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문이가 학술원 졸업생 중 최연소로 save 등급을 받아낸 천재라면 청수 과업 이사회 정신의학과 박재문 박사는 20대의 이른 나이에 정상급 과학자들이 포진되어 있는 미륵보살돔이 입사한 천재 과학자였다. 더 나아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수석 연구원이라는 파격적인 직위를 얻게 되면서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거느리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관리자였다. 보통 어린 나이에 너무 높은 직위에 오르면 무시하는 직원이 있기 마련인데 박재문 박사 특유의 냉소적인 성격과 청수특수과업 이사회들의 엄청난 신임을 받았기에 함부로 건드릴수조차 없었고, 오죽하면 하르방 쓰나미가 일어나 미륵보살돔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박재문 박사만큼은 안전하게 대피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질 정도였다.
다만 성격적으로 흠이 많았는데 원래 서울 출신의 부동산 재벌 가문이었지만 거대한 실수와 PAC의 압력으로 인해 한국 수도인 서울이 빼앗기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때문에 박재문 박사는 극심한 외국인 혐오주의와 이성적인 사고만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리석다고 판단된 사람과는 아예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더나아가 동조능력, 감성적인 선택 가능성이 높은 여자 후보생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남성우월주의적인 면모를 가지면서 안그래도 미륵보살돔의 박사들은 까다로운 성격이었지만 그 중 박재문 박사는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청수 지도자가 될 아이들의 마인드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가진 박재문 박사는 그것들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특수 과업 이사회가 정해준 가이드라인에 맞추어 사람 성격을 재단 한다는 것은 마치 잘 맞추어진 퍼즐 조각들을 보는 것처럼 박재문 박사의 완벽주의와 딱 맞는 직무였다.
어두운 연구실. 박재문 박사는 푸른 빛을 내는 모니터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고 흠집 하나없고 흐트러짐이 없으며 규칙성을 넘어선 어떤 진리와도 같은 후보생들의 데이터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정신구조를 가진 후보생, 자신과 동명이인인 37번 후보생의 데이터를 볼 땐 황홀한 감정까지 느낄 정도였다. 과학자로서 끌릴 수 밖에 없는 이성적, 유기적, 합리적 사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 거기다 과학으로도 다루기 힘든 인간 통제 능력의 정점인 정치적 감각까지.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군인이자, 사람들이 모두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37번의 모습에 박재문 박사는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들 걸작 중에 이보다 최고는 없었으니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하고 다를 수도 있어.
늦은 저녁이라 모두 퇴근했을거라 생각했는데 검정색 가운을 입은 여성이 박재문 박사의 곁에 다가왔고 푸른색 모니터 빛을 함께 맞았다. 청수 특수 과업 운영 감독관인 그녀는 문제가 있는 후보생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이드 라인에 들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그녀의 등장에 박재문 박사는 영 달갑지 않았는데 왜냐면 자신의 완벽한 퍼즐에 흠결이 있다는 지적 권한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후보생에 대해 좀 더 집중적인 조사가 필요해.
그럴리가요. 데이터 상으로는 문제 있는 후보생은 없는데.
나도 알아. 하지만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
혹시 95번이 또 그런건가요? 후속조치도 안먹힌 건가요?
후보생의 나이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머리가 커지고 간사해지면서 청수를 향한 가짜 충성심, 가짜 마음, 가짜의 가짜를 보여주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몇 패기있는 후보생은 보란듯이 청수의 정책에 반발했는데 그 중 95번은 과제로 청수 미래 사업 발전 방향에 대한 레포트를 써보이며 감독관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 한국은 상업을 중심으로 발달하는 편이 발전성은 물론 장례성도 된다는 말, 과학과 방위 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오히려 한국을 후퇴 시킬 수 있다는 생각들을 펼쳐보였다. 거기다 귀족의 퍼센테이지를 줄이고 상업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특수 계층을 만들자는 파격적인 생각들, 단순 레포트라고 하기에는 감독관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행동 예측과에서도 95번의 치기어린 행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 정신의학과에서도 동의하게 되면서 후속조치 작업에 돌입하였다. 물론 강제 퇴학이나 자발적인 이직을 강요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학술원은 부적합한 후보생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 가르쳐주는 곳, 즉 교육기관이었으니깐.
