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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갤문학 / DEICIDE] 그들이 오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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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g 2021. 3. 2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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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6일  오후 7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앞 서울광장


  벌써 주어진 48 시간 중에 21시간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시청 앞 광장에 있는 거대한 대형 전광판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주위가 어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전광판에는 1, 2, 3, 4, 5의 숫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왜 아직도 한 명도 없지……?”
  “대체 뭣들 하고 있는거야??”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둘씩 걱정스레 우려를 터뜨리고 있었다. 물론 쉽게 나설 수 없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자리이긴 했지만, 거기에는 자기 자신들의 목숨 또한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청 앞 광장에는 거의 5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월드컵 당시 12만명이 모인 것을 생각하면, 축제 분위기도 아니며 아직 하루 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프로게이머들이 도망치거나 하지 않고, 모두 모여서 어떤 선수가 출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회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아지자 그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어떤 소속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상 같은 것을 만들고 마이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청앞 광장에는 고출력의 스피커들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그의 이야기가 시청앞 광장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들을 믿어봅시다! 어차피 지금 인류에게 희망은 오로지 그들뿐입니다. 내일 밤 12시에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 선수들을 믿어봅시다!”

  그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술렁이던 사람들의 반응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광판을 빤히 쳐다보며 한숨짓던 한 아가씨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잘 되겠죠?”
  “……”

  옆의 사람은 대답없이 모자를 눌러쓴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몹시 걱정스럽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긴 그런 사람이 이 주위에 한둘은 아니었지만서도.

  “이봐요, 힘내세요. 저는 스타같은거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을 믿어요. 그 사람들이 잘 해 줄거에요. 비록 그들이 지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들이니까, 비록 목숨을 잃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한거죠.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것을 믿는 것 뿐이죠.”

  그러자 그 희망없이 고개를 숙이던 청년은 조용히 우물거렸다.

  “믿는다라……”
  “그래요, 같이 한번 믿어보자고요.”

  그녀는 입을 앙다물며 눈으로 웃어보았다.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청년도 고개를 한번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그쪽은 스타 할줄 아세요?”
  “아, 예. 뭐 조금 하긴 하는데……”
  “정말요? 우와, 정말 잘됐다! 그럼 저좀 가르쳐 주세요. 뭐 어떻게 봐야 하는거에요?”

  아가씨의 반응과 곤란한 질문에 청년은 당황해했다. 요즘 젊은 사람치고 스타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텐데…… 그리고 스타라는게 말로만 설명될 수 있는게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 그게, 아무것도 없이 하기에는 좀 그런데요. 말로만 하기에는 좀 어려워서요……”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필요한데……”
  “아하! 그래요?”

  그러더니 그녀는 옆에 가지고 온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지금 저 노트북에 그 게임 가져왔어요. 이게 꼭 있어야 하는줄 알고요. 그런데 그냥 TV 중계 보는거라는 거 알고 얼마나 민망했는데요.”
  “잘 됐네요. 마우스는 없죠? 괜찮아요. 터치패드라도 스타가 어떤 건지 가르쳐 드리는데는 문제 없습니다.”

  시청앞 광장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조그마한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전광판은 그 어떤 선수의 이름도 없는 시커먼 공백이었고, 주위는 더욱 칠흑같은 어둠으로 깊어만 갔다.

 



2005년 5월 6일 밤 10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오후부터 길고 지루한 회의가 계속되었다. 회의에 지쳐서, T1 연습실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켜고 하는 프로게이머들도 있었다. 그것이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잠시나마 걱정과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회의의 분위기는 갈수록 암울해져만 갔다. 무엇보다, 어젯 밤에 너댓 명의 프로게이머들이 더 사라졌다. 정수영 감독은 그 중의 한명이 홍진호라는 사실이 너무도 실망스러웠고, 또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지. 그동안 그렇게 오랜 세월을 최고의 자리에 앉지 못했어도 한번도 포기한다거나 낙담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 선수였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버릴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 마음의 부담감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안쓰럽고 이해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홍진호의 빈 자리는 상상외로 컸다. 그가 선수로 출전하지 않더라도, 경력 많은 선배 프로게이머인 그의 부재 자체가 후배나 동료 게이머에게는 충격이었으며 사기 저하의 원인이었다. 이제 24시간이 지난 지금, 선수들을 독촉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때문에 감독들이 모였다. 감독들이 모두 모여도 7명뿐이었다. 나머지 4명의 감독들도 모두 변고를 당하거나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팬택 앤 큐리텔 송호창 감독이 운을 뗐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자기 혼자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아이들에게는 고문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 선택을 도와주는게 현명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송 감독이 독한 마음을 먹고 이야기했다. 몇몇의 감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호창 감독은 내친 김에 더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기다리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차라리, 어서 선수 엔트리를 결정시키고 그들에게 약간의 시간이나마 연습을 시키는 것이 지금 상태에서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경기에 들어선다면 그 긴장감과 부담감에 경기에 패할 지도 모릅니다……”

