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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대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었나 (에반게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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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고등어 백반좌라고 아는 사람?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인터넷에 쳐보지 않기를 나 권장 드린다.
왜냐하면 온갖 절절한 감정이 흘러 나오는 글을 보면 여간 기분이 좋지 않거든.
그러니깐 감정이란 감정은 다 들어가고 자기 연민이란 연민은 다 들어가며,
아주머니들이 아이구 아이구 하며
박수치게 만드는 주말 드라마처럼
그 글을 보고 나면 필자의 감정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분이 좋지않다.







그래도 고등어 백반좌가 썼던 글이 궁금하다면
대략 고등어 백반좌가 썼던 글의 원인과 내용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당시 연예인 설리의 사망 소식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추모의 물결이 커졌는데
어디서나 진실된 사람, 가슴에 있는 말을 아주 솔직히 이야기 하는 사람이
설리의 죽음이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말을 하게 되었고
바로 그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절정을 표현하는 글,
”설리가 죽은 것보다 건설현장에 일하면서
고등어 백반 먹다가 입천장 까진 내가 백배 불쌍하다“라는
글이 나온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어 백반좌의 감정 호소에
“지는 추모자의 감정에 공감 안해놓고서는 지 감정에는 공감해달라네.“라며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몇몇은 그의 발언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박수를 쳤으니,
하긴 뭐만하면 경쟁부터 해야하는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의 위에 있어야지만 가치가 증명되고 존중해주는 사회에서
우리는 몰락하고 사라져버린 존재에 대한 추모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깐.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 특유의 냉소적인 문화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증폭되고
이태원 참사는 물론 무안항공에서 벌어진 제주항공 참사때 역시
유가족들의 슬픔에 소위 말하는 ”알빠노“를 외치면서
그것을 단순 번잡스러운 감정으로 취급하는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자신은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는 자신을 우월한 사람이자,
그러면서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반발이 아닌 추앙해주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
여러모로 참 꼴값이지만 여러모로 참 많다.







물론 그렇긴 해도 나 역시 저런 꼴값 떠는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착한 사람,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해주고 함께 우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말도 안되게 솔직한 그들과 달리 적당히 숙연해하는 척하고 적당히 분위기 파악을 하며,
그 분위기에 동화 되도록 온갖 최선을 다하고 눈치 잘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있지, 요즘들어 그 추모 분위기가 살벌해지다 못해 무서워지는게
적당히 추모하는 거 가지고는 ‘연기하는 척 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오히려 크게 욕을 먹기 쉽다는 것이다.
진짜 유족의 마음 자체를 느끼지 않으면 다 가짜라며 손가락질 하고 있다니깐?






“평소에는 개인전으로 경쟁하세요, 그런데 어떠한 상황에는 단체전 할테니깐요, 아시겠죠?”
처럼 우리는 개인전은 물론 단체전 역시 모두 잘해야 하는 사람이되야하고 있으니,
이 사회가 언제 타인의 고통에 슬퍼할 기회를 주었나?
이 사회가 언제 타인의 심정에 공감을 할 기회를 주었나?
추모할 시간을 주었나, 생각할 시간을 주었나,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가지도록 허락해주었나.
온갖 오버테크놀로지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도
타인과 마음이 동화될 수 있는 액체 상태가 되면 원래대로 돌아오기 힘든데
현실에서 그것을 바로 해보라고 한다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데.








에반게리온? 그게 도대체 뭔데 씹덕아,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에반게리온은 외로움에 대한 하나의 멋진 시처럼 은유적이고 기발한 표현이 많은 명작, 대작, 그리고 좋은 작품이다.
그 중 at필드와 lcl 용액에 관한 이론은 에반게리온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끄는 관념인데
에반게리온에서 사람이란 at필드라는 마음의 벽과 lcl 용액이라는 창조주의 피,
그리고 영혼이 섞인 존재라고 한다.
at필드 + lcl 용액 + 영혼 = 인간.
하지만 어떤 특수한 사건이 발생하면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
자신을 이루는 고유한 육체는 사라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영혼이 노출되는 lcl 용액 상태가 된다.
그 상태가 되면 인간이라면 늘상 느끼던 외로움, 고립감이 희미해지게 되고
원래 하나의 생물체여야 했던 인간은  타인을 그분짓지만 자신도 괴롭히는 at필드에서 해방되면서
마음의 편안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인류보안계획이 바로
인간을 모두 LCL 상태로 만들어 영혼을 해방시킨 후
영혼이 한대 모여 있었던 검은달로 되돌리는 것, 불안정하게 탄생했던 모습이 아닌
원래 하나였던 영혼을 하나로 뭉치는 프로젝트가 바로 인류 보완계획이다. 
 
