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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마이어 비욘드어스 팬픽 / 내부의 적 - 2

에세이/단편소설, 팬픽

by @blog 2025. 2. 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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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덫으로 설치해 놓은 철조망에 온몸이 휘감긴 사슴이 있다고 하자. 철조망이 살을 파고 들어 그 모습이 고슴도치, 숫사자처럼 보이는 사슴이 있다고 치자. 사슴이 흘리는 피냄새에 늑대며 승냥이며 육식동물들이 추격했으나 기괴한 모습은 물론 날카로운 철조망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염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위계마저 바꿔버리는 그 사슴을 우리는 동물의 왕이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사슴이 얼마나 살아갈지,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조차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슴은 왕의 덕목을 함께하고 있기에, 절룩거리더라도 왕관의 무게를 아직은 버틸 수 있었기에 왕으로 대접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가르치는 학술원 역시 후보생들의 몸에 보안이라는 철조망을 휘감았고 재문이는 거울에 반사된 미세하고 푸른 빛을 보고 나서야 화장실에도 보안장치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후보생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보안장치가 설치됐지만 후보생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기록화를 통해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특히 고된 훈련으로 잔뜩 예민해지는 날에는 보안카메라가 변태처럼 느껴졌고 깊은 불쾌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개인 기숙사에 가두게 할 정도였다.



  그러니깐 따뜻한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지만 자신의 몸을 감싸는 따뜻함은 물의 온기가 아닌 의도가 담겨져 있는 사람의 손길이라는 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귓등으로부터 시작하여 목선과 등허리를 쓰다듬는 감각이 누군가의 의지라는 거. 저질도 이런 저질이 없겠지. 타자조차 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손을 가졌던 6살때부터 이제 막 목젖이 여물기 시작한 소년이 되어서도 훔쳐보는 집요함이라니. 물론 기숙사 안 쪽은 후보생의 사생활을 위하여 보안카메라가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건지. 다른 사람도 아닌 감정이라고는 엿보이지 않는 열길 물속 같은 그들을.
 


...



  밤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 결국 재문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전원을 켰다. 평소 불길한 생각을 하면 끝도 없이 파고 드는 성격이었기에 가슴 속 응어리를 반드시 풀어줘야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깐. 승화가 필요했고 결판을 지어야만 했다. 자신을 훔쳐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눈을 뽑아야 하고 자신에게 허락없는 손길을 뻗는자가 있으면 손가락을 부러트려야 한다. 처음 효율적인 탈출구를 찾지 못했을 땐 감기약을 한웅큼 억지로 집어 삼켜 몽롱한 기운에 잠들었지만 다행히도 이제는 최적의 경로를 찾았으니, 어두운 방안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일정 간격의 타자소리. 그리고 모니터 불빛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는 소년. 그러나 노트북 안에 벌어지는 일은 보안 전문가 몇명을 야근하게 만들 정도의 사건이었고 그 스트레소 해소법이 단체로 익사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당사자조차 예상 못했다.
 




 
 

누나.
 

 
천장에서 새는 물은 아까보다 더 잦아지고 굵어지면서 유니폼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다 젖어버린 37번. 그런 37번은 피차일반으로 다 젖어버린 26번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 잠수정을 열어 보는데 온 정신을 집중을 할거야.
어떻게?
잠수정 관리 부서가 심해 자원 탐색부 맞지?
 
 

  프론트 스테이션 한켠에는 잠수정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및 확보한 데이터를 분석 정리하기 편하도록 다수의 노트북가 구비되어 있었고 재문이는 가장 상태가 좋은 노트북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전원을 켰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재문이의 얼굴을 뒤덮었을때 재문이의 의도를 파악한 26번, 그제야 그녀의 얼굴도 재문이의 얼굴처럼 창백해졌다.

