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만화 미생이 미생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본문

 


 

 

 

 

텃세가 심한 회사에서 퇴사했을 때 팀장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야, 너 미생 같은 것도 안 봤어? 회사가 원래 그런 거야.”. 나 참. 저 말에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러면 주말드라마에서 재벌과 가난한 여자의 로맨스가 나왔다고 해서 현실의 모든 여자는 다 재벌하고 사귀어야 해? 며느리는 시어머니하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워야 하고 시부모와 친정 부모가 모이는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서 입덧이라도 해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해? 원래 드라마와 만화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과장된 면이 많다. 좀 더 풍부한 감정이 나올 수 있도록 다채로운 일이 벌어지고 울분이 나올 수 있도록 불합리하고 억울한 상황이 연출되며, 높으신 분이 정의로운 말단 사원에게 패배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게 바로 드라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왜 미생을 들먹이며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팀장은 미생이라는 만화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본 결과, 아마도 미생 속에 나오는 그런 회사 분위기와 그런 느낌의 사원을 원했던 게 아닐까? 주인공 장그래가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참고 버티는 것처럼, 장그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했던 회사처럼, 팀장은 그런 회사와 그런 사원을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사실 난 만화 미생 열풍이 한창 불었을 때 그 만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깃집에서 일하면 고기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운 것처럼 대기업 계약직으로 일했던 나로서 이미 알고 있는 냉정한 이야기를 또 보고 싶지 않았으니깐. 그러다가 눈썹 문신을 하기 위해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처음으로 그 만화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훨씬 더 판타지스러운 것이다.

우선 미생 초반부에서 장그래를 포함한 4명의 직원이 인턴 생활을 하면서 돈독해지고 3명은 정규직, 장그래는 계약직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는 아예 정규직이 될 인턴과 계약직 및 특채로 입사한 인턴을 따로 분류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인턴 기간에도 계급이 나뉘는 것처럼 연봉, 복지 혜택, 책임감, 회사 사람들의 취급 그 모든 게 달랐다.

거기다가 만화에서는 계약직 장그래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상사와 진심으로 대해주는 직속 상사가 나오지만 실제 내가 계약직으로 일했을 당시 모든 직원이 날 거의 투명 인간 취급했다. 중요한 회의에서 제외하는 것은 기본, 사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 하는 것은 거의 힘들었다. 마치 모두 내가 오래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말이지. 덕분에 계약직 사원은 계약직 사원들끼리, 정규직 신입사원은 정규직끼리 뭉쳐 다녔다.그런 것을 보면 미생 속 회사는 오히려 계약직들이 원하고 있는 회사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왜 나와 퇴사 상담을 했던 팀장은 미생에 나오는 판타지적이고 따뜻한 면은 전혀 보지 않고 직장의 냉혹한 면만 보게 되었을까. 미디어에서 냉정한 회사의 면모가 나오면 수긍하고 따라 하면서 왜 너그러워지는 쪽이 나오면 판타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하며 따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회사의 냉혹한 현실을 소름 돋게 표현했다던 만화 미생이 더욱 냉혹하고 소름 돋는 회사를 만드는 일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소름 돋았다.

 

 

물론 나도 안다. 회사는 이익을 최고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단체이기에 긴장감이 감돌고 너무 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지나칠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과 오히려 있어봤자 도움 안 되는 부조리만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야근 수당도 지급하지 않는 암묵적인 야근 문화는 애교,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몰게 한 간호사의 태움 문화, 사장이 직원을 야구방망이로 후려쳐 죽게 만드는 기막힌 사연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바로 ‘회사니깐 이렇게 험해도 된다’라는 인식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마침 드라마에서 나오는 회사들도 하나같이 불합리하고 비리가 판치며 무자비한 곳으로 나오네? 야! 너두? 나두 그렇게 할래!

아무리 직장인들이 자신을 노예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해도 진짜 노예가 되면 안 된다. 회사를 전쟁터라고 비유해도 진짜 사람 죽게 만드는 전쟁터로 만들자면 어쩌자는 건가. 냉정하고 가혹한 회사 이야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가지 마라. 이것이 바로 냉혹한 직장 생활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회사원이 있다면 스스로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