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6

단편소설, 팬픽, 팬아트/팬픽

by @blog 2025. 11. 7. 19:25

본문

 
 
 
 
1



 
 
   자동차 폭발 사건은 어떠한 알림음이 되어 재문이와 3번, 62번에게 있어 정신을 빠짝들게 만들었다. 아, 잘못하다가 내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단순 게임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 있는 현실이구나. 게다가 문제의 자동차 주인은 실종처리 된 사람이라는 사실에 용의자는 생각보다 철저한 사람이자, 많은 조사와 정보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셋은 날이 밝자마자 네오부산 중앙 행정복지센터로 향했고 작은 건물에는 없는 에어컨디션 시스템 덕분에 깨끗한 공기, 고급 호텔처럼 높은 천장, 뛰어난 채광 덕분에 시원하게 들어오는 아침 햇빛, 하지만 사람이 바글 거렸기에 답답한 공간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차례가 다가오자 재문이는 민원 담당자에게 앞에 섰지만... 담당자는 재문이를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재문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후보생이자,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다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은 자신의 민낮을 보여준 사람이었는데. 아침 시원하고 맑은 햇빛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색이 어두운 남자,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온 창백한 얼굴, 알 수 밖에 없는 그의 이름, 그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뭐 때문에 찾아오셨냐고 건방지게 말했다. 그러자 재문이는 주머니 속 외출증을 꺼내어 건내주자 이게 뭐냐고, 뭐 어따 써먹는 거냐고 반문했다.
 

 
바코드 있잖아요. 스캐너로 찍어보면 권한과 협조 사항에 대해 다 뜰겁니다.

...

아니면 담당자 연락처라도 알려드릴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남자는 외출증에 박혀있는 발행처, 미륵보살돔을 절대 모를리 없었고 재문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아... 아까부터 계속 재문이를 상대하기 싫은 것처럼 티를 내자 3번이 한소리 하려는 그때, 재문이는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보자고, 그리고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자면서 말이다. 외출증에 세겨진 바코드를 스캔하자 모니터 화면에 팝업되기 시작하는 엄청나고 대단한 권한들, 법 조항들을 들먹이며 복잡하게 쓰여진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경찰 그 이상의 권한을 가졌으니 협조하라, 그러지 않을 경우 경고는 물론 법적인 처벌 역시 받을 수 있다. 한쪽 턱을 괴며 시큰둥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던 남자는 입을 열었다.
 



하, 조올라 대단하신 사람인가 보내. 뭐 청수재단 쪽에서 왔어요?

네.

그래서 뭘 도와드리면 되요?

정보요. 사람에 대한 정보.

...

...

어이가 없네 정말...
 
 

 
  말은 그렇게 했어도 학술원 중퇴생 174번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자기 앞에 놓인 팻말을 '외출중'으로 바꿔두고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넷은 시끄러운 공무원과 컴퓨터들 사이를 지나, 직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건물에 들어간 것처럼 갑자기 건물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네오부산 행정부의 진짜 본거지인 그곳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모든 벽면이 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었고 덕분에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플로팅 디스플레이가 떠다니면서 분주하게 회의하는 모습, 그리고 파종단 선출로 인한 인력 부족의 여파로 피곤에 쩔은 것처럼 쾡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그들과 마주친 몇몇 공무원들은 174번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직급 때문인지 깍듯이 인사했고 이에 62번은 대단하다면서 그를 추켜 세워주었다.
 
 

나쁘지 않네. 야, 나도 너처럼 공무원이야. 중퇴하나 졸업하나 어차피 똑같은 거라고.

너랑 나랑 같은 공무원이라고 생각해? 기피 부서 부동의 1위인 민원 관리팀이랑 외교부가 같아?

아까 보니깐 직급에 팀장이라고 적혀져 있던데 우리 나이에 팀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너 그거 진짜 대단한거야.

