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역거래를 담당하는 청수 재단 계열사인 청수 인터네셔녈은 고층빌딩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고 91번은 개인사무실을 가졌을만큼 임원직을 보장받으며 수습직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아무리 학술원 출신이라고 해도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임원직 예비자, 거기다 장발머리 헤어스타일을 가진 개성넘치는 모습에 직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였지만 엘리트 중에서도 초엘리트들만 모아놓은 학술원 출신답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이해했고 백개로 나아가는 모습에 결국, 그가 이미 지도자를 목적으로 깎여지고 가공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훗날에는 답답한 일처리만 하던 기존 상사보다 오직 효율성 하나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모습에 직원들은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고 그렇게 91번은 자기보다 30살이나 많은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일이 숙달이 된 상태였다. 그렇게 앉아 있는 직원 옆에 서서 업무 검토를 하던 도중, 검정 후드티를 입은 남자와 검정 정장을 입은 남녀 한쌍의 등장했고 91번은 그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저승사자를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제가 말하던 방식으로 바꿔봐요. 그리고 오늘까지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고.
형.
지난번처럼 가정사 있다고 해서 빠지시면 안됩니다. 아셨죠?
형.
우선 이 일이 제일 시급한 하니깐요. 이거 마치시면 이제 세율 바뀐 거 적용하시고
91번.
이름도 아닌 건방지게 학술원 번호로 부르자 심기가 거슬린 91번은 그제야 재문이와 둘을 바라보았다. 보통의 손님이라면 부하 직원에게 커피 타라고 시킬 수 있었지만 손님이 어지간히 높은 분이었기에 그럴 수도 없는 일, 그럼에도 91번은 일 핑계 삼아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내보내려고 했고 사과를 가장한 변명이자, 변명을 가장한 회피를 했다.
미안하다. 지금 일이 너무 바뻐서. 왜 바쁜지는 알지? 파종계획 때문에 인력 부족인 거.
알아.
요 사람들 봐바. 나를 포함해 한숨도 못잤어. 지금 난리도 아니야.
그래.
뭐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 해줄래? 아니면 그냥 메일로 보내주면 안될까?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래서 미안하다는 거야. 지금 안하면 나 야근 뛰어야 하거든. 미안.
그것이 청수재단의 권한보다 위대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과 시끄럽게 통화하는 목소리 사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재문이.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처럼 이질감을 풍기는 그를 91번은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한번 저승사자에게 찍힌 이상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재문이 역시 91번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외출증에 세겨진 엄청난 권한으로 그를 찍어눌렀고 이에 91번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협조 안해줄거면 나도 발바닥 으깨버릴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저 뒤에 두 애도 그런식으로 포섭했니?
분위기 흐리지 말고 본론으로 가자고.
무슨 말을 해도 컴퓨터처럼 차갑게 대답하는 재문이의 모습에 91번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입을 쭉 내밀어 섭섭함을 표했다. 대신 많은 시간은 줄 수 없고 담배 타임 정도 밖에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 너 담배피냐?
안펴.
뭐? 안핀다고? 나 학술원에서 담배 안피는 남자애 진짜 처음본다.
...
인간미가 없다고 해야하나.
...
옛날부터 정이 안가던 이유가 있었군.
저기 도중에 말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때 둘의 대화를 엿듣던 3번이 기왕 담배피는 장소가 174번과 대화했던 장소처럼 주동자에게 표적이 될 위험이 적은 장소, 창문이 없고 보안이 엄격하며 입장 권한이 까다로운 곳으로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왜냐면 주동자에게 우리 죽을 뻔 했거든. 어쩌면 지금도 우릴 지켜볼지도 몰라. 그러나 91번은 무슨 삐딱선을 탔는지 자긴 옥상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하자 3번은 저격의 위험이 있는 옥상만큼은 절대 안된다고 했음에도 또다시 비협조적인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 안되는데? 에어컨디션이 있는 곳이 없어?
에어컨디션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못하겠다는 거야.