거기 후보생.
네?
이 아이, 개인 기숙사로 보네.
그렇게 95번은 일주일 만에 검정색 가운을 입은 여자와 함께 학술원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술 취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 그를 감독관은 짐짝 넘기듯이 밀어 넘기면서 바닥에 고꾸라지기 직전에 재문이가 받아낸터라 바닥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유니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뒷목 부분의 심한 멍자국들과 주사바늘 자국들이 보이면서 재문이는 혹시 정신의학과 서브넷에 들어갈 때 보이던 ‘후속조치’라는 게 바로 이건가 하며 95번에게 말을 걸었다.
형, 괜찮아?
아......아아.......아....
95번은 마치 고장난 테엽인형처럼 삐그덕 거리는 소리만 낼 뿐, 침을 질질 흘려도 입 하나 제대로 다물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해도 초롱초롱 하게 눈을 뜨고 상업 중심 국가로서의 청수는 어떻겠냐고, 똑똑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하루종일 옆에 붙어다녀 피곤하게 만들던 사람인데. 재문이는 단순 사고인지, 아니면 정말 그 후속조치라는 과정을 거친 게 맞는지 확인 하기 위하여 왼쪽 팔을 감싼 유니폼을 걷어냈다. 그러자 뒷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심각한 멍자국과 주사바늘자국이 뒤덮어 보는 사람이 다 겁에 질릴 정도였으니, 부정할 것이 없이 그 후속조치라는 건 강제성을 띤 사상 개조가 확실해보였다.
!
그때 사무실로 돌아갔을거라 생각했던 검정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그자리 그대로 서서 재문이를 바로 보고 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며 모든 것을 의심하는 눈초리, 의심은 도미노처럼 한번 넘어지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재문이는 뭐에 쫒긴 듯 95번을 이끌고 개인 기숙사로 향했다. 하지만 다른 부위도 아니고 정확히 뒷목과 왼팔부터 확인한 그의 모습에 감독관의 의심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확실합니까? 잘 못 보신 거 아니죠? 다른 후보생들과 착각 한 거 아닙니까?
감독관의 말에 박재문 박사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목소리가 다급해지더니 따지듯이 말했다. 거기다 푸른색 모니터의 빛을 받아서 그런지 안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37번 후보생은 어떠한 후보생보다 괜찮은 애니깐요. 지금 바로 데이터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결점 없는 애에요.
의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한번 조사해봐. 게다가 37번은 파종계획 후보자 명단에도 들어있어. 의심하면 할수록 좋은 거라고.
...
기존 데이터가 아니라 37번도 추측하지 못하던 때 뇌전도 패턴 분석 해봐. 알았지?
그때라면...
iso 명상 때 해보면 되겠네.
2
ISO 명상 때 확인해보면 되잖아. 주변 영향도 없어서 좀 더 명확한 뇌패턴도 볼 수 있고. 그리고 의심할 일도 없잖아. 통신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되니깐 스캔하는지도 모르겠지. 될 수 있는 첨부자료는 다 보내. 사적인 애착이나 감정을 가지고 그 후보생을 대하지말고. 다른 애들보다 어리니깐 아들처럼 느껴지겠지. 똑똑하니깐 자랑스럽게도 느껴지겠지. 하지만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다 의심해봐. 원래 배신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벌이니깐.
감독관의 명령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박재문 박사는 ISO 명상 때 37번의 뇌패턴 스캔을 시작하였고 거기서 시작된 신뢰의 상실, 배신의 직감. 자신이 믿고 있었던 데이터는 사실 받는 분 기분 좋으라고 만들어진 조작된 데이터였고 진짜 37번은 다른 직소 퍼즐들과 어울려지게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간 퍼즐 조각이 아니었다. 주변에 융화 될 수 없는 정사각형 퍼즐조각. 그러나 그 퍼즐조각은 무생물이 아닌 자아를 가진 생물처럼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가는 척 하며 주변 퍼즐과 맞춰 융화되는 척 하고 있었다.
