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재문이 다른 후보생들보다 키가 작은 것은 유전적인 영향보다는 나이 차이, 특히 후보생보다 4살이나 일찍 학술원에 들어와 후보생이 된 이유가 더 컸다. 다들 그를 이뻐라할 수 밖에 없었다. 심해 깊숙한 비밀스러운 장소에 적응하지 못했던 소심한 아이를. 하지만 귀여움은 곧 두려움으로 변하였다. 천재들만이 모여있는 학술원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실력으로 무장한 그를. 소심한 성격은 알고보니 노년의 나이가 되어야 가질 수 있는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였고 누구에도 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기질은 첩보원 겸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술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성격이었다. 특히 콜드슬립 사건 이후 그러한 성격은 더욱 증폭되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성격이 되었으니, 사실 재문이 뿐만이 아니라 당시 13살이었던 학술원 후보생들의 성격이 뒤바뀔 만큼 어린 그들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93번.
...
93번.
사실 그 전부터 징조가 보였지만, 그러니깐 학술원의 훈련과 교육에서 조금씩 죽음의 기척이 묻어있었지만 재문이는 그것을 과소평가했다. 변성기가 오기도 전에 자동 권총 조립 방법, 사격 훈련, 신경독에 대한 대처법을 실전이 아닌 '단순 교육'으로만 생각했었으니깐. 하지만 냉동수면 후 천천히 해동 시켜도 강한 스트레스와 신체적 손상이 오는데 그것을 급속해동, 그것도 미성년자인 후보생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실시하였고 그 중 93번은 콜드슬립 캡슐이 열리자마자 추한 자세로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증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아이에게 다가와 손목과 목을 짚으며 맥박을 확인하는 교관.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숨죽이며 지켜보는 후보생들. 재문이에게 있어서 93번은 철없는 바보형, 매일 ‘한재귀대명사, 한재트슈트팩, 한재생에너지, 한재외동포를위한한국어강좌’ 와 같은 유치한 별명을 짓는 형이었지만 시끄러운 입은 영원히 닫혀버렸고 심장에는 서리를 담은 채로 눈을 감았다. 차가운 분위기가 감도는 학술원과 어울리는 차가운 죽음이었다.
회복 못할 신체적 손실을 당한 후보생은 93번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근력 테스트 커트라인에 들기 위하여 무리하게 힘을 주어 팔이 부러진 70번, 신경독 가스 훈련중 불량 방독면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쇼크사한 99번, 심해 명상 중 심해 동물의 공격을 받아 잠수복 손상으로 인하여 사고사 당한 102번. 학술원의 교육 방침은 학생의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다른 교육 방침들과 달리, 마치 작두처럼 학생이 범위내에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과감하게 칼날이 내려졌고 후보생들은 잘려 나갔다. 그만큼 학술원은 우정이라는 감정이 사치스러움으로 느껴질 정도로 긴장감의 연속인 곳이지만 훈련을 완벽하게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생들 모두 죽을 위기에 처했으니, 왜냐면 일본에서 시작된 거대한 지진 해일로 인하여 심해에 있는 시설들이 강타 당하여 극심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아...하아...
재문이는 혼돈에 빠져 있는 학술원을 나와 온힘을 다하여 비상 계단이 있는 곳으로 달렸고 일반적인 통로와 스케이프는 모두 막혀져 있었지만 비상 계단 만큼은 아직 닫혀지지 않을거란 희망의 끈을 놓지않았다. 하지만 재문이와 같은 생각을 한 후보생이 있었는지 그녀는 닫혀버린 비상 계단 입구 앞에 서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닫혀 있었다.
당연하지. 왜냐면 바닷물이 들어 올 수 있으니깐.
...
아니면 한창 대피 중인데 애새끼들까지 끼어들면 방해될 거 같아서 막아둔건가?
...
진짜 이 상황 너무 웃기지 않냐? 재문아?
씁쓸한 미소를 짓는 금발의 단발머리 여자는 왼쪽 가슴에 26번이라고 쓰여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그녀 역시 학술원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는 후보생 중 한명이자, 다른 후보생들보다 많이 어린 재문이를 예뻐라 했던 3인방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93번의 콜드슬립 사망 사건 이후 학술원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빨리 캐치하면서 돌봐줘야만 할 것 같은 어린 재문이를 짐이라고 여겼는지 의도적으로 그에게서 멀어졌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26번은 재문이에게 미약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재문이는 그녀를 미워하거나 앙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학술원이 무슨 화기애애한 유치원도 아니고 인간은 오직 자기 생존에 필사적인 것을 알기에 재문이는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26번은 물론 미륵보살돔 사람들까지 모두 이해했다. 그에 반해서 26번은 자기 살자고 비상 계단이며 스케이프까지 막아버린 미륵보살돔 사람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는지 재문이를 보고 쓴웃음만 지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죽을 때 되서야 말이나 걸고.
괜찮아.
살 날이 많았으면 그동안 못챙겨줬던거 다 챙겨줬을텐데.
왜 죽는다고 단정 짓는 거야. 아직 물도 안들어왔어.