그게 우리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그래. 그건 절대 포기 못하겠네.
2
91번이 학술원을 졸업하고 청수 인터네셔널에 배정받아 투입되기 한달 전, 85번과 함께 무전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그가 시뮬레이션 테스트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바람에 결국 혼자 가기로 했다. 배낭에 간단한 짐을 넣고 전동 자전거 하나 믿고 떠나는 여행. 아무리 넓게 지어졌다고 한들 꽉꽉 막혀 있던 학술원과 달리 학술원 밖 세계는 모든 것이 시원하게 뚫려져 있었다. 시원한 초여름의 하늘.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때 처음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을 가져보고 싶었던 91번.
91번은 자전거를 잠시 세우고 해변가에 앉아 정해진 커리큘럼이 아닌 자기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생활도 한달 뒤면 끝나게 되면서 지도자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나라를 위해 이바지해야겠지. 학술원에서 배정해준 곳에서 배정받은 일을 하며 학술원 커리큘럼 같은 정해진 일상 속으로 들어갈 생각에 91번은 한숨이 나왔다. 물론 학술원과 달리 그곳에는 휴가라는 개념이 있었고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지면 쉬엄쉬엄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게 맞겠지. 효율성과 쓸모의 규칙 속에서 잘 가공된 멋진 인재이기에 의무감을 가져야겠지. 책임감도 가져야겠지. 자기는 그러라고 태어난 거니깐.
91번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핀 담배를 입에 물고 주황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우울한 기분부터해서 시뮬레이션 테스트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85번을 지켜볼 때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 잠도 자지 못하고 술을 목구멍에 붓고 그것도 다시 토해내는 그를 볼 때면 그 모든 것을 증오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원인이 아무리 국가라도 해도.
으읏...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각에 그제야 사색에 빤져나온 91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약 지금 여기서 자칫 삐끗한다면 85번처럼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순환 코드에 갇혀버릴지도 몰랐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훈련 속에서 늘 긴장하며 살던 마음을 달래줄 새로운 강박관념이 필요했다. 담배 필 때만큼은 하늘이 최대한 탁트인 곳에서 피고 살 자유 정도는 허락 받아도 되지 않나. 만약 그 자유마저 강탈당하면 그냥 청수 인터네셔널 옥상에서 그냥 떨어죽겠다고 91번은 절박한 약속을 했고 덕분에 하루에 담배 반갑이 아닌 한갑을 다 태워는 꼴초가 됐다.
그리고 그런 원칙을 가진 91번에 따라 재문이와 3번, 62번은 청수 인터네셔널 꼭대기층, 마천루의 맨 꼭대기에 층에 올라왔고 62번은 경호용 리볼버를, 3번은 라이플을 가져와서 재문이와 91번을 호위하였다.
재문아 오해하지마라. 너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여기로 끌고 온 거 아니니깐.
알고 있어.
흡연실에서 피는 거랑 여기서 피는 것은 차원 자체가 달라. 우선 공기가 깨끗하잖아. 눈요기도 좋고. 그치?
콧노래를 부르며 담배에 불 붙이는 91번과 달리, 이런 탁트인 장소에서 제대로 된 속내를 들을 수 있을지 재문이는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그런 재문이의 속도 모른 채 시원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 91번과 계속해서 참고 있었던 흡연자 62번도 결국 담배를 피우면서 재문이는 골초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그래. 형 요즘 뭐하고 지내.
아니깐 여기로 찾아 온 거 아니야? 일하고 있잖아.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래. 85번 형에 대해서도 말이지. 아는 거 다 말해줄래?
빠르네. 좋네. 한재문답네. 그렇게 나와야지.
말은 좋다고 했지만 85번과 오랜 친구라는 사실에 연좌제를 뒤집어 쓸까 걱정 반, 상대하기 까다로운 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복잡함 반, 그리고 85번에게 시뮬레이션 테스트의 후유증을 준 그에 대한 미묘한 증오심을 담은 눈으로 난간에 기대어 서서 말했다.

