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문이 너 팔이...
응?
너 계속 훈련 받고 있구나? 그렇지?
더운 날씨 때문에 재문이는 검정 후두티 소매를 거두었고 그때 보이는 팔뚝 모양새에 3번은 놀라했다. 물론 학술원에 있었을 당시 3번도 근력 테스트와 대외활동으로 선명한 근육을 가졌지만 졸업 후 사무실에서만 있던 터라 거의 쓸일이 없었기에, 또 매일 운동하며 관리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건강해보이는 팔뚝으로 변했을터, 그러기에 더 반가운 마음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괜한 승부욕을 느낀 62번이 자기 팔을 거두어 내밀고서는 아직 자기도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뭐냐?
뭐긴. 내 팔도 한번 감상해보라고.
누가 봐도 근손실 제대로 온 팔인데. 할아버지 팔인줄.
좀 더 자세히 보라고! 나 이래뵈도 체력 테스트 성적 나쁘지 않있어!
62번은 잘보라며 뽀얀 팔을 내밀었지만 3번은 그것을 밀어내며 둘은 실랑이, 혹은 애정싸움으로 투닥거렸고 그 모습을 재문이는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물론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든 말든 상관없지만... 하필 그들이 있는 장소는 젊은이라고는 없는 노후화 된 도시, 거기다 셋을 힐끗힐끗 볼 정도로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지역이었기에 문제 되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깐.
174번이 준 데이터 속 실종자들이 가장 많이 머물러 있던 지역이자, 영상 속 전단지 스티커의 가게가 있는 곳, 여명 빛의 교회와 가장 많이 연관되어 있는 그 지역의 본격적인 수색이 필요했고 셋은 날이 밝자마자 국경 외곽지역으로 차를 타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르방 쓰나미가 한번 휩쓸고가 소금물에 절여져 다시는 쓸 수 없는 건물들, 그런 건물들을 부순 잔해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거리였다. 하르방 쓰나미가 지나간지 몇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건 청수쪽에서 이 지역을 더이상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소리인데... PAC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국경 외곽지역이자, 언제 다시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바닷가 근처지역이기에 청수는 일부러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었나 재문이는 추측했다. 효율성 아래 쓸모가 없었다는 판단하에 방치 시킨 것이 확실하다고 추측했다.
그렇게 버스 하나 잘 다니는 않는 낙후된 지역의 탐색을 시작했지만 네오부산에 있었을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인가지구와 행정지구가 구분되지 않는 것은 물론 시민들의 모든 데이터가 잘 정리되어 있는 네오부산 중앙행정복지센터 같은 곳이 있을리는 만무한 터. 그래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대뜸 여명의 빛 교회에 대해 아냐고 경찰서에, 시장에, 그리고 이 지역에 오래 머물러 보이는 사람에게 묻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몰라도 도대체 무슨 용건이냐고, 대체 왜 그 교단을 찾아다니냐며 오히려 재문이와 둘을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왜냐면 여명의 빛 교회에 입단하고 싶으니깐요.
그때 재문이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자 오히려 물어본 사람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는데, 왜냐면 여명의 빛 교회는 청수재단을 상대로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던 사건을 터트리다 못해 비위를 제대로 건드렸으니깐. 물론 군인을 보낼만큼 대놓고 경계하진 않았지만 청수의 주특기인 첩보 활동에 특화된 인력들을 배치, 그 후 몇몇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심각한 심문으로 인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속출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에서 여명의 빛 교회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은 대놓고 청수재단의 표적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그래서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파종단에 들어갔는데.
그딴 놈이 파종계획에 성공해봤자 자기와 비슷한 귀족들만 구할 것이라고, 귀족들만 알아먹을 수 있는 어렵고 복잡한 사상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 시킬거라며 정의감에 찬 목소리로 재문이는 말했다. 물론 3번과 62번은 당연히 그게 연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정의감 넘치는 청년 일품이었고 경계심이 강했던 외지인조차 아까와 다른 조금 온화한 목소리로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저쪽 골목 들어가서 빨간 지붕에 사는 남자 만나보라고. 여명의 빛 교회가 이 지역에 터를 잡고있었을때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것을 봤다고. 더불어 그 사람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하지만 어디 실종 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보니... 그쪽 사람이 아닐지도...