 
 
 

사실 에반게리온의 세계관 외에도 감정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초월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작품은 매우 많다.
에반게리온의 모티브가 되었던 애니메이션, <전설거신 이데온>.
생각과 의지를 공유할 수 있는 액체, 생명의 물이 등장하는 <꼭두각시 서커스>.
문학 작품으로는 너무나도 유명한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게임에서도 있지 않은가. 시드마이어 알파센타우리의 엔딩은
사람은 물론 행성과도 하나의 생각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때? 딱 우리가 필요한 기술 아닌가? 내 고통을 타인에게 줄 수 있고 나역시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는 것.
더이상 상대방이 예민하게 보이지도 않고 나 역시 매번 선을 넘지마라는 충고도 하지 않으며,
섭섭함도 느끼지 않고, 서운함도 느끼지 않고,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더이상 없는 것,
얼마나 이상적이야?
자신이 느낀 감정 그 사소한 것까지 공유하는 비밀성 없는 여학생이나 여직원처럼,
잠자기 직전까지 통화하는 첫 연애의 커플들처럼 낭만적이지 않는가.
재대로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반게리온은 물론 정신적 통일을 말하는 작품들은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결국에는 과거와 같이 상대방의 생각을 오해하는 불안정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결말을 짓는다.
 이게 모두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는게 본능인 것처럼
타인의 마음에 공감 못하는 것 역시 본능이라서 그렇다.
알지? 타인의 감정에 너무 함몰되어 버릴 때 우린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공감도 안되는 상대에게 억지로 공감 하려고 하는 것도 하나의 노동이다.






하물며 사람을 부품 대하듯 스펙 하나하나 따지며 경쟁시키고,
한국 젊은이들의 장점이 부지런함과 경쟁심이라고 추켜 세우는 이 사회에서
갑자기 없던 공감을 꺼내라는 것은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 변명 좀 하고 싶은 거 있디.
알빠노, 지팔지꼰, 업보크리, 라는 단어가 나오는 생기는 배경과 사회 분위기에서
당장이야 공감하는 척이라도 할 수는 있겠지.
별로 친하지 않은 회사 상사 부모의 장례식처럼, 상사의 결혼식처럼 정해진 감정에 대할 수 있겠지.
진짜 관심도 없는 여직원의 애완견이 똥싸고 애교부리는 영상에도 하하호호 웃는 척 할 수 있지.
그래. 공감의 천국인척 할 수 있지.
만약 이런 세계가 온다면 오직 사도를 물리치느라 어른들에게 도구 취급 당한 이카리 신지 역시
인류의 존폐를 결정되는 순간이 왔더라고 하더라도 인류 절멸을 절대 택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엔드오브에반게리온에서 결국 이카리 신지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것처럼
가깝지도 않은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본능이기 때문에 불가능,
그나마 타인의 슬픔에 공감해줄 수 있는 환경이 유지시키고 싶다면
우선 한국식 경쟁사회만큼은 좀 줄이고 나서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분명 앞으로도 참사의 속성을 가진 이런 사건사고들이 많을텐데,
유명 연예인의 비보와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형성될 날이 한번 더 올 것인데,
그때 역시 우리는 경쟁 사회에서는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성격,
그런 성격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연기를 해야하는 걸까?
앞서 말한 것처럼 할 수는 있다.
마음의 가면을 쓰고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경쟁사회와 더불어서 한 사람을 소시오패스로 만들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노자는 물을 통해 배우고 물처럼 살아가라고,
에반게리온의 lcl 용액처럼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며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게 좋다고 했다.
문제없이 순리대로. 꾸준하면서도 영원한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인간은 70프로가 물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공기 중에 오래 있으면 문제 없는데 물에 오래 있으면 피부가 녹으면서 결국은 죽는다.
아무리 인간의 70프로가 비이성적이고 납득 못하는 어떤 기분, 감, 분위기에 휩쓸리는 속성을 가졌다고해도
30프로인 이성적, 구분 능력, 논리적인, 공감 대신 분석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 사회가 자기 이득을 위하여 줏대를 꺾으려고 해도 꺾여지지 않는것이 이 30프로 덕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걱정인 것은 참사와 같은 사고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채우려는 사람,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다는 거다.
차라리 고등어 백반좌마냥 "남이 뭔 일 당하던 말던 내 인생 힘들다구우!"라고 하는 모습이
더 순진하고 착하게 보일 정도로 그들은 뼛속같이 모든 일을 이익적으로 생각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경쟁사회 + 공감을 강요하는 사회
= 소시오패스가 더 할 나위없이 나오기 좋은 환경이 이미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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