같이 동거하고 지냈지. 학술원에서 제일 친하기도 하고 마음도 맞았으니깐.
그 형은 어디로 배정받은 거야?
내가 일하는 곳도 알면서 찾아왔으면서 그애가 어디로 배정 받았는지 몰라?
학술원 출신은 보안상의 이유로 정보 접근에 매우 제한적이야. 나도 형이 여기에 일한다는 거 62번 형이 어쩌다 알게되어 온거야.
그렇게 62번을 바라보는 91번.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직장이 같은 동네에 있었기에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고 간단한 눈인사를 하는 사이지만 91번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운도 드럽게 좋은 애 같으니라고. 사실 나 외교부에서 진짜 일하고 싶었던 거 알아? 그런데 학술원에서 내 의사 결정도 없이 이곳으로 배치 하더군.
학술원에서 이유없이 배정해주지 않아. 종합된 데이터를 토대로 테스트하고 시뮬레이션까지 돌려서 결정 하거든.
그것이 내 의사 결정보다 우위에 있단 말이지?
효율성을 토대로 최고의 판단이라는 거지.
그렇지. 내 의사는 상관없지. 내가 얼마나 잘 사용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문제는 왜 불만까지 계산 안했냐는 거야. 그애나 나나 배정 받은 부서에 가고 싶지 않았으니깐.
듣기 힘들거라 생각했던 85번의 이야기가 드디어 담배를 뻐끔뻐끔 피고 있는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래. 그래서 그 형 어디로 배정받았는데.
자세히는 몰라. 뭐 it 쪽이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일할 컨디션이 전혀 아니였어. 어떤 미친놈이 시뮬레이션 테스트에서 목구멍에 폭탄을 쑤셔 박았고 그것이 신경쇠약증의 트리거가 됐으니깐.
목구멍에 폭탄을? 174번은 물론 91번의 입을 통해서 자꾸만 재문이의 몰랐던 이면이 나오자 62번은 실망스러운 눈으로 보자 재문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과거 공방 가지고 싸우자는 거지? 그러면 나도 할 말 많지. 형들이 먼저 나 어릴 때 그런 영상 보여줬잖아. 그 영상에 비해서는 꽤 약하게 복수 했다고 생각하는데?
뭔데? 어떤 영상을 너한테 보여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드코어 포르노물 같더라고. 그것도 그냥 하드코어도 아니라 여자 사지를 묶고 때려 죽이는 거.
사실이야? 너 어린아이한테 그런 거 보게 했어?
이번에는 62번이 91번을 실망하는 눈빛으로 보자 그게 대체 무슨 문제냐는 식으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야 한재문, 너 학술원에 있었을 당시 별명이 뭔지 알아?
알지. 젊은 현자 아니야?
그건 미륵보살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우리들 사이에서는 아니였어. 늙은이 새끼, 사실 그것도 돌려 말한거지 사실 꼰대에 가까웠지만 말이지. 그런데 그 전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마마보이야. 맨날 형 누나 사이에 끼어 잉잉 거리는 모습을 다른 애들이 얼마나 꼴보기 싫어했는지 넌 모르지?
옥상 높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재문이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린 시절에 학술원 후보생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그렇게 눈치를 보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이다.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삼인방 사이에 끼어 놀다가, 오구오구 우리 재문이 너무 귀엽잖아! 라며 포옹을 받을 때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후보생들의 좋지 않은 표정, 특히 남자 후보생들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때는 전혀 이유를 몰랐기에, 뭘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에 초콜릿을 나눠 주는 것으로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바꾸어보려했지만 결국 성과가 좋지 않았고 그럴수록 삼인방의 품안에 파묻혀 그들에게 더욱 강하게 의존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85번과 91번의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을 보였으니, 오냐오냐 거리는 아부꾼들을 몰아내고 재문이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심, 부디 어린 아이라는 바보같은 포지션에서 벗어나기를 둘은 바라고 있었다.