그렇게 말한 지역민은 이젠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며 자리를 떴고 유일한 단서인 빨간 지붕 아래 사는 남자, 셋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2
3번과 62번을 만나기 전, 호텔에서 혼자 지내고 있을 때 재문이는 여명의 빛 교회의 자료를 수집할 때마다 고개를 자꾸 갸우뚱 거렸다. 돈과 여자만 추구하던 기존의 사이비 종교들과 달리, 여명의 빛 교회는 생각보다 체계적이었고 철두철미하며 은밀한 교단이었기 떄문이다. 신도들의 돈을 무작정 뜯는 것이 아닌 노동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런 체제에 순응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교주의 카리스마, 그리고 고도의 첩보술을 필요로 하는 사건 사고들. 분명 업체와의 임금 협상을 할 때 불리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임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건 해당 업체를 미리 사전 조사했다거나 약점을 잡았다던가... 종교 단체와 어울리지 않게 스파이망을 구축했다던가...
그래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학술원 후보생이 여명의 빛 교회에 포섭된 이유는 첩보술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과 도덕성을 마음껏 위반해도 용인해주는 지독한 폐쇄성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힘들었던 학술원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학술원과 비슷한 곳에 본능적으로 끌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새는 날기 위해 날개를 가졌고 물고기는 헤엄을 치기 위해 지느러미를 처음부터 가졌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재문이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방 역시 테이블 무드등 외에 모든 꺼두어 어두침침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요원으로서의 본능,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는게 본능일지도. 어둠의 자식일지도.
냄새...
그렇게 재문이가 머물고 있었던 어두컴컴한 호텔처럼 빨간 지붕의 집 안 역시 어두침침했으니, 거기다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찌르는 썩은내와 사람 발을 디딜틈 없을 정도로 쓰레기들 때문에 발 디딜 곳이 한군데도 없는 토굴 같았다. 3번은 여기가 아닌 다른 빨간 지붕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만 돌아가자는 눈빛을 보냈지만 재문이는 둘보다 앞장서서 쓰레기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젊은 남자, 침대에 누워 위태롭게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깡마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지 구부정한 자세와 더불어 옆에 보이는 목발이 눈에 띄었고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온화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봉사활동 단체에서 왔습니다. 많이 힘드신 분, 많이 아프신 분들을 위하여 청수재단에서 파견된 인력입니다.
...
저기 괜찮으세요?
...
저기요?
분명 남자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경계심 많은 이곳 사람들처럼 경계심 때문에 그런건지 대답하지 않았고 재문이는 믿을 수 있는 단체에서 왔으니 마음 놓으시라는 말과 함께 집 청소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 남자가 거부했다 하더라도 재문이는 반강제적으로 할 생각이었으니, 왜냐면 심문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악취에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필요한 단서들을 뽑아내지 못할 수 있으니깐. 거대한 쓰레기 봉투 하나사서 곰팡이가 뒤덮힌 옷가지 및 가사도구들을 버렸고 만약 남자가 왜 버렸냐고, 이거 얼마짜리인지 아냐고 따진다면 오히려 재문이에게 있어서는 매우 좋은 상황이었다. 왜냐면 미륵보살돔에서 받은 외출증 카드를 이용해 새 물품을 사주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환심을 사서 마음을 열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깐. 그러나 남자는 더러운 집을 청소해준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인사는 커녕, 병신같은 새끼들 지랄하고 있네... 라며 마음의 벽을 높게 세웠다.
요즘 세상에 봉사활동단체가 어디있어 병신들아. 구라 치려면 잘 좀 치던가.
의심하시는 거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말 믿을 수 있는 단체에서 왔습니다.
미리 말해두지. 너 같은 부류의 놈들이 이미 한 번 왔다 갔어.
...
그리고 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으니깐. 뱉어낼 것도 없으니깐.
저희는...
내 다리 봤지? 이게 뭐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알아? 알면 꺼져.