자아라고는 없는 물건들 속의 살아있는 생명. 촘촘한 퍼즐판 속에 거짓을 이야기하면서까지 버텨온 괴물.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애가 아니였다. 귀엽다면서 기특하게 보는 것이 오히려 실례였을정도로 어른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던 애였다. 박재문 박사는 진땀 흘리며 감독관에게 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다 보내며 파종계획에 대한 참가 취소와 지금 당장 후속조치 작업을 시작 해야한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아주 어른을 가지고 놀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애에게 좀 더 명확한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전송실패, 그리고 또다시 전송실패. 그리고 팝업창에 뜬 오류 메세지에 박재문 박사는 숨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미친 새끼...
오류 메세지를 보낸 사람은 굉장히 정중하게, 신사적인 말본새로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이거였으니, 더이상 날 건드리면 죽여버릴거야.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오류 메세지를 보낸 사람이 박재문 박사가 늦은 새벽 혼자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는지 강도높은 협박을 했고 박사는 책상 맨아래 서랍에서 리볼버를 꺼내며 자신의 신변 보호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잘났다고 해서 오냐오냐 해줬더니 미친 새끼가!
지금 전송 오류가 뜨고 오류 메세지도 바꿔 보냈다는 것은 실시간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증거. 패기어린 그의 메세지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등골이 오싹한 감각에 총알조차 버벅거리며 넣었다. 그렇게 박재문 박사는 리볼버를 들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사무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바로 이 근처에 잠복해 있을텐데. 그러나 인기척 하나 보이지 않은 사무실, 세이브 스크린으로 인해 곳곳에 푸른색 빛이 감돌았지만 서늘한 살기를 품은 소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느껴지는 불쾌한 시선과 메시지를 통제할 정도라면 CCTV는 물론 호신용 터렛도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불길한 생각에 박재문 박사는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경비원!
천만 다행이었다. 미륵보살돔 보안으로 인해 개인용 핸드폰은 당연히 없었고 그렇다고 메세지콜은 죄다 오류로 막혀있는 상태라 경비원에게 대신 메세지를 보내달라고 하면 되니깐. 거기다 신변의 보호까지 됐기에 박재문 박사는 경비원을 더 큰 목소리로 불렀지만 하필 경비원은 급한 볼일이 있었는지 안된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고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평소 과학적 지식이 전무해보이는 경비원의 인사조차 무시했던 박재문 박사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 오히려 박사가 경비원을 쫒아가야하는 상황이었다. 볼일 하나 컨트롤 못하는 경비원에게 한소리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던 그때, 문뒤로 숨어있던 경비원 옷을 입은 재문이가 휴대용 인젝터팩의 바늘을 박재의 박사의 뒷목에 삽입, 버튼을 눌러 용액을 있는대로 박사의 몸 속 투입시켰고 피보다 빠른 속도로 그의 몸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후속조치 때 95번 몸에 매일 투입했던 용액 + 방첩 수업 때 배운 각종 치명적인 용액들을 완벽한 비율로 섞어 만든 재문이만의 특별 레서피였고 그 용액에 온몸이 경직되고 제대로 몸을 가눌수 없게 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95번과 같은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박사. 흐려져 가는 시야 사이로 경비원 모자를 벗으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범인은 죽음의 문제를 너무도 이른 나이에 자주 접하게 되다보니, 익숙하다보다 못해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죽어가는 그를 무덤덤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의 머리 뒤로 비추는 천장 조명이 후광처럼 보이고 약물 효과로 인하여 일그러져가는 시야를 통해서 본 재문이의 모습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처럼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신발 끝으로 박사의 턱을 툭툭 건드리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친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휴가 한 번 가시라고 했잖아요. 박사님.
...아....아아...
안색 많이 안좋으시잖아요. 쉬셨어야지. 그치?
아....아.....
그리고 한 번 생각해봐. 나 말고 누가 파종계획에 갈 수 있는데.
...
나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는데. 누가 외국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데. 너는 생각이 있냐, 없냐?