줘도 안하는 부서에서 팀장 달면 뭐해. 너는 서기관이라며? 니 나이에 그게 가당키나 하냐? 

 
 

  아까는 불분명해 보였지만 이젠 명확해졌으니, 174번은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청수재단의 권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지 전혀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재문이 덕분에 요즘 잘먹고 잘산다라는 말, 훈련 때 다쳤지만 이제는 말짱해진 손으로 개좆같은 민원들만 올리는 천박한 시민들 상대해주느라 행복하다는 말, 인간혐오증이 생겨서 학술원 때 배웠던 호신술로 누구를 죽여야만 속 시원할 거 같다는 살별한 말들을 꺼냈다. 
 

 
알겠니? 다 니 덕분이라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더라.

...

지극한 은혜가 고마워서 한번 연락했어야 했는데... 못해서 미안. 아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

안심하고 있는 거지? 내가 한바탕 뒤집었어 엎을까봐 걱정됐는데 다행이다 싶었지?
 
 


너, 재문이한테 왜 자꾸 그러는 거야?

  결국 화를 참지 못한 3번이 말에 끼어들었고 지진해일 때 죽을 뻔한 거 살려줘서 고맙지 않냐며 재문이 편을 들었지만 둘의 모습에 있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히 나뉘었으니, 계속해서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는 174번과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지키는 37번. 시민들의 정보가 담긴 중앙통제실로 들어가기 전, 174번은 혹시 셋이 같은 팀이냐고, 그러면 이 아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냐면서 자신의 학술원 자퇴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174번의 의문스러운 말에 3번과 62번이 무슨 소리냐고 하자, 재문이는 대화의 맥을 끊기 위하여 이 방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냐고 물었지만 대화 주제를 절대 바꾸고 싶지않았던 174번은 어리벙벙해하는 둘에게 못박듯이 이야기 했으니, 내가 자퇴한 건 저녀석 덕분이야. 사실 내쫒겼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다들 몰랐나봐? 소문이라도 안퍼졌어?

...

내가 자퇴했던 이유가 저 애 때문이라는 언급조차 없었다고?

...

대단하네 한재문. 넌 진짜 대단한 놈이다.

 
  방금까지만해도 재문이를 변호해주었던 3번이지만 홀로 중앙통제실로 들어가 앉은 검정 후두티의 남자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후두티 모자를 뒤집어 쓴터라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꼭 다문 입술, 쉽게 열리지 않은 입, 쉽게 보여주지 않은 마음. 역시 첫인상이 그 사람의 정확한 인상이라는 말은 사실인걸까? 첫인상에 편견을 가지는 것이 신변에 좋은 걸까? 왜냐면 3번이 기억하는 재문이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계심 많은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며 절대 입을 열지 않은 아이. 다른 후보생에 비해 어리다는 것을 감안해도 재문이의 낮가림은 유독 심했고, 무엇보다 친구가 되려면 마음의 교환이 필수적인데 반해 재문이는 마음 교환에 있어서 항상 우위에 독점하고 싶었는지 자기 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타인의 마음만 득달같이 알려고 했던 이기적인 모습 보여주었으니깐.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깐.
 
  방금전까지만해도 3번은 재문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174번이 오해한거라 생각했지만, 재문이의 가면놀이에 자신이 놀아난 것이 아니었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그 외의 것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가려버리는 이미지 메이킹 놀이에 속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
 

 
  


할수있습니다! 괜찮아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요!


  174번. 창백한 피부색과 삐쩍마른 키큰 체형의 남자. 매사에 너무 진지한 후보생. 노력은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재수없는 사람. 벼랑 끝에 매달린 레밍처럼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의 순간 뒤돌아가려고 했지만 때는 너무 늦어버렸고 모두 그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174번은 당장 훈련을 그만두라는 교관들을 향해 결코 그만 둘 수 없다고 목청껏 소리쳤지만 이전 테스트 때문에 팔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고 재문이는 잠수복을 입는 것도 깜박한 채로 그 팔을 오래도록,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지켜보았다.