오죽하면 기회 될 때 너 까버린다는 놈도 있더라. 다른 애들은 학술원에서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데 너는 잉잉 거리고 있었으니깐.
그래서? 그게 뭐 어땠는데?
주변 분위기를 못맞춘다는 거잖아. 학술원의 진지한 분위기를 애새끼 같은 너가 나타나서 다 망치고 있었으니깐.
그래? 그러면 기회 잡아 까버리지?
그러게. 애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냥 그러라고 둘 걸 그랬나보다. 괜히 너 걱정하고 빨리 철들길 바라는 마음에 그 영상을 보여주는 거 아니였어.
되게 변태 같은 발상인데? 빨리 어른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드코어 야동을 보여줘?
재문이는 꼭 변태 아저씨나 할법할 발상을 해서 좋냐고 말했고 91번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방법, 우왁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만큼을 알아봐주면 안되냐고 했다. 그것도 걱정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모두가 널 미워했을 때 우리 둘은 그래도 널 걱정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너는 그 마음을 아주 개판으로 보답했어. 아무리 시뮬레이션 테스트라고 하더라도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진짜잖아. 굳이 그렇게 해야했냐?
형이 말하던 논리 그대로 말해볼까? 그것도 내 방식대로 보답한거야.
아? 내장 터져 죽는 느낌 주는 거?
형은 운 좋은 줄 알아... 만약 그때 형도 있었다면 똑같이 해줬을테니깐.
그렇게 말한 후 특유의 살벌한 미소를 보이자 91번은 청수재단의 권한이고 뭐고 재문이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62번이 둘을 막아서며 중재했다. 아니 왜 재문이만 보면 다들 시비 걸고 싶어 난리야? 쓰나미 때 우리 도와준 거 기억 안나? 생명의 은인인거 몰라? 하지만 둘은 앙숙 관계인 것처럼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고 62번이 열심히 울타리 역할을 한 덕분에 위기의 순간은 모면 할 수 있었다. 사실 62번은 진땀만 빼는 중재자 역할을 자기가 할거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분명 계획상으로는 차분한 재문이가 뒤에서 지켜봐주고 자기와 3번이 앞잡이처럼 정보를 캐내는 역할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 사실 전혀 모른 채 라이플을 들고 경호를 서던 3번은 소란스러운 셋의 모습을 보더니, 풋... 둘 사이에 진땀 흘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62번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몰래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대단하신 생명의 은인이셔서 내가 물러서지. 하지만 너희들 헛걸음질 했어.
뭐?
나는 85번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어. 혹시 그애의 행방을 조금이라고 찾아보려고 온 거라면 포기해. 그애가 집을 나가고 몇날몇칠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내가 다 뒤져봤거든. 그런데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어.
컴퓨터 사용 내역 뭐 이런 것도 없어?
기록을 아주 깨끗히 삭제하고 나갔더군.
그러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대부분 집에 있었고 가끔 외출하긴 하지만 당연히 병원 다니는 줄 알았지. 그런 사이비 종교에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어.
뭐 통화내용을 엿듣거나 귀띰해 준 말이 단 하나도 없었다고?
그래.
확실해?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그래. 너가 내 발가락을 개작살내고 이를 뽑는다 해도 너희들에게 줄 정보가 없어. 이미 청수 쪽 사람들한테 심야조사 받았지만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은 나인데.
또다시 아무 정보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자 62번은 허탈해하는 표정을 지은 반면, 재문이는 인사도 없이 바로 뒤돌아 서서 그에게 떠나갔다. 야! 재문아! 혹시 모르니 조금이라도 캐봐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62번의 말에 재문이는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를 상대할 시간 따윈 없다고 했다. 이에 62번도 언제 한번 밥먹자는 허례허식 담긴 인사를 하며 재문이를 따라갔지만, 한재문! 다 피던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입에 문 91번이 그를 불러세웠다.

만약 그애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할거야?
죽여야지. 당연한 말을 왜해.
그래 죽이는 게 맞겠지.
왜. 반동분자에게 무슨 미련이라도 있어?