 
 




설마... 해킹을 하겠다는 소리야?
응.
퍼스널 컴퓨터를 뒤지겠다는 소리 맞지?
그래. 관리자 권한으로 들어갈거야.
와. 대박.
왜.
너 설마 평소에도 남의 퍼스널 컴퓨터에 막 들락날락 거려?
내가 그 사람들 사생활이 궁금한 줄 알아? 테스트로 몇번 해 본 것 뿐이야. 그리고 지금 유일한 방법이 그것 밖에 없지 않나?
...
어리고 잘생긴 남자애와 달달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텐데.

 


  천장에 떨어지는 물 때문에 재문이의 앞머리가 젖어 눈 앞까지 내려 앉았고 평소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전혀 다른 헝크러진 모습에, 그리고 퍼스널 컴퓨터를 해킹하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에 26번은 이질감과 동시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성공적인 결과를 위하여 과정의 윤리를 생략하는 태도는 소시오패스나 독재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 생각했지 4살이나 어린 동생이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깐. 하지만 지금은 모든 계약서의 무효가 성립되는 천재지변의 상황이었고 26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해킹을 부탁했다. 그리고 재문이가 그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려는 찰나, 가지마.



뭐? 왜?
...
...
...
...
...
그래. 알았어.




  어린시절과 달리 이제는 벌어진 어깨를 가졌다고 해도 37번은 겁을 먹었는지 어깨를 크게 떨었다. 그리고 그 위로 손을 올리는 26번. 방금 느꼈던 묘한 감정은 데자뷰가 되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찾아왔고 재문이의 얼굴에 서리 긴장감이 그렇게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다 깊은 곳에 내려오는 햇빛은 바닷물로부터 모든 온도를 빼앗기며 빛의 잔상으로만 남지만, 그래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세하고 섬세한 따뜻함이 있었기에. 인간성을 마모시키는 훈련 때문에 모든 것이 굳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마음이 있었기에. 너무 이른 심해 생활로 인하여 기억도 안나는 햇빛을 재문이는 다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시작한다.
 


  하지만 그 좋은 감정을 원천 봉쇄시키고 명령어가 내려진 컴퓨터처럼 오직 명령 수행을 위하여 손을 움직이는 37번. 재문이는 종종 자신을 사람이 아닌 기계로 대입할 때가 있었는데 특히 사격 훈련을 할 때 한치의 오차도 내지 않는 비결이 바로 이 감정을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다. 욕심도 내지도 않는다. 바라지도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오직 오류와 문제를 찾고 문제없이 이행하는 기계이자, 뜨고 지고 가려지며 사라지는 달처럼. 재문이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그러한 철학에 지배시킨터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26번은 매우 기괴하고 섬뜻한 감정을 느꼈다. 기계를 닮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닮은 로봇처럼 불쾌한 골짜기를 일으켰으니깐.



미친놈...
...
이제보니 개미친놈이었네.




  26번 역시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에 혼자 있을 때 끓어오르는 호기심에 해킹을 시도했지만 국방부보다 보안이 산엄한 미륵보살돔의 보안에 간단한 인트라넷조차 뚫지 못하였다. 하지만 재문이는 인트라넷을 넘어 미록보살돔 전체서버에 친입하는 것도 모자라, 청수의 보안 프로그램을 역이용하여 바이러스를 꽁꽁싸매 보호하는 전략을 선보였을 때 26번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려버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편한 감정이 오고 갔다고 생각했지만 중간중간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에 26번은 재문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했다. 어쩌면 예전처럼 편한 감정으로 대하기 너무도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지도 몰랐다.


  그 사이 천장에는 부속품뿐만이 아니라 천장을 이루는 단단한 것들이 떨어졌고 물방울은 어느덧 물줄기가 되어 프론트 스테이션의 바닥을 채우기 시작했다. 만약 물줄기가 노트북 위에라도 떨어지면 감전사 되어 죽어버릴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재문이의 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였다. 오히려 겁에 질린 사람은 그런 재문이의 모습을 바라 본 26번,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거대한 부속품이 재문이 머리 바로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그녀였고 그것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순간 재문이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아아아아악악악악!!!!!