  사실 174번은 평소에도 위태롭게 보일 정도로 학술원 커리큘럼에 따라가는 속도가 형편없었고 이 모든 건 리듬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탓이었다. iso 명상 후 엉망이 되어버린 몸을 가지기 -> 수업 진도에 따라지 못함 -> 평소 체력 단련을 못함 ->iso 명상 + 체력 테스트 시작 -> 부상당한 몸으로 훈련을 마침 -> iso 명상 후 엉망이 되어버린 몸을 가지기. 간신히 회복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각종 테스트들 때문에 몸이 나만하지 못했고 회복능력 역시 크게 떨어지면서 그는 병자처럼 어딘가 아파보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결국, 그 위태로운 사이클의 끝을 맞이하듯이 간신히 근력테스트를 마쳤지만 누구를 연상하게 만드는 팔 상태에 재문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174번은 재문이가 다가온지도 모른 채 교관과 실랑이 하고 있었으니



문제없다니깐요!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면 되잖아요!

레귤레이션이 바뀌어서 안된다니깐!

제 팔이고 제가 제 상태를 잘 알아요! 할 수 있어요!

전에도 너랑 똑같이 팔 다친 후보생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줄알아? 실종됐어. 그애도 자기 상태는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했어.

그애는 그애고 저는 접니다. 그리고 저는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이고요. 보내주세요.
 

 

 
형. 잠깐 이야기 좀 할래?

  갑작스러운 재문이의 등장에 교관은 안도의 한숨을, 174번은 다른 후보생도 아닌 재문이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재문이는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다는 말로 보통 후보생들은 모르는 곳, 하지만 담배 피는 후보생들은 아는 은밀한 장소로 가자 말했고 그는 순순히 재문이의 말을 따라주었다. 


  총기 보관실 옆 기타 비품실, 물품의 이상적인 상태 유지를 위해 항상 습기와 온도와 환기 기능을 조절하는 에어컨디션이 작동되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후보생들은 그곳을 흡연실로 삼았다. 그래서 인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미세한 담배냄새, 비흡현자인 재문이는 그 작은 냄새를 알 수 있었지만 담배를 피던 174번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게 났다. 그렇게 둘은 각자 단단한 박스 위로 앉았고 은은하게 감도는 비품실 안의 푸른 빛. 별로 친하지 않았던 둘의 만남. 친해질 수 없을 만큼 확연히 차이나는 성적과 학술원 내 평판 때문에 둘 사이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하자는 재문이의 태도에 174번은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때마침 그가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 힘들지 않아?


  꾸짖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모습에, 너무도 많은 사람의 외면을 받은터라 관심에 목말라 있던 와중에 그런 말을 듣자 174번은 그동안의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왈칵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회복할 시간, 회복 될 시간을 받지 않으며 하염없이 달려왔으니깐. 하지만 힘듬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학술원을 나가던가, 다른 교육기관으로 이직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버티던가. 하지만 어떻게? 하염없이 우는 그의 모습에 재문이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봤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조금은 이성을 되찾을 시기, 그 기막힌 타이밍에 맞춰서 재문이는 입을 열었다.



형 상황 충분히 이해해. 나도 어린 나이에 학술원으로 들어왔잖아. 누가 돌봐줬으면 하는 마음이라던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지.



그리고 재문이는 좀 더 본격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 가리려고 하는 그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알아. 그런데 그것을 감안해봐도 팔상태 너무 좋지 않아. 잘못하다가는 다시는 못 쓸지도 몰라.
이럴 줄 알았어. 또또또 그만두라는 말, 때려치라는 말. 너 내 입장이 되보지않으니깐 그런게 쉽게 그만 두라고 말하는 거 아니야? 고작 교관들이나 하는 소리 하려고 여기로 날 부른거야?