눈대중으로만 봤던 그 남자의 다리를 좀 더 가까이 보자, 계속해서 구부정한 자세로 누워있었던 것은 아마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다리가 골절되어서 그런거겠지. 그리고 그 골절은 그가 이미 말했던 "너 같은 부류의 놈들"이 벌인 짓일 것이고. 이미 그는 심문을 거쳤던 사람이었기에 똑같이 심문을 해봤자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을 게 뻔하다. 마치 계속해서 같은 심리검사를 받아 검사자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챈 환자처럼, 자아 축소를 목적으로 한 학술원의 의도를 파악하고 에고파라미터를 역이용했던 자신처럼. 물론 젖은 수건에서 남은 물 한방울 짜내듯이 에고파라미터를 낮추는 약물과 물리적인 압력을 가해 그를 있는 힘껏 쥐어짜다보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간신히 붙어있는 숨도 끊어질지 몰랐다.
결국 재문이는 3번과 62번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했고, 뭐? 벌써 간다고? 3번은 이제야 청소한 보람을 느꼈는데, 토굴에서 사람사는 집으로 바꿔놓아 뿌듯헀는데 갑자기 돌아가자는 말에 내심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알아내보자는 눈빛을 보냈지만 재문이는 고개를 흔들며 가망성이 없다는 뜻을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금전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해달라며 임시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침대 옆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뭐야! 그러면 우리 남의 집 청소만 해주고 나온 거야?
어두운 곳에 있다가 여름의 강한 햇빛에 얼굴을 찌뿌린 62번이 말했다. 그의 양손 가득히 커다란 쓰레기 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언뜻보기에는 정말 요원이기보다는 쓰레기 치워주는 봉사활동 단체 직원으로 보였을 정도다.
할 수 없었어. 이미 누가 그에게 심문을 했고 오히려 경계심만 높아진 상태이니깐.
누가 했는데?
누구긴. 청수재단 쪽 사람이겠지. 깽판이란 깽판을 다쳤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생각보다 일이 꼬여가자 재문이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지금껏 세웠던 계획들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정말 운좋게 찾은 여명의 빛 교회에 관련된 사람이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심문만큼은 자신있었기에 정보를 빼낼 수 있을거라 장담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또다시 여명의 빛 교회와 관련된 사람을 찾는 일, 그것도 청수재단 요원들이 휩쓸고가 꽁꽁 숨어버린 그들을 찾아야만 했고 결국 셋은 지역민이 가장 많이 있었던 시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재문이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많이 속상했는지 나머지 둘보다 뒤쳐지듯 천천히 걸었고 그 모습에 3번과 62번은 자기들끼리 긴급회의라는 식으로 몰래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거 분명... 삔또 상한거지?
아마 그 사람한테서 정보를 빼내보려고했지만 마음대로 안되서 속상한 거 같은데.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 재문이 기운도 살려주고 단서도 찾는 일 말이야.
점심시간이라서 아까보다는 한층 복잡해진 인파들 사이로 재문이와 둘의 거리는 확연히 멀어졌고 결국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뒤늦게서야 둘은 재문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3번과 62번은 인파들을 해치고, 또 전화를 해보고 큰 목소리로 부르기까지 했지만 어떠한 반응도 되돌아 오지 않았다. 재문이가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3
이게 뭐야?
통신장치지. 이렇게 스티커 부분 떼어내고 위 안쪽에 부착해.
탐색 작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3번의 집을 떠나기 전, 재문이는 둘에게 첩보용 통신 장치를 건네주었다. 크기는 쌀한톨의 절반이 될 정도로 매우 작지만 왠만한 기능은 다 있다고, 특히 통신 음질이 나쁘지 않다면서 귀 안쪽에 착용하고 했다. 왜냐면 분명 여명의 빛 교회 쪽에서 우리가 그 장소를 예상하고 오리라는 것을 예측했을 것이고 그러면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서로를 떨어트리게 하고 전력을 약화시키려고 할게 뻔하다면서 말이다. 3번은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재문이는 분명 그럴 거라고, 왜냐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쪽은 그쪽이라는 말과 함께 둘이 통신장치를 잘 부착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고, 티나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붙이고 나서야 그제야 만족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다면 어떠한 행동도 하지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그리고 재문이의 예상대로 상대쪽에서 먼저 접선을 시도, 아까부터 움직임이 수상해보였던 검정 후두티를 뒤집어 쓴 여자가 재문이의 뒤에 바짝 달라붙으며 경고했다. 더불어 지금 말하고 있는 여자는 자신들의 말을 전달해주는 전달책일 뿐이니 괜히 사람 해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철저함까지 보이면서 결국 재문이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3번과 62번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을 보면 영락없는 커플, 검정 후드티를 나란히 맞춰입은 커플 같아보였지만 한 남자는 매서운 눈매로 여자를 노려보았고 한 여자는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냐? 왜? 이 여자 마음에 들어?