아니, 없어.
...
죽이는게... 맞겠지...
쿨한 대답과 다르게 91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고 그렇게 모두가 떠나 텅빈 옥상에 혼자서 담배를 한개비 더피는 것으로 속내를 진정시켰다. 줄담베를 피워대며 소울메이트에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보기로한 그였으니깐.
야! 한재문! 잠깐만!
아무런 정보도 캐내지 못했던 삼인방이 청수 인터네셔널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갈때 쯤 , 62번은 그제야 무언가 기억났는지 화난 것 같아보이는 재문이에게 더 화나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너 아까 우리한테 91번과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방금 그건 뭐야? 정확히 있었고 정확히 기억해냈으면서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왜냐면 함정을 파야 했으니깐.
함정?
그 형이 내게 시뮬레이션 테스트 때 했던 일로 딴지 걸때 반격할 소재로 쓸려고. 그것을 무기삼아 85번을 파헤쳐 볼려고 했어.
거기까지 생각한 거 대단하다고 인정할게. 그래도 그건 우리랑 상의하고 했어야지! 아니면 귀띰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응?
그러나 재문이는 무언가에 쫒긴 듯이 식은땀을 흘리며 바쁘게 걸어나갔고 62번은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억지로 보게했다.
너가 첫만남 때 분명 그랬잖아! 우리 함께 잘해보자고! 힘든 학술원도 졸업했으니 잘할 수 있다고!
...
그런데 너는 왜 독단적으로 행동하는데? 왜 비밀을 숨기고 있어?
...
174번 같은 일이 또 생길까봐 물었었는데 그렇게 우리를 속이면
우욱
순간 재문이는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지만 끈적이는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터라 투명한 위액만이 나왔다. 야... 너 왜그래... 괜찮아? 방금까지만해도 화내던 62번이지만 재문이의 심각한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에 재문이는 문제없다고, 돌아가서 쉬면 괜찮다고 했지만 다시 심한 헛구역질과 함께 위액들을 토해냈다. 그제야 재문이는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았는데 그 상태에서 과거 이야기를 들추고 기억하다보니 좋지 않은 기분에 사로 잡혀 그런거라고 겨우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순간 62번은 덜떨어진 아이 혼내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 바보야! 그러면 우리만 내보내고 쉬었어야지! 그것도 함정이야? 작전이야?
자신이 집적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재문이는 말해보려했지만 또다시 발작에 가까운 헛구역질에 대꾸할 겨를조차 없었다. 대신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져버릴 것 같은 창백한 얼굴에 62번은 빨리 내 등에 엎히라고, 지금 당장 병원에 가자며 엎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작 헛구역질 하나에 어부바냐며 그를 무시하자,
답답해 정말! 엎히라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3번이 하도 답답했는지 밀어버리는 덕분에 재문이는 62번의 등에 엎히게 되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엄마에게, 스티븐 한 선생님에게 안긴 과거의 기억들, 그것들이 순식간에 뒤엉키면서 재문이의 속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재문이에게 있어서 과거는 어떤 단서의 실마리가 있는 곳이 아닌 오히려 정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촉매제였을 뿐, 결국 62번의 등을 가득 적시고 나서야 간신히 가까운 병원에 도착했다.
4
정보조사 1일차, 결과는 대 실패였다. 주동자에 대한 정보 성과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했고 오히려 재문이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었던 후보생들, 그리고 동료라고 해놓고서는 철저하게 마음의 벽을 쌓았었던 재문이의 이기적인 모습만 드러났다. 그러나 3번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만큼은 자기집을 거점으로 삼자며 둘은 초대했고 응급실에서 긴급 처방 받은 재문이를 작은 방으로 안고가 천천히 이불 위로 눕혀주었다. 핏기없는 입술로 보아하니 오늘 모아온 정보를 토대로 작전 계획을 짜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 무엇보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처음으로 빈틈 많은 모습을 보여주자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녀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라면서 재문이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3번은 작은 방을 나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던 62번에게 말했다.
