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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갤문학 / DEICIDE] 그들이 오다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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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g 2022. 1. 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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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7일 오후 4시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윤열이가 마우스랑 키보드를?”

  강민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물었다.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다행히 여기 숙소에 비슷한 기종이 있어서, 지금 그거로 적응훈련하고 있나봐.”
  “그래도. 어쩌다가 그렇게 됐대?”
  “누가 훔쳐갔나봐. 팬이 그랬겠지……”

  불안한 일이었다. 프로게이머들에게 키보드와 마우스는 단순한 인터페이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선수들의 손의 연장선상에 있고, 함께 호흡하고 가장 믿을수 있는 ‘동료’ 인 것이었다.

  “휴, 걱정이네, 걱정…… 아얏!”

  강민이 자리에 앉다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왼손가락이 책상에 걸려 조금 굽혀지자,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었다.

  “많이 아픈가보네. 어디 좀 보자.”

  김정민은 강민의 손가락을 보았다. 골절상이 아니어서 손가락에 했던 깁스는 풀어냈지만, 여전히 손가락 네 개가 퉁퉁 부어 있었다. 

  “잘 굽혀지지도 않지? 나도 농구같은거 하다가 손가락 젖혀져서 삐고 그랬는데. 진짜 아프지.”

  정민이 말하자, 강민의 표정이 또 우울해졌다.

  “난 왜 이러냐. 누군 죽어가고, 누군 팔이 잘리고 그러는데…… 나는 이렇게 조금밖에 다치지 않고서 무책임하게 앉아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런소리 해. 네가 다친게 네 잘못 아니잖아. 도망쳐버린 것도 아니고.”
  “글쎄다. 솔직히, 솔직히 정민아.”

  정민은 강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마음속에, 다행이다, 잘됐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서 미치겠다.”
  “그런생각 하나도 안 든다면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런거 가지고 괴로워하지 마.”
  “어떻게 안 괴로울수가 있냐? 목숨걸고 나가는 윤열이, 정석이, 요환이형같은 사람들 보면서, 내 속에 자꾸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내가 참 싫다.”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약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강민이었다. 그런 강민이 어려운 마음을 드러내자, 정민은 강민의 고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석이도 그렇고, 내가 어쩌다보니 상담원 노릇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정민은 입을 열었다.

  “민아, 내 마음은 어떻겠냐.”
  “어?”

  강민이 정민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나는 어떻겠냐구…… 나 같은 사람들은.”

  정민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이야?”
  “몸도 다치지 않고, 여기 이렇게 남아있는 채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있어야만 하는 마음…… 프로게이머 생활 해온 이래로, 정말 많이 힘들고 괴로운 생각 들 때가 많았지만, 지금처럼 내 자신 스스로가 싫고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강민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정민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누가 내가 출전하기를 바랄까? 나를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도, 이 자리에 내가 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거야. 나는 최고가 아니고, 나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니까. 그래, 나 스스로도 나를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최고가 아닌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나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지.”
  “정민아. 무슨 말을……”
  “나의 게임으로, 내가 누구에게 신뢰를 주어본 적이 있을까?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조금이라도 기대하면 여지없이 실망시키고…… 기본기는 탄탄하다, 정석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최고는 아니다. 그게 누구나 생각하는 내 모습 아닐까? 처음, 스타크래프트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할 때, 그 때 이미 ‘아, 나는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해버린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이미 스스로에게조차 신뢰를 잃어버린 나인데. 그 누구에게 신뢰받을 수 있을까.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지?”

  강민은 또다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이의 몫이라도, 나는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겠지.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서, 정말로 최고의 사람이 필요할 때,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게, 그게 내 역할이라는 게 좌절스럽다는 이야기야. 그게 괴롭고, 그게 슬퍼.”
  “정민아……”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너무도 오래 그렇게 지내왔고, 이제는 내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 모습조차 무디어져버렸어. 그걸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되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 민아.”

  혼잣말하듯이 이야기하던 김정민이 강민을 불렀다.

  “응?”
  “넌…… 손가락의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지만, 나는 나의 실력 자체에, 마음가짐 자체에, 나라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출전하지 못하는 거다. 그게 결론이겠지.”
  “야, 김정민!”

  강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해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답지 않다, 김정민.”
  “그럴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최고이고 아니고가 중요하겠어?”

  그러자 김정민이 물끄러미 강민을 쳐다보았다.

  “방금 네가 말한게 사실이 아닌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아니, 난 모르겠는걸.”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난 몰라. 난 누가 최고인지도, 그것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는지도 몰라. 그래, 네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그것이 사람들로부터의 신뢰라고 하자. 하지만, 믿음이란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은 아니잖아?”
  “……”
  “언젠가 정민이 네 치어풀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인 것 같다고……”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를 강요하지……”
  “자학하지 마라, 김정민.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너를 믿지 못하는건 너 자신이다.”

