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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4

단편소설, 팬픽, 팬아트/팬픽

by @blog 2025. 11. 3. 15:26

본문

 
 
 
 


1

 
 

  무더운 여름날, 재문이가 학술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매우 어린 시절, 부모님 손에 이끌려 청수재단 본사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 여름 햇빛에 맞춰 유난히 빛나는 건물 외관. 오직 실용성에 맞추기 위해 군더더기를 모두 제외한 죽음의 직사각형.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기분에 재문이는 숨을 죽이며 부모님과 함께 청수재단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외관만 거대하게 만든 것이 아닌 내부 역시 기존 건물에 적용시키지 못했던 에어컨디션 시스템과 자연 풍광 조절기능으로 인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도시의 건물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들었는데, 더위에 숨이 턱 막히는 바깥과 다르게 시원하면서도 다시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수많은 인파들, 백화점처럼 쉴 새도 없이 움직이는 직원들과 그들과 연관된 외부업체 직원들. 단순 방위 업체를 넘어서 하나의 국가를 장악한 기업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재문이는 짓눌렸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아간 청수 재단 본사는 위압적으로 웅장하기보다는 동네 미술관처럼 아담한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잘 다져진 도보부터해서 정원과 탁 트인 전경이 기품과 품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서 있는 정장 입은 키 큰 남자를 보자 이곳이 청수재단의 진짜 본사, 임원진들이 모여 프로젝트 협의를 하거나 보안 단계가 높은 임무 계획을 위하여 따로 지어진 비밀 사옥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안녕하세요. 한재문 후보생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로 보이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시작된 수많은 보안 검사들, 미륵보살돔에서 발급해준 외출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면 인식 스캐너부터 해서 지문과 홍채와 자신의 모든 것을 탐색해 내는 시간을 거치기 시작했다. 첨단 장비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재문이가 테스트를 받고 있을 때 장비에 반사되어 보이는 비서의 표정이 뭔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여기가 무슨 패션쇼도 아니고 가장 엄중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인데 옛날 스타일의 정장, 그것도 타이트한 정장을 택하여 부담스러울 정도의 몸매 굴곡을 보여준 재문이를 아니꼽게 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하더라도 학술원 졸업생인 재문이가 훨씬 더 높은 직급이었기에, 청수재단 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유명 인사였기에, 아니꼽게 보는 것을 끝으로 프로젝트 룸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재문이가 자리에 앉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정장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으니, 혹시 의전 업체에서 뭐 착오가 있었나요?
 

 


 
잘못된 사이즈의 옷을 줬다던가, 직원분이 실수했다던가.

...

아 맞네, 단추 위치가 이상하네. 직원분이 실수하셨나보네요.

...

...

...

 

 


  국가의 실세들이 중요한 회의를 나누는 장소이다 보니 소리에 대한 보안은 필수, 햇빛이 시원하게 들어왔어도 햇빛을 맞은 나뭇잎 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프로젝트 룸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한 조용한 장소에서 재문이가 어둡다 못해 살짝 화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비서는 재빨리 임무 브리핑을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투명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다면 프로젝트룸 안은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찰 뻔할 정도로 재문이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고 재문이가 건네받은 임무 역시 예민함을 필요로 한 민감한 주제의 임무였다.
 
 

최근에 시딩 프로젝트 참가자 정보 유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빠른 조치와 파종단 전체 인원중 0.1%인 10명만 유출이 된 터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없었고요.

제가 알기로는 꽤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파장이 있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없이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정보 유출 용의자로는 학술원 출신 후보생들이 주도를, 그리고 특정 종교단체에서 지원을 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애지중지한 마음으로 키운 장군이 적군의 장군이 되어 되돌아온 꼴이었다. 특히 그들은 어떠한 앙심을 품었는지 파종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참가자들의 정보를 유출시켰고 이제 막 성인이 된 재문이가 학술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파종단이 되고, 거기다 학술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개척단 커뮤니티에 활동했다는 사실에 파종단이 되기를 희망했던 일반 시민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됐다. 그리고 그 화살은 모두 재문이에게로 쏠리게 되면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억울한 상황. 결국 정보 유출 당한 10명을 파종단에서 제외시켜 버리자라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한 후보생이 청수재단에서도 눈여겨볼 정도로 뛰어난 후보생이었기 때문. 결국 긴 회의 끝에 나온 말이 바로 그 후보생을 테스트해보는 겸 이 일에 대한 처리를 떠 넘기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파종단 정보 유출 사건의 해결사로 재문이가 지목되게 되면서 덕분에 청수재단 임원진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고귀한 장소에 들어올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물론 실패할 경우엔 다시는 청수재단에 얼씬 거리지도 못하는 취급을 받게 될 테지만.
 