말을 어눌하게 하는 거 보니 에고파라미터를 제대로 낮춘 거 같은데.
우리 재문이 똑똑해요.
시민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청수재단이 안다면 가만 안둘걸?
상관없어. 어차피 난 머나먼 곳으로 가니깐.
?
지금부터 속도를 높인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자는 달리기 시작했고 재문이는 쫒기는 입장이 아닌 오히려 쫒는 입장이 되어 그녀를 뒤쫒아갔다. 그때 재문이는 이 추격전에 있어서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는 인기척을 느꼈으니, 다행히 적이 아닌 3번과 62번이었고 그들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방향에서 재문이를 뒤쫒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까지 모두 알았는지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나와 다시한번 네오부산 뒷골목보다 사람이 없는 길로 달렸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다냄새가 확 풍기는 해변가, 그리고 여자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걷는 예수처럼 바다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어제 본 영상도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 비과학적인 현상이 연달아 일어나자 재문이는 놀랐지만, 뭐야... 아니잖아... 재문이는 자기 앞의 그녀가 여명의 빛 교회의 교주처럼 기적을 부리는 사람이 아닌 단순 물깊이가 낮은 물길을 달렸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하르방 쓰나미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하여 썰물 때만 모습이 보이고 밀물때는 바닷물에 가라앉는 바닷가 유령도시. 여자가 바닷물을 가로질러 그 도시에 들어갔을 때 재문이는 따라갈까 말까 했지만 결국 그녀를 뒤쫒아갔다. 왜냐면 저격수가 숨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니깐. 외지인을 경계하는 유령도시의 사람들이 재문이가 귀족인 것을 알고, 청수의 중요 일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원한 서린 눈으로 노려봤으니깐. cctv처럼 재문이가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고개만 돌리는 사람들. 신발과 바지 밑단이 다 젖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재문이는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짠내난 건물 속 눈에 총기없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경계하며 여자를 쫒아갔다. 그때 그녀는 어떠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재문이도 따라 들어갔으니, 함정 같은게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조심, 한 계단 한 계단씩. 유리창이 박살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서고 나서야 드디어 여자와 한 공간에 있는 일에 성공했다.
자, 너가 원하는 대로 와줬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자고.
그러나 여자는 미리 준비된 의자에 털석 앉았고 자신이 앉아있는 곳의 건너편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문이가 그곳에 앉도록 지시했다. 재문이는 천천히, 미심쩍은 눈으로 앉고나서야 그제야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벗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자. 긴머리. 평범한 외모. 하지만 계속해서 술에 춰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 재문아 들려? 그때 마침 3번에게서 통신이 왔고 현재 자신들은 재문이가 앉아 있는 방향 기준으로 왼쪽 건물에 있다고, 62번은 라이플과 총기류를 챙기기 위하여 차를 파킹해 놓은 곳으로 갔다고 했다. 5분도 안되어서 금방 올테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재문이는 알겠다는 뜻으로 왼쪽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재문이, 요즘 잘 지내냐?
잘 지내지. 너보다 훨씬 더.
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식으로 말하냐?
재문이처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티나지 않은 통신장치와 달리, 내놓고 티나는 통신장치를 낀 여자가 대답했다. 다만 아까와 다르게 조금 정확해진 발음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약기운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일터. 여자는 물론 재문이에게 있어서 시간을 끄는 것이 매우 좋은 일이었기에 최대한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시간을 질질 끌어보기로 했다.
괜한 사람 끌어다가 인질용으로 쓸 사람은 뭐 한명밖에 없지.
누구?
쉽게 말하면 재미없잖아.
그렇긴 하지.
기회줄께. 니가 니 입으로 자기소개해봐.
하. 이 놈 머리쓰네? 아니면 시간 끌기하는거냐?
...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가?
그녀의 말에 재문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두가지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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