  강민은 김정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넌 신뢰받는 사람이고, 신뢰받을만한 사람이야, 김정민. 누구든지 마찬가지야. 지금 이 결전에 출전하고, 출전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인류의 운명이 달린 자리야. 그 누구도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고, 함부로 누구의 등을 떠밀 수도 없지. 결국,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나갈 수 있는거다. 그게 결론이야.”
  “……”
  “네가 이렇게 고민하고 고뇌한다는 자체가, 네가 아직 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김정민, 아직 선수 명단에는 한 자리가 남아있어. 저 남아있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이름을 올리게 된다면, 그가 너보다 더 자기 자신을 신뢰했고, 그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이 되겠지. 하지만, 네가 이 신뢰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그게 최고가 되는거야. 그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네가 네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고 믿고 의심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

  정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강민은 그런 정민을 그대로 두고 방문으로 걸어 나갔다. 손잡이를 잡아 당기면서, 강민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그래, 잘 생각해 봐, 정민아. 나는, 너라면 믿겠다.”

  그리고 강민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2005년 5월 7일 오후 4시 5분
서울특별시 SKT T1 숙소

  “윤열아! 어서 나와봐라!”
  “예?”

  한창 마우스 적응훈련을 하고 있던 이윤열이 송호창 감독의 외침에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채 경기시간이 8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응 훈련중이던 윤열의 마음은 급했다. 그 때, 송호창 감독의 말은 전혀 뜻밖이어다.

  “이윤열! 네 키보드랑 마우스 찾은 것 같다! 어서 나와봐!”

  그 말을 들은 이윤열은 깜짝 놀라서 연습실에서 뛰어나갔다. 송호창 감독이 이윤열을 황급히 불렀다.

  “어서, 어서와라. 외계인들이 방금 찾아와서는, 한 여자아이가 네 키보드랑 마우스를 훔쳤는데, 네게 돌려주려고 왔다고 하더라.”
  “정말요?”
  “그래, 어서 내려가보자.”

  소란을 들은 몇몇 프로게이머들과 감독들도 함께 숙소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외계인들이 소녀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윤열에게 낯익은 가방 하나를 건넸다.

  “이것이 네 물건이 맞는가?”
  “마…… 맞는 것 같습니다.”
  “확인해봐라.”

  윤열은 가방을 건네받았다. 가방을 열자, 키보드가 마우스가 고스란히 잘 들어 있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죄……죄송해요……”

  아라는 외계인들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모기만한 목소리로 윤열에게 말했다. 제대로 윤열을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윤열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외계인이 윤열에게 물어보았다.

  “맞는가?”
  “예, 예. 맞습니다.”
  “잘 되었군. 네가 첫 출전선수지? 가서 준비하고 있어라.”

  그리고 나서 외계인은 주위 외계인들에게 명령했다.

  “이 애는 죽여라.”

  순간, 주위 모든 사람의 눈의 경악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들에게 붙들려 있던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외계인들은 지체없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자, 잠깐!!!”

  함께 따라나왔던 송호창 감독이 황급히 외계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왜…… 왜 죽이려고 그럽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출전 선수의 인터페이스를 도둑질해가서 그에게 해를 끼쳤다. 프로게이머에게 해를 입히는 인간은 모두 죽여버리라는 명령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아라는 공포에 질려서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그런 아라를 보고, 윤열은 황급히 외계인들에게 말했다.

  “죽이지 말아요!! 괘, 괜찮아요. 아무런 해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어서 죽여라.”

  윤열의 말은 무시한 채, 외계인들 중 한 명이 아라를 붙들고 들어올렸다. 그녀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윤열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만요!!!!”

  그러자, 외계인들이 멈칫했다.

  “뭐냐.”

  윤열은 황급히 가방 안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꺼냈다.

  “이, 이것들 제 것이 아니에요. 제 마우스와 키보드가 아니라고요!”
  “아까 맞다고 하지 않았나. 거짓말 따위는 소용 없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마라.”
  “꺄악!!!!!!”
  “그, 그만!!!”

  윤열은 눈물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여자아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세게 키보드를 바닥에 내리쳤다.

  “콰직! 쾅!!! 콰직!”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바닥에 내리치자 키보드가 산산히 부서져서 깨어졌다. 곧이어, 윤열은 마우스도 바닥에 던졌고, 발로 밟아 부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 윤열은 외계인에게 말했다.

  “돼…… 됐죠? 이건 제 것이 아니라니까요. 제 것이었다면 이렇게 부수었겠어요?”

  그러자 외계인은 윤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간의 정적 후, 외계인이 동료에게 이야기했다.

  “놓아 줘라.”
  “툭!”

  아라를 들고 있던 외계인은 던지다시피 아라를 내려놓았다.

  “어서, 어서 들어가자.”

  윤열은 그 여자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외계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크르르르…… 약해 빠진 인간이라는 족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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