 



 

 

 


...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고 비서는 말없이 투명 태블릿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아 도톰한 볼을 가진 문제의 후보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한 듯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태블릿을 바라보는 있었으니, 형식적인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은 길어 보였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자신처럼 지도자 겸 첩보 요원으로 육성된 학술원 후보생을 제거하라는 것. 종교단체는 청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청수의 첨단 기술로 이루어진 학술원에 머물면서 청수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정보와 행동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차기 지도자 후보생들, 걸어 다니는 기밀 정보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 임무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총과 정보로 무장한 그들에게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겠지.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을 타기도 전에 지구 땅 속에 묻혀 썩어나갈지도 몰랐다.
 

...

...

...

...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뭐부터 하면 됩니까?
 

 

 
  재문이의 대답에 비서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지금 주도자 중 한 명을 구금했다고 하니, 학술원이었을 당시 후보생 번호가 77번이라고 합니다. 혹시 친분이라도 있으셨나요?
 

 

 

77번이요? 아...

왜 그러시죠?

아... 그냥... 다른 형들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 형이라서요.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하필 77번이라니. 커다란 키로 자기를 짓누르는 장난을 수도 없이 쳤던 77번이라니. 비서는 77번이 있는 건물 지하 심문실로 가보는 거 어떻겠냐고 하자 재문이는 주머니 속에서 검정색 장갑을 꺼내 꼼꼼하게 끼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 형과 닿는 그 모든 것을 불쾌하니깐. 재문이에게 있어 77번은 불쾌한 형이었으니깐.
 
 



2

 


 
  행운의 번호가 두 개나 붙여져 있는 77번은 유전자의 행운도 받았는지 키 185cm라는 큰 키와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 성적 역시 save 등급 졸업생이 될 정도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지덕체 모두를 가진 완벽의 표본에 속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77번은 강박증처럼 무언가에 하나 꽂히면 미친 듯이 집착했는데 하필 재문이가 77번의 집착의 대상이 되면서 기분 나쁜 견제와 외형에 대한 비교를 하였다.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닌 원래 키가 작은 게 분명하다며 키 크는 약이라도 처먹어야 하지 않냐는 걱정을 가장한 인신공격, 키 작은놈이 거기 크기도 작다면서 이 참에 여자로 성전환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견제를 뛰어넘은 맹목적인 비난. 재문이 역시 자신이 연예인처럼 잘생긴 외모에 키 큰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콩깍지 씌인 26번이 매우 특수한 케이스라는 사실도 크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그러나 학술원은 모델이 아닌 지도자를 육성하는 곳, 정치적 감각은 물론 통솔력, 종합 판단 능력, 대외 활동 업적에 있어 근소하더라도 재문이는 77번보다 앞서 있었다.


  보이는 성적뿐만이 아니었다. 77번이 나무에 온 집중을 하고 있을 때 재문이는 숲을 보고 있었다. 후보생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인 학술원이 돌아가는 구조, 존재 이유, 후보생들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들, 그리고 미륵보살돔에서 보안등급이 가장 높은 데이터 센트럴까지 재문이는 손아귀를 뻗쳤다. 그리고 드디어 개인 노트북으로 데이터 센트럴 서버에 첫 침입에 성공하는 순간, 재문이는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고 문제 되는 것이 없는지 최종 확인해 보았다. 37번 개인기숙사 CCTV 변조 기능 이상 무. 1분마다 갱신되는 보안 매트릭스에 대항하는 자동 알고리즘 시스템도 이상 무. 토요일 늦은 새벽, 정말 우연히 누군가 재문이의 기숙사에 들어오고 이 장면을 본다면 이때동안 쌓아온 이미지, 업적, 그 모든 것이 끝난다. 학술원 퇴학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처벌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서 비쳐오는 듯한 푸른빛을 띤 데이터 센트럴 서버, 그리고 그곳에는 오직 청수에만 있는 불가사의, 최종 시뮬레이터가 있었다.