  경기에 지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하게 되자, 송 감독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예, 송호창 감독님 말씀이 맞습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지금은 우리 감독들이 용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소울팀의 김은동 감독이 말을 받았다. 아까 고개를 끄덕인 감독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 결정을 하는 것이 정말 옳을까요……?”

  주훈 감독이 걱정스레 말했다. 사고로 최연성, 박용욱 두 명의 선수를 잃고, 박태민마저 부상당해버린 지금 가장 낙담하고 있는 감독 중의 하나였다.

  “주 감독.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건 자네가 잘 알잖나.”

  송 감독이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이야기했다. 

  “자, 자, 짝 짝 짝.”

  그 때 KTF 정수영 감독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정돈했다.

  “그럼 한번 구체적으로 이야기들을 해 보도록 합시다. 어느 팀의 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오?”
  “제 생각에는……”

  정수영 감독이 묻자, 송호창 감독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때,

  “잠깐만요.”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한빛 이재균 감독이 입을 열었다.

  “<칼레의 시민> 이라고 아십니까?”

  이재균 감독이 물었다. 그러자 감독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가 다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칼레는 프랑스의 조그마한 항구도시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때, 이 도시는 영국군에게 완강히 저항하다가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영국은 많은 시간적, 물질적 피해를 입힌 이 칼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지요.”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재균 감독은 말을 이었다.

  “그 때, 영국군이 잔인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칼레의 시민을 대표해서 6명이 목숨을 내어 놓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살려 주겠다는 조건을 말이지요. 칼레의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했습니다. 누구를 내보내느냐, 누구를 죽음으로 내모느냐에 대해서요. 결국 그들은 투표로 그것을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이재균 감독은 송호창 감독을 한번 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긴, 당시 칼레의 시장과, 귀족, 부호 등 6명이 죽음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상대적으로 상류 계층에 있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당당히 목에 밧줄을 걸고 나아갑니다. 이 사람들의 희생과, 그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 로댕이 조각을 남기기도 했지요.”

  이재균 감독은 탁자에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정리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선수들을 조금만 더 믿어보자는 겁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 있어서 세계 최고에 있는 이들입니다. 저는 감독 생활 동안 한번도 제가 선수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위에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어낸 권위자들이고, 장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인 만큼, 그들은 스스로 떳떳한 선택을 해 낼 것입니다.”

  이재균 감독의 말이 끝나자, 감독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숙연한 이야기에, 그리고 그 선수들을 향한 깊은 신뢰에 무슨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거짓말처럼 감독들이 있던 방의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일제히 감독들은 그 쪽을 돌아보았다. 한 명의 선수가 그들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또렷이 이야기했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2005년 5월 6일 밤 11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시청 앞 서울광장


  청년은 정신없이 스타크래프트를 옆의 아가씨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가씨는 똑똑해서 무척 이해가 빨랐다.

  “아, 그래서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것이로군요.”
  “예. 보통 전쟁의 개념과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면 소수 병력으로도 다수 병력을 방어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재밌다…… 이런건 다 어디서 배우셨어요?”

  ‘요즘 젊은이치고 스타 모르는사람 거의 없다’ 라는 말을 해주려다가 청년은 참았다. 

  “그냥, 혼자 많이 했어요. 자, 그럼 다음엔……”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무척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고, 커다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북새통에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아유, 무슨 일이죠, 이게?”
  “그……글쎄요. 일어나세요.”

  청년은 먼저 일어나서 아가씨를 잡아 일으켰다. 아가씨는 노트북을 한 손에 안고 청년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
  “엇, 저기, 저기 보세요!!!”

  청년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가씨가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가리켰다. 그러자 청년도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아……”

  청년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거기엔 1. 이라는 숫자 옆에 첫 번째 선수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아가씨는 알아보지 못할 글귀로, 깜빡거리면서 가장 첫 번째 선수를 알렸다.

 

< [ReD]N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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