유난히 자신에게만 가혹했던 운명. 다른 아이들보다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났던 이유. 기이할 정도로 특출난 감정 절제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 예측을 쉽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 이유를 몰라서 괴로웠던 과거의 시간들 혼자서 많이 울었던 시간. 그러나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는 사실틀 깨닫는 순간 눈물을 닦아냄과 동시에 어른보다 지혜로운 현자가 되면서 행동양상의 변동성이 탄생하게 되었고, 재문이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던 박사는 차가운 바닥 위로 점점 차가워지는 숨을 내뱉다가 천천히 눈을 감게되었다. 박사님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재문이는 그가 완전히 눈을 감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따뜻함이라고는 없는 정치적인 미소였다. 그저 서로 길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며, 청수를 향한 충성심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 뿐 그를 미워하지 않았기에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결국 박재문 박사가 완전히 눈을 감으면서 정치 싸움의 승자는 가장 어린 나이로 학술원으로 들어온 소년이 되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닌 것이 아직 뒤처리 할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자신을 의심했던 감독관에 대한 처리, 그리고 박사와 둘은 사랑하는 사이고 마약 섹스를 할 정도로 뜨거웠던 사이라는 것, 사인 역시 마약 중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그 증거가 둘이 주고 받았던 메세지이고 그 메세지를 통째로 조작 하기 위하여 미륵보살돔 서버를 크게 한번 뒤집어야 했다. 번거롭긴 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였다. 이미 미륵보살돔 전체 서버는 재문이가 마음만 먹으면 쥐락펴락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었을 뿐. 이렇게까지 번거로움을 자처한 이유, 변수를 사랑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재문이가 변칙성이 많은 일을 실행하는 이유는 오직 파종 계획에 참가하기 위해서였고 역겨운 외국인들을 몰아내고 모두를 구해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뿐이라는 강한 직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린 박재문 박사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으니, 이미 자신은 저질렀고 모든 일은 시작됐다.
3
어서오세요. 손님.
...
저기 뭐 따로 찾으시는 브랜드 있으실까요?
...
아니면 선호하시는 스타일이라던가...
...
저... 손님?
그런 마음을 가지며 살아왔는데, 오직 자기만이 파종 계획에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이자, 청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민들을 마주하자 재문이는 심한 낮가림을 부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학술원에 있었을 당시에는 맨날 보던 교수님들과 교관들과 후보생들 속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해 온 탓에 낮가림이 덜했지만 낮선 사람을 마주하면서 기억나게 된 사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낮가림이 매우 심해서 멘토였던 스티븐 한 선생님과도 일주일도 넘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역시 쉽게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으니, 더군다나 장소 역시 보통 옷가게가 아닌 전층을 다 쓰고 있는 최고급 양복점이었기에 후드티 모자 뒤집어 쓴 소년은 새빨게진 얼굴과 함께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거 건네드리면...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했는데...

재문이는 양손 덜덜 떨며 PASS라고 적힌 카드를 양복점 직원에게 건네주었고 직원은 도대체 이게 뭐냐며 요리조리 돌려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학생증 같아 보였지만 뭔가 좀 다른 디자인. 그렇다고 사원증이라고 하기에는 그 소유주가 너무도 젊어보였다. 안그래도 이곳에 오기에는 너무 비루한 복장이라 의심했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수상해보이는 카드까지 건내다니. 직원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왔냐고 따지려는 그때, 양복점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은 그 카드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는지 후다닥 달려와서는 깍듯하게 90도 각도로 인사하였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끼치고 말았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보다 직급 높은 매니저가 한참 어려보이는 아이에게 깍듯이 대하자 직원은 얼이 탔고 매니저는 그런 직원을 끌고 와서는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들리는 헉 소리.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해하는 모습. 그리고 둘은 동시에 뒤돌아서서는 재문이를 향해서 다시 한번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물론 무시받는 것보다 대접받는 게 좋다지만 극단적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에 부담감을 느꼈고, 안그래도 얼굴이 새빨게진 재문이는 인위적인 친절과 자신을 힐끗힐끗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재문이의 마음을 매니저가 캐치하게 되면 VIP 분들만 입장할 수 있는 층으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했고 재문이는 지금 이 곳만 피할 수 있다면 어느곳이든 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엘레베이터에 단 둘이 타자 매니저는 패스워드를 입력하여 VIP층으로 이동시켰고 그 와중에 다시 한번 사과를, 그리고 자신의 회사는 청수재단과 매우 긴밀한 사이라며 어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저희 업체와 청수재단은 가장 오래된 협력업체거든요. 그리고 청수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는 학술원의 후보생분께도 무료로 정장과 악세사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부분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요.
