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굴욕감을 주고 싶었던 거다. 청수의 훈련방식이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변태적인 것은 후보생들에게 굴욕감을 목적으로 했고 예상대로 후보생들은 온 힘을 쥐어 짜며 그 감정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하지만 미성년자로 이루어진 후보생들이 특수부대를 능가하는 신체훈련을 치르는 것도 모자라 심해 명상까지 해야한다는 사실에 몸보다는 마음의 압박을, 게다가 급박하게 움직이는 후보생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게 긴장감을 주는 분위기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직 휴식시간이라고는 땀범벅이 된 몸 위로 잠수복을 입는데 주어지는 그 짧은 시간뿐이었고 그 순간에도 탈의실은 거친 숨소리와 앓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런 후보생들 사이에서 아까전부터 창백한 얼굴을 가지던 한 후보생이 몸을 비틀거리더니 결국 어지러움을 버티지 못하여 구토를 했고, 긴장감이라는 감정이 서로에게 전달 된 것처럼 매쓰꺼움이라는 감정 역시 모든 후보생들을 전염시키면서 탈의실은 헛구역질 소리와 역겨운 냄새로 가득찼다.
그러나 후보생 중 제일 체구가 작은 남자, 그리고 가장 앳되보이는 얼굴을 가진 37번 후보생은 주변 분위기에 동화되지 않고 1B형 잠수복을 누구보다 빠르게 입은 후 탈의실을 걸어 나왔다. 사실 37번 후보생 역시 매년 강도가 높아지는 신체 훈련 후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과 매쓰꺼움이 느꼈지만 매쓰꺼움을 참았던 다른 후보생들과 달리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있는 힘껏 쑤셔 넣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 그리고 그 위로 지나가는 투명이고 끈적한 액체. 액체가 턱 끝에 이슬처럼 맺을 때 쯤 37번은 희미했던 정신을 가다듬고 반쯤 기울어진 몸을 어거지로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처지를 연민할 시간도 없었고 동정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에 묻은 액체를 손등으로 닦고 가야할 곳으로 지체없이 향하는 37번. 그렇게 37번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처 덕분에, 교관들이 원하는 후보생의 자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일찍 집합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교관은 혼자 나와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37번.
네.
나머지 후보생들은 어디있어.
훈련 후유증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는 어떻게 왔지?
이런 일을 대비해서 훈련을 마치고 난 후 바로 속을 게워냈습니다.
후보생이 모여야하는 집합 장소는 03이라는 숫자가 크게 적힌 대형 게이트였고 그 게이트 너머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빛 한점 내려오지 않는 심해가 있었다. 물론 미륵보살돔 자체가 심해에 위치해 있는 비밀스러운 기관이지만 청수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학술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래, 심해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인지 후보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물론 교관들까지 심해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성격과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교관조차 재문이의 대답에 기특했는지 희미한 미소를, 심해 속에서 어쩌다가 보이는 심해동물의 흐릿한 광원 같은 감정을 보여주었고 재빠르게 그 감정을 캐치해내는 37번.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37번의 타고난 재능이자 저주였고 그것은 모든 것들의 위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기질, 왕좌위에 앉은 초인만이 가질 수 있는 선택받은 초석이었다.
다행히도 교관이 내비쳤던 감정은 좋은 감정이었고 그제야 안심이 된 37번은 곧바르던 자세를 풀고 숨을 돌렸다. 하지만 쉬는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탈진 현상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으니깐. 모든 것을 때려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학술원을 나와 지도자 후보생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버거움의 강도가 턱끝까지 차올랐고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죽을 수 있기에 재문이는 작은 관용을 구하고 싶었다. 특히 ISO 명상은 훈련 중에서도 죽음과 가장 밀접한 훈련이었기에 학술원 후보생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재문이조차 피하고 싶은 훈련이었다. 하지만 재문이도 그렇고 초최한 얼굴을 한 후보생들 그 누구도 집합장소에 오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운명, 훈련 받다 죽는 것이야 말로 이미 정해진 후보생들의 운명이었다.
하나같이 빠져가지고는.
그렇게 후보생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교관은 벽에 설치된 스위치를 내리면서 묵직한 쇠가 들추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게이트 너머에 있는 것은 높은 세로축과 넓은 가로축을 가진 칙칙한 회색 복도. 두꺼운 심해용 잠수복을 입은 후보생들이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복도 안으로 모두 들어가자 재빠르게 닫히는 게이트. 순간 느껴지는 적막감과 좋지않은 예감들. 후보생들은 그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 시뮬레이션 속에서는 혹독한 추위가 적용하지 않았기에, 얼어붙은 심해 밑바닥의 한기까지 고려해보지 않았기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 삐이이이이
그때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괴악한 버저음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고 복도 저 끝에서 찬 바람과 함께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후보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각오로 돌진하는 굶주린 짐승과도 같았으니, 수면수심이어라. 물의 모습을 한 괴물에 후보생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는데, 물론 모든 후보생들이 심해용 잠수복을 입고 있었고 거기에는 체온 조절 및 기압 조절 기능, 방향 전환 엔진제터까지 탑재되어 있었지만 스틱스 강물과도 같은 심해 바닷물에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생존 본능이었다. 그런데 그때 겁도 없이 후보생들을 헤쳐나가며 앞장 서서 걷는 37번. 재문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후보생들은 그가 시딩 프로젝트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생이었기에 다른 후보생들에게 귀감을 주기 위해서, 용기를 주기 위해서 앞장서는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반대였다. 가장 먼저 죽고 싶어서 앞장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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