모든 정신이 허물어지고 약해지는 174번과 달리, 재문이의 정신은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컴퓨터처럼 음높이 변화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형은 형의 입장만 생각하겠지. 나무가 나무의 입장만을 생각 것처럼. 자신의 안위, 위치, 번식은 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지만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큰 나무는 달라. 나무들 사이에 높이 솟아올라 자신이 있던 곳이 미치도록 거대한 숲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이상한 의무감이 생겨.

그게 뭔 소리냐?

...

니가 우리들의 대장이라는 거냐?



  그제야 친절이라는 안개가 걷어나면서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재문이는 그게 당연하지 않냐는 뜻으로 자기보다 나이 많은 그를 부하 대하듯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채로 바라보았다. 다른 후보생들이 성인의 나이에 진입한 지금, 4살이나 어린 재문이는 고등학생 나이에다가 어느 정도 근육과 골격이 자리 잡혔다고 하더라도 각진 턱선이 아닌 중성적인 얼굴형을 가진 소년이었다. 하지만 커리큘럼을 문제 없이 따라가는 것은 물론 성적 역시 최우수 등급을 유지하는 순간 깨닫게 됐으니, 아,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구나. 특히 지진해일 사건 이후 학술원 전체 분위기라던가, 미륵보살돔에 흐르는 기류, 다시 하르방 쓰나미와 같은 재앙이 덮쳐올 때 후보생들을 어떻게 대피하고 어떻게 보호해야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다른 후보생들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난 누구보다 냉정하게 형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형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이거야.



서늘하고 깨끗한 공기가 항상 유지되지만 최소한의 빛만 써서 어두침침한 비품실. 174번에게 있어서 재문이는 딱 그 느낌이었다. 모든 면에서 깔끔하고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신임이 가는 그를 믿고 싶었지만, 재문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174번.
 



나가라고?

응. 학술원을 완전히 떠나라고. 그리고 당장 치료받아. 몇년은 병원 신세 져야 하는 걸 알잖아.

결국에는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지금 형의 상태와 학술원 후보생들의 분위기를 종합해서 내린 최고의 선택이야.

장난해? 남들 좋아라하는 분위기를 위해서 나가라는 거냐?

아까도 말했잖아. 학술원 입장 뿐만 아니라 형의 상태를 보고 내린 결론이라고. 그거 알아? 매번 형이 훈련할 때마다 보여주는 절박함이 다른 후보생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것을. 자기도 그런 처지가 될까봐 걱정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나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




174번은 자신의 자존심을 짓뭉게고 있는 어린놈에게 질 수 없다는 뜻으로 강하게 맞받아쳤다.
 



어쩌라고. 난 못 그만둬. 그만둘 수 없어. 너 학술원 중퇴생이 된다면 사회에서 어떤 취급 받는지는 알기나 해?

알아.

그런데 지금 그만두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

집에서 쫒아낼지도 몰라. 귀족 자격이 박탈 될지도 모른다고!

안다고.

이때까지 배워온 기술들을 쓰지도 못한다고! 충성심도 없는 놈이라고 찍혀 인생 망한다고!

...

난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그 순간 재문이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데자뷰를 느꼈으니,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훈련을 마쳐야한다는 후보생 앞에 어버버 거렸던 과거, 팔에 피멍이 들어도 훈련을 받겠다던 후보생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학술원에서 쌓아온 위신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을 알았으니깐. 이에 재문이는 예전처럼 제발 가지말라고 질질짜며 부탁하는 것이 아닌 내 눈 밖에 난다면 어떠한 보복을 할 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학술원 안에서는 물론 졸업하고 나서도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라는 강도 높은 협박이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마.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어. 잘 생각해봐. 내가 왜 여기로 오자고 했는지 말이야. 그리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비이성적인 눈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