지금은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하지만 한숨자면 나아질거야. 많이 힘들었나봐. 한끼도 못먹었을텐데.
...
...
그런데 애를 다들 죽어라 괴롭히다니...
혼자살기에는 너무도 넓은 3번의 아파트에는 오직 창 밖의 자동차들이 움직이는 - 솨아아아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62번은 우리 편한 옷으로 좀 갈아입자고, 정장이 뭔가 진중한 느낌을 주는데 너무 불편하더라! 라면서 말했디만 그녀는 아직 진중한 분위기를 없애고 싶지 않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동기라면 조금이라도 도와줘야하는게 맞잖아. 그런데 그렇게 적대적으로 나오는지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왜? 왜 반드시 재문이에게는 호의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거야?
간단히 생각해도 고마워해야하는게 맞잖아. 쓰나미에서 우리를 구해줬으니깐. 그게 뭐 시간적인 텀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마워해야하고 힘들때 도와주는게 맞잖아.
앞으로 그런 반응 기대하지마. 사람은 자기 섭섭한 일은 평생 기억하고 남에게 도움 받는 일을 금방 잊어버리더라.
진짜 못됐어...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이기적인 것들...
왜 그런 꽉 막힌 생각을 하는거야. 그들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텐데.
그걸 왜 꽉 막힌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상식이잖아!
야. 우리 이제 사회인이야. 그러면 어느정도 인간관계에 감이 잡혀야 하지 않아?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야. 그렇게 학술원 후보생 티를 내야겠어?
푼수라고 생각했던 62번이 꽤 날카로운 말을 하자 그녀는 기분이 제대로 상했는지, 아 그래? 그래서 넌 꽉막힌 나보다 낮은 등급으로 졸업한거구나? 그녀의 말에 62번 역시 기분이 상했는지 말을 말자며 그녀에게 등을 보이면서 둘 사이에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했고, 방 안에서 그들의 말을 엿들은 재문이는 괜히 자기가 잘못한 것마냥 심장이 콱 막히는 기분에 뭐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창한 계획은 모두 실패했고 도움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득달같이 눈을 번뜩 뜨며 과거 노력들은 악귀가 되어 오히려 자신의 목을 짓눌었다. iso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개인 기숙사로 걸어가는 느낌, 살면 좋고 죽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그 훈련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고 허무함만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자 됐고...
?
우리 밥이나 먹자. 한끼도 못먹었잖아.
또다시 62번의 쌩뚱맞은 소리에 3번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진지한 상황을 환기시키기에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기에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 대신 너가 밥사라, 라고 하자 62번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가 아는 맛집이 있는데 여기만큼 매운 음식 잘 만드는 곳 없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애들은 매운 거 별로 안 좋아하던데.
그래서 친구들이 나랑 같이 밥 안먹으려고 그래. 내 입맛이 여자같데.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그 여자는 행복하겠네.
떡볶이, 닭발, 매운족발, 그렇게 매운 음식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먹을 생각에 들떠있는 그들과 달리 재문이는 물 한모금만 마셔도 토할만큼 속이 좋지 않았고 3번과 62번과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고립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재문이도 알고 있었다. 학술원 때부터 동기들에게 높은 마음의 벽을 쌓았지만 동시에 고독감을 느끼는 자신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것을. 26번처럼 서슴럼없이 다가와 자기 위주로 맞춰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먼저 다가가야하는데, 마음의 벽을 허물고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내성적인 성격은 비밀요원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성격이었지만 외로움도 같이 끌어 안아야했으니, 음식 이야기로 제잘거리는 그들의 소리에, 편안한 대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심한 거리감을 느끼며 재문이는 그렇게 잠들었다.

|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9 (0) | 2025.12.14 |
|---|---|
|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7 (0) | 2025.11.09 |
|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6 (0) | 2025.11.07 |
|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5 (0) | 2025.11.04 |
| 비욘드어스 팬픽 / 이모탈 4 (0) | 202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