 

  학술원 후보생의 모든 정보를 기록화하는 데이터 센트럴과 데이터를 가지고 모든 지 구현화할 수 있는 최종 시뮬레이터. 사실 최종 시뮬레이터가 만들어진 이유는 기원발견 스캔들로 인해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외계인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제 그 타겟이 후보생으로 바뀌면서 후보생 자신조차 인지 못하는 작은 습관부터 입술을 더듬는 간격, 눈 깜박이는 횟수, 샤워할 때 걸리는 시간, 그리고 자기만이 아는 이상 행동들, 그 모든 것들이 데이터 센트럴에 기록되고 최종 시뮬레이터를 통하여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미륵보살 돔 가장 비밀스러운 서버 속에서는 후보생들은 죽지 않고 구현화된 천국에서 영원히 살고 있었으니, 그런 최종 시뮬레이터의 정확도는 86%, 깐깐한 청수 재단 역시 최종 시뮬레이터를 절대 신임하면서 파종단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도 시뮬레이터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재문이는 자신이 파종단으로서 선발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후보생 보안번호를 입력, 현재 시뮬레이터는 텍스트 모드이기에 단 한 문장으로 그 후보생에 대한 행동결과를 보여주었고 재문이는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 비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 671964026. [파종단] 으로서 적합. 파종단 대표가 되어 수월하게 임무를 진행.

 
  매우 긍정적인 결과에 순간 재문이는 힘이 쫙 빠지면서 책상 위로 엎드리고 말았다. 박재문 박사 살해 사건부터해서 내심 불안해했지만 시뮬레이터는 물론 그 누구도 재문이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학생이라 인식되어 있으니깐. 볼일을 다 본 재문이는 테이터 센트럴 서버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서버의 푸른 화면이 그의 차가운 눈동자 위로 내려앉는 순간, 모든 것이 어둡고 안개처럼 불투명한 새벽 시간, 재문이는 어둠 속을 달리는 야행성 동물처럼 과감하게 시뮬레이터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고 77번의 미래에 대해서도 묻기 시작했다.
 


-302834620. [파종단] 으로서 부적합. 청수 방위사업청에 배치 요망.

 
  그 대답에 재문이는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으니, 파종단의 차기 리더가 되어 너처럼 뛰어난 요원을 제대로 써먹겠다고, 첫 번째 임무로 반드시 너를 보내줄 테니 각오하라며 반협박식으로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까보니 파종단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럴듯하면서도 예상외의 답변을 준 시뮬레이터에 맛 들인 재문이는 하드코어 변태부터 해서 자신에게 미묘한 집착을 보이던 후보생, 뛰어난 후보생, 미련한 후보생, 그 모두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 물어보았고 심지어 사망처리 되어버린 후보생까지 만약 살아있었다면 자신과 함께 파종단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결과가 뜨자 재문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누나.

 
  재문이의 얼굴이 새파래진 것은 데이터 센트럴 서버 화면이 푸른색인 것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답변을 시뮬레이터가 내놓았기 때문이다. 함께 파종단은 개뿔. 이런 시뮬레이터의 결과라면 학술원 퇴학은 물론 후속조치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시뮬레이터 결과였다. 재문이가 아는 26번과 실제 26번 사이의 거대한 괴리, 통제력 강한 국가 한가운데서 쿠데타를 일으킬 만큼 과감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깐. 하지만 정자 바르게 쓰인 시뮬레이터 글씨체처럼 사람보다 더 신임이 가는 기계이자, 씁쓸한 결과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운명을 알려주는 신탁, 거스를 수 없는 예언이었다. 청수의 입장에서 그녀의 죽음은 환영받는 일이었지만 새벽 몰래 데이터 센트럴 서버에 침입 한 도둑에게 있어서는 씁쓸한 소식이었다.
 
 


3


 
  그런 정확한 시뮬레이터의 말을 거역하고 종교단체와 손을 잡고 파종 계획을 실행하려고 한다? 거기다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파종단의 정보를 유출시켜 정치공작을 한다? 큰 틀로 보자면 청수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이자 쿠데타였고 결국 77번은 지하에 포박된 채 정보를 뱉어 내라는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학술원 출신인지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심문관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면서 진전이 전혀 없는 그때, 피냄새, 땀냄새, 비리비리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심문실에 재문이가 등장했다.
 


아. 오셨습니까?