네.
주로 정장을 판매하지만 사실 구두나 넥타이도 다른 업체에 뒤지지 않습니다. 특히 해외에서 온 바이어 분들이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아... 네.
재문이도 불편하고 매니저도 불편한 이 시간, 엘레베이터가 VIP 층에 도착하자 매니저는 거의 도망치듯 먼저 나와서는 안내를 시작했고 확실히 1층보다 채광이 기가 막히게 내려앉고 인테리어 구조는 물론 디스플레이 도구들까지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그곳은 VIP층이 확실해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VIP 손님들 역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 느긋하면서도 살짝은 거만함이 묻어져 나오는 눈빛으로 정장들을 보고 있었지만 모두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 재문이와 같은 20대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바글거렸던 1층보다는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었기에 재문이는 경계심을 풀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고, 학술원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학술원 의전팀에서 준비해 준 옷으로 입어야만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취향대로 옷을 골라야 하는 시간, 재문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때 채광이 내려오지 않는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독특한 디자인의 정장들이 있었는데 기존 정장들보다 좀 더 각져보이고 엔틱해보이는 정장, 매니저의 말로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선호하시는 '옛날스타일의 정장' 이라고 했다. 매니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재문이는 뭐에 꽂힌 듯 그것들이 있는 곳을 향해서 거침없이 걸어갔고 특히 칠흑처럼 빛나는 검정색 정장, 카라 부분과 앞 주머니 부분에 은밀하지만 날카로운 빨간선이 그려진 정장에 반한 것처럼 뚫어져라 보더니 입어봐도 괜찮냐고 물었다.

네? 네. 마음껏 입어보세요.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순순히 옷을 건내준 이유, 만약 그 사실을 말하면 "저 무시하세요? 그 정도는 압니다."라는 말을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청수 재단이 직속 관리하는 학술원, 그 학술원의 후보생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을테고 말이지. 탈의실로 들어간 재문이가 두꺼운 검정 후드티를 벗고 정장을 입는 내내 매니저는 말할까 말까 수십번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 문제의 정장을 입은 채로 재문이가 거울 앞에 서는 순간, 들어올 때부터 뾰루퉁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긍정적이고 만족해하는 표정이 퍼지는 순간, 결국 매니저는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 정장은 여성복입니다!
아...
...
네. 저도 알고 있었어요.
남성복과 다르게 곧지 않은 어깨 라인, 허리 굴곡을 최대한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디자인, 조금은 더 부드럽고 섬세한 안감, 그리고 반대에 위치해 있는 단추 위치. 재문이가 보통 성인 남성들보다 작은 편이라고 해도 엄연히 남자였기에 어깨 라인이 꽉찼고, 팔근육과 몸매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타이트한 핏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칠게 숨을 쉬면 복부 쪽에 압박을 느낄 정도로 꽉 조이는, 정장보다는 잠수복을 입은 것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몸태는 흉물스러운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매니저가 이때까지 봐온 남성 정장핏 중에 제일 이해 가지 않는 핏이었다. 나이드신 분들이나 입으시는 앤틱풍한 정장을 젊은이가? 거기다 여성복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니저는 정말 그 정장으로 결정한 것이 맞냐고 물었다.
정말이신거죠? 확실하신 거 맞죠?
...
손님?
으음...
저... 손님?
으으으으음.....
사실 매니저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재문이의 성격상 한발자국 더, 아니 몇십발자국 더 나아가 생각하는 타입이었기에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너무 기이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고민됐지만 다른 정장으로 갈아입을 마음, 지금 이 핏을 포기할 마음, 전혀 없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 숙였지, 이때까지 의전팀에서 준 노멀한 정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재문이는 소리없는 반항을 하며 그 옷을 고집했다. 도대체 왜 그러지? 분명 자기 눈에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물론 남성인 이상 남성복이 추구하는 미적 기준에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여성복만이 가지고 있는 미학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치명적이였으며, 특유의 정장핏으로 무장된 자신의 모습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왜 이런 이상한 것에 꽂히게 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 하는 재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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