  거대한 부품이 추락함과 동시에 물줄기는 어느덧 폭포처럼 시원하게 터졌고 26번의 비명 역시 프론트 스테이션을 가득 매울 정도로 크게 터졌다. 과거 근력 테스트 때 팔이 부러졌던 70번의 비명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 오싹하게 만들었지만 재문이는 26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 곧바로 바닥위로 나뒹구는 노트북으로 향했다. 아직 명령어가 유효했기에, 잠수정을 열라는 명령이 모든 것의 일 순위였기에 화면이 반쯤 나간 노트북으로 해킹을 이어나갔다. 방화벽을 넘고 부서별 백신 프로그램을 넘어서, 직원 권한과 관리자 권한을 뛰어 넘어 조금만 더 손가락을 뻗으면 명령어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 조금만 더.



됐어! 이제 잠수정을 사용할 수 있어!



  잠수정에 걸린 보안을 풀자마자 재문이는 모니터에 시선을 거두고 26번을 찾아다녔지만 생각보다 프론트 스테이션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떨어진 잔해와 지저분하게 널린 부속품들과 그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바닷물. 그 사이로 간신히는 들리는 누군가의 앓는 소리. 그 소리는 사냥꾼이 설치한 철조망에 살이 파고들어 괴로워하는 사슴의 울음 소리처럼 사람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래도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다행이다 싶어서 그녀가 파묻혀 있는 잔해로 다가갔을 때 누군가가 재문이의 발목을 툭. 그리고 다시한번 툭. 처음에는 그것이 심해 생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집중해서 보니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 한때 37번의 어깨 온기를 담아냈던 용감한 손가락이었다. 분명 첫번째로 내려진 명령어, '잠수정의 보안을 해제하라.'가 해결되면서 두번째 명령어인 '후보생들을 잠수정에 태워 탈출시켜라.'를 지금 당장 실행해야됐지만 재문이는 오작동이 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프리징 현상에 빠져버렸다.


 
 






37번.
...
37번.


  분명 가장 먼저 앞장서서 심해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탈진 현상이 심화된 탓에 재문이는 헛생각이라는 미로에서 빠져버렸고, 만약 교관이 재문이를 부르지 않았다면 바로 앞 심해 해구에 빠져버릴 뻔 했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재문이는 교관에게 해구 앞에 도착했다는 상황 보고와 함께 본격적인 심해 명상에 돌입할 준비를 하였다.
 

37번. 해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산소 게이지는.
이상 없습니다.
제터 게이지는.
이상 없습니다.
기압 조절 기능은.
정상입니다.
37번, 다이빙 시작해.
다이빙 시작.



  교관이 목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한번 찾아 오는 침묵의 시간. 심해 특유의 고요하고 먹먹한 소리와 라이트를 비추지 않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어두운 전경 때문에 재문이의 정신은 다시 한 번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쓰러지듯이 해구 쪽을 향하여 몸을 던져버리고 그렇게 천천히, 하늘에서 추락하는 천사처럼 중력에 자신의 몸을 맡겨버렸다. 원래 원칙상, 그리고 안전상 해구에서 떨어질 때 선채로 다이빙하여 라이트로 해구 암벽의 위치를 파악한 후 조심스럽게 착지해야하지만 재문이는 그와 정반대로 머리쪽을 바닥으로 향하게, 게다가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로 해구 밑바닥을 향하여 떨어졌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트를 켜고 해구 암벽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싫고 숨쉬는 것조차 번거로울 정도로 재문이는 그 모든 것이 귀찮았기에 손을 놓아버렸다. 원래 가장 보수적이고 안전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고 힘이 드는 건지. 혹시 학술원에 원한이 남은 102번이 유령이 되어 자신에게 빙의한 게 아닐까? 육지보다 20년 정도 기술이 앞선 심해기지에서 유령이야기가 감도는 건, 감정 호소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과학자들과 무기 전문가들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미신같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떠도는 건 어쩌면 진짜 유령이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재문이는 다시 한번 헛생각으로, 그리고 과거의 기억으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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