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갤문학 / DEICIDE] 그들이 오다 - 3

외부 스크랩

by @blog 2021. 3. 27. 21:50

본문

 

 

 

 

 


2005년 5월 6일 아침 10시
잠실종합병원 병실


  “헉……”

  조용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악몽을 꾸었다. 깨고 나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것을 깨어나려고 애쓴 기억은 난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헉…… 허억……”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병원이었다. 이제야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이 병실에 누워 있다는 것, 그리고 병실 안은 무척 덥다는 것이 가장 처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강민 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팔꿈치 부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오른팔이 보였다.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팔꿈치가 있던 곳에는 붉게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후우……”

  용호는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생각났다. 친구를 붙들려다가 갑자기 떨어진 엘리베이터. 그 엄청난 힘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추락한 엘리베이터와 함께 잘려진 팔. 그 엄청난 피… 피… 
  그 와중에서도 이를 악물고 옷을 벗어서 잘린 상처를 붙들어 매면서 지혈하던 기억.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고, 지금에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군.
  스타크래프트를 하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해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내가 잠시 미쳐서 그렇게 무덤덤한 것이었을까. 팔이 잘려버렸다. 앞으로는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될 텐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 어떻게 열심히 살아가야 할까 생각해야 하지. 이러면 안되지.

  그렇게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가다가, 문득 다시 민이형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병간호를 해 주었나보다. 그런데 민이형만 온건가? 다른 팀원들은? 용호는 일단 민이형을 깨워 보기로 했다. 

  “민이형, 민이형, 일어나봐.”

  용호는 링겔을 맞던 왼손을 들어서 강민을 툭툭 건들어 보았다. 그러자 강민이 부스스 하고 일어나더니, 용호를 보고 토끼눈을 했다.

  “어, 어. 용호야, 정신이 들어? 정신이 이제 좀 들어?”
  “세상 모르고 자기는…… 즐쿰토스가 즐쿰이라도 꾼거야?”

  조용호는 그 상황에서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강민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어, 요……용호야. 너 팔……”

  그리고 강민은 아차 싶었다. 그 말을 꺼낸 게 아닌데.

  “이 팔? 친구 잡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이제 큰일났네. 스타도 못하고. 그치, 민이형.”

  조용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 기분이 조금 더 서글퍼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강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용호야, 지금 스타가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아닌가.”
  “응? 무슨 소리야?”
  “믿기 어렵겠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했어. 전 세계가 다 망해버렸다구.”
  “뭐…… 뭐??”

  이 사람이 무슨 꿈을 꾸고 이러나 싶은데, 강민은 계속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다친 것도 다 외계인이 공격해서 그래.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말하기를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어서, 자기네가 이기면 우리를 다 죽이고, 우리가 이기면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형, 잠깐,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강민선수시죠!?”

  용호의 말이 한 의사의 큰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한 의사가 뛰어오더니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진짜 강민선수시군요. 어, 어라. 그러고보니 조용호선수시네요!”
  “예, 예……”

  갑자기 등장한 의사에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그런데 그들 못지않게 의사도 당황한 듯 했다. 조용호의 잘린 팔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 조용호 선수, 많이 다치셨네요. 어떡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의사가 탄식하듯 말하다가, 강민 선수를 보고 놀라며 다시 말했다.

  “아니, 강민 선수도 다치셨습니까??”
  “아, 예…… 손가락을 조금……”
  “이런 상황에서 손가락을 다치시면 어떻게 어떻게 합니까, 강민선수!!!”

   강민이 깁스를 한 손가락을 멋쩍게 들어올리자, 의사가 하소연했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강민선수같은분이…… 전 강민선수의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손가락을 다치다니요.”
  “죄송합니다.”
  “후……”

  의사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다치신 조용호선수나 강민선수가 더 힘드실텐데. 그 마음 알면서도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두분 심정은 오죽하시겠습니까.”
  “……”
  “실례했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나서 의사는 혼잡한 병원의 분주함 속으로 총총히 사라져버려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조용호와, 그런 의사의 뒷모습을 쓸쓸히 쳐다보는 강민, 그리고 이제 모두들 그 두 사람을 쳐다보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덥고 습한 병실에 남겨졌다.