  같은 후보생끼리 무슨 권한이 있다고 자신에게 경고를 주는 건지 원. 처음 174번은 어이없어 했지만 자신의 위치와 그의 위치를 깨닫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어째서 사람과 CCTV가 없는 이곳으로 끌고와 이야기 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장소 자체가 바로 협박이었던 거다. 만약 둘이 정치 싸움을 벌인다면,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말을 거역 한다면 그는 형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거짓 고발을 해서라도 자신을 나락으로 털어트리겠지. 그렇게 된다면 교관은 물론 교수님, 후보생, 미륵보살돔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왜냐면 이때까지 쭉 옳은 사람으로 살아왔고 174번 역시 믿고 속을 정도로 완벽한 이미지였으니깐. 어마어마한 업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보살핌이 필요한 미성년자니깐.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고 174번은 보기 좋게 걸려버리고 말았다. 빠져 나갈 구멍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

...

...

...

알았어...

...

니 말대로 할게...



  결국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불안정한 174번은 두가지 모두 완벽한 재문이에게 항복 선언을 했고 재문이는 내심 기뻤지만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주인이 노예에게나 하는 행동에 반발했을 법도 한데 174번은 심적으로 너무도 지쳐있었고 아픈 팔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웠기에 온순한 강아지처럼 쓰다듬을 받았다. 무언가에 세뇌되어버린 것처럼 텅비어보이는 눈을 가진 그의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재문이는 평소에 하지 않았던 볼 쓰다듬기, 입술로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마에 입맞추는 스킨십을 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입을 바짝 가져다대고 속삭이는 것으로 174번의 치열한 학술원 투쟁기는 마무리 되었다.



형... 정말 잘 생각했어.







 
3



 

 



돌이켜보면... 우린 너무 어린 나이에 목적 하나만으로 키워졌어.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거야.

...

그런 우리가 사회에서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천만에, 말도 안되는 소리. 한번 나가봐. 너희들은 이질감 같은 거 안느꼈냐?

...

적어도 이곳에서는 여자 취급이라는 게 있어. 여자는 힘이 약하니깐 도와준다던가, 신사로서 어떤 배려를 보인다던가. 그렇지? 




보디가드처럼 재문이 곁에 서있던 3번을 겨냥한 말,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숙인 채 174번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학생으로서 기본적인 대우도 못 받았어. 커트라인이 학생에 맞춰진게 아니라 학생이 커트라인에 맞춰야 했으니깐. 그래서 졸업하고 나서도 긴장감을 못 놓지 못해 미친놈이 되거나 누가 봐도 튀는 색으로 머리를 염색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명을 어떻게 해서든 해 보려는 애도 있지.
 


재문이 건너편에 앉아있던 62번도 그를 아니꼽게 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런 곳에 아주 어린 나이에 들어가고 문제없이 졸업한 아이가 있다면 그애가 정말 이상한거야. 보통 사람과 다른 생각 구조를 가졌을 것이고 감정부터 해서 자극되는 포인트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거지. 감정이 없다고 알려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원 아니야. 어쩌면 인간놈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마지막, 재문이를 겨냥한 말에 그는 둘과 다르게 어떠한 표정 변화도,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가 감돌던 비품실에서처럼 중앙통제실에서도 그는 깨끗한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깨끗한 사람을 타겟으로 자꾸 균열을 만들어보려는 어떠한 시도, 모든 후보생들은 재문이에게 고마워할 수 밖에 없다던 3번의 말과 다르게 자꾸만 흠결을 찾아내어 공격하고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견제를 한두번 받아본 재문이가 아니었기에 이 상황 역시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코웃음치며 그래서 뭐 어쩌라는 식으로 말을 받아쳤다.
 
 

시간 낭비했군.

?

나한테 귀한 건 시간인데 진짜 쓸때없는 말로 시간 낭비 했어.

하...

사적인 감정 좀 집어넣어. 난 형에게 책임감이라던가 미안한 마음 하나도 없으니깐.