뭔 물이 안들어와. 프론트 스테이션에 물 새는 거 내가 다 봤는데.
...
거기 잠수정들은 멀쩡하려나?
26번의 말대로 프론트 스테이션에는 심해 탐사 및 자원 확보를 위한 잠수정, 그리고 잠수복도 다소 구비되어 있었고 그제야 재문이는 이곳이 아닌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재문이 뿐만 아니라 교관과 교수들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학술원, 그 학술원의 후보생들 역시 생매장에서 탈출하는 있는 방법과 작전과 술책을 찾아다녔지만 들어가는것 만큼 빠져 나가는 것도 힘든 학술원이기에 방법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학술원은 아수라장, 시장통과 같이 시끄러운 곳이 되었고 재문이는 그들을 뚫고 나가 프론트 스테이션에으로 도착했다.
학술원과 작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소형돔 형태의 프론트 스테이션. 그곳은 26번의 말대로 천장에 물이 조금씩 세어 있었고 안그래도 온기가 없는 그곳은 차가운 물방울까지 떨어지면서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재문이의 등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프론트 스테이션의 추위가 아닌 잠수정에 걸려있는 프로토콜 패스워드, 그리고 산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소통들. 그때 재문이를 따라 프론트 스테이션에 도착한 26번은 달리느라 가빠진 목소리로 외쳤으니, 재문아! 제발 누나 말 좀 제발 들어라!
아까부터 말했잖아! 당연히 내가 확인해 봤지!
...
그런데 스파이놈들 때문에 프론트 스테이션 보안 강화했잖아. 기억 안나?
아 미친...
학술원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평가 받던 재문이었지만 급한 마음에 그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었고 뒤늦게서야 프론트 스테이션에 와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모두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고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던 스파이들 때문에, 비밀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었다.
청수는 국제기구인 UN과 블루 플래닛 피스에서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을 받을 정도로 극도의 비밀주의를 유지하는 기관이었고 특히 청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술원은 일루미나티의 본거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음모론의 중심지였다. 그럴수록 강화되는 보안. 그럴수록 커져가는 궁금증. 오죽하면 학술원의 비밀을 파헤쳐보겠다며 집단 지성이 발휘하는 모임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당연한거다. 호기심은 인간이 본능이기에 당연한거다. 죽음을 무릎써서라도 심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어둠 속으로 뻗어보는 목적지 없는 시선. 수수께끼 같은 소년에게 던지는 무의미한 질문. 학술원에 배후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스파이가 침입을 시도.
그러나 스파이는 단 몇시간만에 발각되었는데 스파이를 찾아낸 것은 교관도 아니고 보안 전문가도 아닌 어린시절부터 혹독한 지도자 및 첩보 교육을 받은 학술원 학생이었다. 결국 총격전까지 벌어진 끝에 한 명의 후보생이 사망, 스파이들은 잠수정을 이용한 탈출을 시도했으나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보안 터렛으로 인하여 얼굴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후 학술원의 보안이 더욱 강화되면서 후보생들은 가족들과 영상통화 및 통화하는 것조차 금지, 간단한 메세지도 모두 특수 과업 운영 감독관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또한 프론트 스테이션 역시 보안이 대폭 강화되어 잠수정은 3단계의 프로토콜 패스워드를 통과해야지만 사용이 가능, 잠수복에 있는 산소통 역시 후보생 교육 커리큘럼이 없는 날 외에는 산소를 채워두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방탄복 위에 방탄복, 또 방탄복을 입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내부의 적이 되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옥죄는 상황이 됐으니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죽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거네.
...
이대로 수장 당하는 게 이론상 맞는 거네.
재문이의 무거운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26번이 아닌 차가운 물방울 소리. 그리고 천장위에 매달린 부속품들이 떨어지면서 만드는 시끄러운 굉음들. 26번은 패닉에 빠진 재문이의 표정에 어린시절처럼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달래줘보려고 했지만 이제 그는 너무 컸다. 목젖이 뚜렷하게 보일정도로 확연하고 커져 버렸다. 그런 이상 속빈 위로는 더이상 통하지 않다는 것을 안 26번은 그가 좋아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답, 그리고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서 말해주었으니, 다 같이 되져버리는 거지 뭐.
정말 슬프네. 나 여기서 졸업하면 진짜 하고 싶은 거 많았는데.
...
잘생긴 연하남하고 햇빛 쫙 내리는 바닷가에서 달달하게 노는게 꿈이었는데.
...
재미없는 애들 사이에서 지옥 훈련이나 받고 가다니. 내 인생 너무 기구하다.
26번은 마치 재문이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의 시덥지 않은 말에 그는 대답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수많은 시뮬레이션들이 동시에 가동됐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결과만을 도출시켰으니, 턱끝까지 차오르는 물을 아둥바둥 피해보려다가 폐 깊숙한 곳까지 심해물이 차오르는 모습이었다.
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3 (0) | 2025.02.22 |
---|---|
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2 (0) | 2025.02.21 |
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프롤로그 (0) | 2025.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