 



2005년 5월 6일 오후 2시 반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새벽에 잠들었던 선수들이 한 명씩 일어나고 있었다. 윤열도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어젯 밤에 가장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다른 선수들보다 좀 일찍 일어난 것이다.
  찬물을 틀어놓고, 손을 찬물에 대자 윤열은 조금 정신이 들었다. 양 손으로 물을 받아서, 고개를 숙이고 몇 번을 끼얹었다. 그렇게 몇 번 찬물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후……”

  윤열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런 장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몇 번 보았었지. 얼마 전에 본 ‘달콤한 인생’ 에서의 이병헌이었나…… 하지만,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 같을까. 이런 기분과 이런 마음일까. 윤열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연거푸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읍푸푸, 읍푸푸, 읍푸푸……”

  걸려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오려는데, 들어오는 사람과 딱 마주쳤다. 다름 아닌 임요환이었다.

  “어…… 일어났어, 형?”
  “으응. 일찍 일어났네. 아직 다 자는데.”
  “어, 어제 일찍 잤잖아.”
  “그래.”

  그리고 윤열은 나왔고, 요환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윤열이 돌아보며 요환을 불렀다.

  “요환이형!”
  “응, 왜?”

  그러자 문을 닫으려던 요환은 문고리를 잡은 채, 그러나 문을 더 열지는 않은 채 윤열을 보며 대답했다.

  “형……”
  “말해봐.”

  윤열이 반쯤 보이는 요환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형, 경기 나갈거야?”

  그러자 요환이 문을 조금 더 열며 말했다.

  “너는?”
  “……”

  윤열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건 요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침묵이었다.

  “……좀더 생각해보고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하고 요환은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윤열은 닫힌 문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물끄러미 욕실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올때까지 오래도록 그렇게. 

 

 


2005년 5월 6일 오후 3시
서울특별시 잠실종합병원 병실

  “그럼 누가 있지?”

  용호가 물었다.

  “글쎄. 나도 지금 누구누구가 모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도 바로 병원으로 왔거든. 어쨌든 우리팀에서는 진호, 정석이, 정민이, 길섭이, 민구 정도.”
  “그렇구나.”
  “모두 다 모였을지는 몰라. 프로게이머들 애들중에 잠적한 애도 꽤 될거야.”
  “그렇겠지.”

  강민은 속으로 난감해했다. 용호는 팔이 잘리는 큰 중상을 입었다지만, 자신은 왼쪽 손가락 4개가 삐는 아주 약한 부상만을 입은 상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하기에는 불가능한 부상이지만, 언젠가는 회복될 부상이었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을 피해갈 아주 적절한 명분을 너무도 손쉽게 얻은 것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용호 옆에 있는 것도 부끄럽고, 다른 선수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어느 곳도 바늘방석이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게 가장 큰 문제겠네.”
  “그래. 그렇지……”
  “제발, 별거 아닌 초보들이었으면 좋겠는데…… 설마 우리만큼 하는 고수들이겠어?”
  “그래, 제발 아니길 바래야지. 누구든지 지면 바로 죽는 상황이니까.”
  “대체, 그 외계인들이 스타를 어떻게 아는거야?”

  그러나 강민이 훗 하고 웃었다.

  “글쎄, 모르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자체가 외계에서 온 것일수도 있지. 블리자드라는 회사에서 외계로부터 받은 게임…… 그래서 그렇게 재미있고 흡인력도 있고, 그랬던 거 아닐까?”
  “누가 몽상가 아니랠까봐…… 그런데 그럴듯도 한데, 형?”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쪽이 스타 원조라는 이야기잖아. 그 가설은 아니길 바래야겠다.”
  “그래, 그러진 말아야지.”

  그러면서 조용호는 병원 천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난데없에 강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내가 다시 스타를 할수 있을까?”

  순간 당황한 강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곤란한 질문만 하는 녀석, 하고 생각하며 언뜻 생각난 예로 대답했다.

  “으, 으응? 할수 있어, 용호야. 옛날에 그 시각장애인인데 스타하는 사람 있었잖아. 그 사람도 스타하는데 너도 잘 할수 있을거야.”
  “아, 그랬지? 요환이형이랑 게임하던 그 사람…… 진짜 신기하더라.”
  
  강민은 또 괜한말 했나 싶어 말실수한거 없나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때 용호가 말을 이었다.

  “이제 난 악수 청할 때도 왼손으로 해야겠네. 그치?”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