 
  초보 심문관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심문관이 만들어낸 작품, 무작정 때리는 것이 심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상처와 멍자국이 가득했지만 눈빛에서 아직도 강인한 자아가 엿보이는 77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선제압을 가장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재문이를 반겨주었으니, 왔어?
 
 


 



  

  심문을 받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심문관을 웃으며 반겨준다라, 그만큼 엉망에 가까운 심문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의 각오와 마음이 강해지고 여유로움이 생겼다는 증거겠지. 줏대 없는 주인으로 인하여 보이는 사람마다 물어뜯는 맹견처럼 새로운 심문 방법과 새로운 교육이 필요했다.

 


형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재문이 역시 환하고 고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고, 윽!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머리채를 집어 잡은 후 의자에 앉혔다. 그 후 지옥에서 단련해 온 오른손, 그 오른손 아래 손바닥으로 그의 윗니등을 무식하게 짓누르기 시작하자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무언가 금 가는 소리, 찢겨지는 살점,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에 재문이의 차가운 눈빛은 선명해져갔다. 그때 재문이는 심문관에게 이 사람 어깨 좀 잡아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고 한층 더 안정적으로 고정된 77번과 그런 그의 윗니를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으니, 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느껴지는 균열의 감각, 하얀 이가 새빨간 피로 뒤덮여지면서 강인해 보였던 77번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고작 이거 가지고 이가 뽑히지 않다는 것을 재문이는 알고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해서 어설픈 발치 시도가 더 고통스러움을 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러나 이를 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심문은 명백한 심리전 싸움이었고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었다.



뭐 얼마나 아프다고 그래. 실실 쪼개면서 반겨주더니 벌써 포기한 거야?

흐윽....흐흐윽....

엄살이 너무 심하다. 형.

흐으으으....으윽...

솔직히 말해봐. 좀 약했지? 아랫니도 해볼까?


  그렇게 아랫니를 만지작 거리는 그때 지켜보던 심문관이, 아랫니까지 한다면...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로 심문실을 일순간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심리전의 흐름을 단숨에 박살 내는 그의 한마디에 재문이도 그렇지만 77번 역시 매우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못했다. 대신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메뉴얼대로 통각 자극제와 증폭제도 투여해 보고 에고 파라미터를 낮추는 약물과 폭행까지 해봤지만 변태처럼 쳐 웃기만 한다면서 재문이에게 일러바치듯 말하는 심문관은 말했다.
 
 


그런 거 안 통해요. 심문 수업 때 다 맞아 봤거든요. 질리도록 맞아봤지. 그렇지 형?
 


  하지만 맹견은 성질 머리가 있었는지 새로 온 주인의 말을 듣기는커녕 아직 말짱한 어금니로 재문이의 손가락을 있는 대로 깨물었고 뼈까지 잘라버리겠다는 각오로 깨무는 그에게, - 짜악. 장갑을 벗은 재문이의 왼손이 그의 뺨을 때렸고 안 그래도 멍들어있던 그의 볼 위로 또 다른 멍이 생길 정도로 힘이 실린 뺨 때리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77번의 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는 것이 복수귀 그 자체였다.


씨발.


   좆같은 심문관, 좆같은 손가락 통증, 좆같은 지금 이 모든 상황. 화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재문이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이상 처음부터 다시 심리전을 거는 수밖에 없었고 그전에 먼저 방해꾼인 심문관에게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나가 달라는 부탁 했다. 그러자 그가 오히려 심문을 받았던 것처럼 도망치듯 나가면서 어둡고 매캐한 공간에는 오직 둘,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지만 더럽게도 인연이 질긴 두 사람 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후보생이 사이비 종교하고 손이나 잡고. 안 창피해? 안 부끄러워?

개병신 같은 놈.... 옷 입은 꼬라지 봐라...

파종단 때문에 그런 거야? 파종단이 못 돼서 종교에 의지해 마음의 안정이라도 찾으려고 했어?

니 놈은 예전부터 기집년 같아서 꼴 보기 싫었어. 씹게이 새끼...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안창피하냐고. 귀족인 거 안 부끄럽냐고.

