리게 하고 인간을 수단화를 하려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는 이야기,
이런 두 개의 평론이 있다면 어떤 평론이 더 기품있겠는가?
기품있는 옷 중에 성적매력을 풍기는 옷이 있는가?
 
 
 
 
 
그러니깐 평론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팬이
연예인을 너무 좋아해서 2차 창작을 하는 것과 같은 영역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감정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끝내기 아쉬워서 
다른 영역인 그림, 소설, 그리고 만화로 그리는 것처럼
평론 역시 감성의 영역인 작품을 이성의 영역으로 끌고와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딥페이크 야동을 만들어 팬질을 하네?
성인 만화 그림체로 2차 창작을 하고 있네?
이처럼 뭔가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는 평론이 아닌 성적인 눈으로만 해석하는 거,
특히 여자를 두고 자꾸 성적 요소로 해석하는 평론은 좋은 평론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역시 문맥과 뜬금없이 "여고생 젖가슴, 어머니의 젖내음, 첫사랑의 봉긋한 음부"거리는
소설에 여자들이 감상에 젖어 환호하기보다는 극렬하게 혐오하는 것도 
여자라는 대상을 높게 평가해주는 것이 아닌 성적대상으로만 봐서 빡쳐서 그렇다.
 
 
 


 
첫번째로 좋은 평론이란 깊이와 품격있는 평론이라고 했다면
두번째로 좋은 평론은 새로운 해석을 가진 평론이다.
이미 과거에 좋다고 해석된 평론을 또다시 우려먹는다면,
아 물론 그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지 못한 평론가는 대답잘하는 언어프로그램 챗 gpt 만도 못한다.
복제품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가오가 상해하는 게 예술가인 것처럼
평론가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해석이 아닌
이미 나와 있는 해석을 또다시 이용하고 이용한다면 가오 상해야 한다. 
만화계의 대선배가 둘리의 김수정 작가에게 일본 만화를 베낀게 아니냐고 떠보았을때
베낄 바에 만화가 때려치겠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만의 독창성이 없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에 가오가 상해야 한다.
 
 
 



 
 
그래서 난 이미 방탄소년단의 피땀눈물 뮤비는 데미안 소설을 모티브로 했다는
기존에 있던 흔하디 흔한 평론 대신에 나만의 해석을 가지고 평론글을 써보려고 하는데,
물론 누가 보면 남들이 하는거 반대로 하는 홍대병처럼 보이겠지만
오직 <데미안>으로만 해석되는 저 뮤비의 가능성을 나는 좀 더 드높혀주고 싶다.
무엇보다 "유우명한 월드스타 방탄소년단의 뮤비는 데미안의 소설이 모티브다!
그러니깐 데미안 좀 싸게싸게 사쇼! BTS bring me here ♥"
라며 홍보하며 짭짤한 수익을 올렸던 출판업자들에게
피노키오도 잘 팔리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말이지.
 
 
 






 
 
 
그런데 사실 데미안이든 피노키오든 아주 큰 맥락으로 보면 줄거리도 비슷비슷,
결말도 비슷비슷한 구석이 많다.
 
 
별볼일 없던 나
-> 새로운 무언가를 알려주는 데미안을 만남
-> 그러나 데미안 사라지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 다함
-> 다시 데미안과 다시 만나고 에바부인과 데미안의 키스
-> 새로운 존재로 탄생.
  
 
 
 
해봤자 꼭두각시 인형인 피노키오
-> 사람이 가져야하는 양심을 알려주는 귀뚜라미 만남
-> 그런데 온갖 역경이라는 역경은 다 겪음
-> 푸른 요정(천사)의 키스를 받음
->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탄생. 
 