아 그래?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형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고 나를 포함해 후보생 2명을 죽이려고 했고, 또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준 테러리스트를 찾으려고 온거야.
 


 
  재문이가 보인 무관심한 태도에 174번은 기다렸다는 듯이 학술원 자퇴 후 받았던 모진 고난과 역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보안상의 이유로 학술원 경력을 적을 수 없었기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는 문제 많은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이야기, 용기내어 학술원 자퇴생이라고 고백해도 문제였다.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는 청수재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청수 재단이 관리하는 교육 기관에서 충성심을 보이지 못하고 도망친 자퇴생이 자기 회사 직원이라면, 혹은 협력업체가 되어 거래 한다면 청수재단에 밉보일 가능성이 높으니깐. 계속된 거부와 거부를 받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귀족이었던 친척의 인맥 덕분에 운좋게 공무원이 됐지만 기피부서의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면서 후보생으로서 가졌던 자부심, 영광, 그리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자기 손으로 폐기처문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들마저 자신의 존재를 언급하기도 꺼려했고, 기대감 대신 천대와 무시 속에 살바에 차라리 훈련 받다가 죽어버리는게 더 명예로웠을거라고 생각이 드는 시간들. 알았냐 한재문? 차라리 훈련 받다 뒤지는 편이 더 좋았다고! 다만 그가 그러한 취급에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복수심,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지만 복수 상대는 전에 봤던 것보다 더 냉혈한으로 변해있었다.


 

자기 연민이 어마어마 하군. 내가 말했지. 그쪽 일에 관심없다고. 그리고 그때 형 성인 아니였어? 다 큰 어른이였잖아.

맞아. 고등학생 애새끼의 말 한마디에 질질짜던 어른이였지.

난 학술원에 들어올 때부터 악의적인 말, 걱정을 가장하는 공격, 자기 좋으라고 함부러 지껄이는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어. 사이코패스 새끼라는 말은 예사도 아니야. 천박한 성희롱부터 해서 자존심 다 찢어지게 만드는 말을 들었으니깐.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 스스로 반성 했을까? 전혀. 난 내가 그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깐. 믿음이 있었으니깐.

...

자신을 돌아보시지? 내 말 한마디에 휘둘릴 정도로 본인의 신념 없음을 고려해야하는 거 아니야? 지도자 후보생이나 되면서 남들이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을 거냐고.

너는 진짜...

내 조언 덕분에 형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거 아니었어? 나에게 투덜거릴 수 있고 증오할 수 있는 정신력을 온전히 가지며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왜 그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해하지 않고 졸업생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탐 날 때만 득달같이 증오하는 건데? 앞뒤가 안 맞지 않아?
 
 


  평소 차분하고 말 수 없었던 재문이가 쏘아붙이듯이 말하자 3번과 62번은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제대로 역공 당한 174번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 날을 고대하며 기다렸는데. 자신을 나락으로 유혹한 재문이를 다시 만난다면 보란 듯이 되살아 났다고, 너는 정말 나쁜 놈이라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싹싹비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이 안가는 날카로운 눈매와 불편하지만 옳은 말만 하는 완벽주의, 감정이 없다고 알려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원 아니었다. 기계 좀 더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게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174번과 그만큼 삐딱해져버린 테러리스트를 찾는 조사의 흐름, 그는 담배가 심하게 땡겼는지 주머니에 담배갑을 꺼내어 한개비 빼들고 입에 물었다.
 

 
너희 중에 담배 피는 애 있냐?
 

   
  셋 중 62번은 유일한 흡연자였기에 그의 말에 솔깃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나 상황에 담배 같이 피자고 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대신 흡연구역도 아니고 중앙 통제실이나 되는 곳에서 담배를 피어도 되냐고 질문하나 내 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174번.
 
 


뭐 어때. 에어컨디션 시스템이 알아서 하겠지.

...

너희 일도 걱정하지마. 우리 재문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