씨발놈 아주 젖꼭지 다 보일 정도로 달라붙은 거 입었네. 역겹다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미친놈. 정신병자처럼 자기 말이 옳다고 빽빽 소리 지르는 사람. 더 이상 내 성질머리 건드렸다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면 오히려 더 강하게 나올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타이르기에는 그의 의지가 너무도 견고했다. 분명 77번은 이런 식으로 초보 심문관을 괴롭혔을 것이고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때렸겠지만 성과가 없었겠지. 그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찾아내어 그곳을 벌리고 벌려 약한 살점을 노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재문이는 숨 죽이고 자신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날리는 77번을 가만히 보았다. 기집년, 쫄보 병신새끼, 씹게이새끼, 창놈 같이도 입었네, 고자새끼. 예전부터 77번은 재문이의 남성성을 건드린 비난을 달고 살았고 그런 그의 행동, 습관, 그리고 파악되는 패턴들. 사람의 상상력은 매우 주관적이고 공포감 역시 주관적이며 비난 역시 주관적이었기에, 자신의 남성성을 집요하게 건드리는 77번의 모습에 재문이는 이 방법이 유일하게 그를 겁 먹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 그만 진정해. 그나저나 피부가 많이 상했네. 예전에 형 피부 꽤 좋았는데.

 
  그렇게 재문이는 오른손으로 77번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고 부드러운 손길, 마치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대하다가 피 묻은 붉은색 입술까지 더듬어 만졌다. 그 순간 빈틈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77번의 눈에 균열이 생겼고 당장이라도 재문이를 죽이려는 그때, 오히려 재문이가 단단한 구두 뒷굽으로 77번의 발가락을 밟아버리면서 아까와 같은 등골 오싹해지는 비명을 울러 퍼졌다. 꽥꽥 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손수건으로 틀어막아버린 후 박자에 맞추어 그의 발가락을, 쿵.쿵.쿵. 찢겨지고, 뼈가 드러나고, 조각나고, 반갈죽 나면서 간신히 멈추었던 그의 눈물샘이 다시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재문이는 급소를 맞은 것처럼 고문당한 남자의 어깨 위로 얼굴 기대어 가뿐 숨을 돌리기 시작했고 두 남자의 거친 숨소리, 좁은 장소에서 교환되는 뜨거운 숨결. 그 사이로 재문이는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는 끈적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형... 나 섰어...
 

  77번은 괴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숨을 멈추고 눈알만 간신히 돌려 그를 훔쳐보았다. 무성욕자처럼 어떠한 욕망과 감정을 보여주지 않던 재문이가 난생처음으로 얼굴을 붉히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금방이라도 울 걸 같은 표정으로 바라본 것이다. 살짝 휜 곡선 형태를 유지한 채 움찔거리는 그의 허리. 여성용 정장인 덕분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몸선. 무언가를 갈구하듯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77번이 그렇게 찾아보려고 했던 재문이의 약점은 심문실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로 은밀하고 독특했으며 상상이상으로 변태적이었다.
 
 
 

4
 
 
- 쾅!
 


  심문실 밖 복도, 비서와 심문관이 초조한 얼굴로 재문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심문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등장하자 둘은 반김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냐고, 성공했냐며 재촉하듯이 물었지만 재문이는 대답대신 77번의 역겨운 침과 피가 묻은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며 이것 좀 불태워 없애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심문관에게 심문 중에 절대 방해해서는 안된다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협조한데요. 그래도 치사량 근처까지 약물 투여하고 빼낼 수 있는 정보 다 빼내봐요.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아...

 
  아직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심문 때문에 재문이의 정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그런 그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둘은 최소한으로 말을 줄였다. 대신 비서는 희소식이 될만한 정보를 전하면서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노력했으니, 지금 파종단 선정으로 인해 중요인력들이 대거 빠져나간 상태지만 인력 보충으로 요원 두 명을 배치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긴 혼자서 그 임무를 하라는 건 자살행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던 재문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보내달라고 했고 비서는 오늘 저녁 중으로 접선시키겠다 약속했다. 미륵보살돔 최종 시뮬레이터가 뽑아 준 현재 임무에 최고로 적합한 요원으로 말이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서류에 적혀 있는 대로 인력은 물론 무기, 정보, 자금까지 최대한 도울 수 있는대로 돕겠습니다.

 
  최첨단 무기를 주고 방탄복을 입히며 배 터지게 밥까지 먹였지만 결국 소년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과 뭐가 다른 건지.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에 재문이는 질려버린 듯 최대한 빨리 보내달라는 말을 하며 그들에게 거리를 두었다. 물리적으로든, 그리고 심리적으로든 그들에게서 멀어지기 싶었기에 늦은 오후 주황색 빛이 내리는 복도를 그렇게 혼자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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