 

피땀 눈물의 첫부분에 정국이 줄이 매달린 그네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모습,
안대에 가려지고 끈에 묶여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지민의 모습은
모두 끈에 묶여서 더 나아갈 수도 없는 피노키오,
타인의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모습은 처음부터 매우 위태로워보이고 한편으로 보면 불싼해보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꼭두각시의 삶,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생, 꼭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니다.
왜냐면 창조주 혹은 남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책임감이 필요없고 무엇보다 선과 악의 구분할 필요가 전혀 필요없으니깐.
그래. 형법 제9조(형사미성년자) "14세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법이 있는 이유도 어린아이는 아직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이에 대한 배려로 생긴법 아니겠는가.
이처럼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약자 = 무지한 자 =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자
= 그러기에 돌봐주어야 하는 자 = 즉 꼭두각시다
 


 
 
많은 사람이 어른이 될 때 제일 싫어하는 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선악을 구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치르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린시절이 그렇게 행복했던 이유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던 유일한 떄라서 그렇고 말이지.
어린 아이가 해야하는 일은 그저 건강하게 자라면 되는 것 뿐,
그저 하루를 즐겁게 보내면 되는 것 뿐,
월 얼마를 벌고 누구와 결혼을 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야하는지는 그 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어린시절 꼭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꼭두각시들이, 그리고 어른이 하라는 대로 행동 하던 소년들은
본능적으로 선악의 개념을 찾기 시작했고
뮤직비디오 첫장면인 진이 멍하는 보는 그림 역시
선과 악의 대립을 보여주는 피터 브뤼겔의 <반역 천사의 추락> 그림, 
게다가 그가 서있는 바닥은 흑과 백의 타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의 곁에는 흰색문과 검은색 문 있다. 
 즉 선과 악을 구분하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초록색은
선과 악을 찾는 여행, 즉 피노키오의 여행에 달라붙어 양심이라는 감정을 알려주었던
메뚜기를 상징한다.
초록색 연기를 마시고, 초록색 액체를 마시고,
식탁 위에는 양심이라는 감정을 알려주는 선악과를 올려두며 만찬을 즐기는 소년들.
자, 먹고 마시자. 이제부터 우리도 어른이 되어보자고.
물론 선악의 차이점을 알게 되면 죄책감과 양심이라는 후유증에 평생 사로잡혀
어린시절처럼 행복하지 않겠지만, 우리 한번 해보자.
판도라는 재앙을 가져다주는 상자를 열라고 태어났고
아담과 이브 역시 선악과를 먹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처럼
소년은 그렇게 좀 더 높이 성장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선악의 구분을 탐하게 된다.
아담을 유혹했던 이브가 선악과에 유혹 당한것처럼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매혹 당하는 거거든.
 
 
 
 

 
 



그래서 결국 파란 요정(또는 천사)의 키스를 받아 꼭두각시에서 소년이 된 피노키오처럼
진은 천사 모양의 조각상에게 키스를 함으로서 
소년이었던 방탄소년단의 눈에는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초록빛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날개 달린 그 모든 것에는 선과 악 단 하나의 모습 밖에 가질 수 없지만,
날개 달린 모든 것은 천사 아니면 악마처럼 선악이 명백히 존재밖에 없지만
 이 소년들에게는 날개가 없어요.
이카루스처럼 날개가 꺾인 건지, 아니면 뽑힌건지 몰라도 날개를 가질 수가 없어요.
 
 
 
 
 
 왜냐면 그들은 앞서말한 날개를 가진 존재들, 천사 아니면 악마처럼 이분화가 되지 못하고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절대적인 존재,
선과 악을 모두 긍정하는 신, 혹은 위버멘쉬가 되서 그렇거든.




고로 피땀눈물 뮤비는 꼭두각시에서 실제 인간 소년으로 진화한 피노키오처럼
소년에서 더 너머 무언가가 되어버린 소년 이야기,
선악의 구분을 모르던 어린시절에서 벗어나 양심을 알고 평생 괴로워 할지 몰라도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매료당해버린 자,
그야말로 인간의 일생을 압축하는 뮤비일 수도 있다.








아쉽게도 한번 선악을 구분하게 된다면 다시 선악의 개념이 흐릿했던 시절로 돌아갈수가 없게 된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모르고
어른은 어린아이였을 때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 맛 본 황홀한 선악과의 맛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지는 몰라도
우리의 마음의 나이는 늘 아이에서 성인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그 시점인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머물러 있다.
지금의 나이를 사랑하지 않고 지금의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며,
오직 그때만을 영원히 그리워하게 된다.
천국에서 평생 지내고 싶은 그 나이대를 상상하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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