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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젠 좀 괜찮니?
재문이가 학술원에 들어가기 전인 6살 때보다 더 어렸던 시절, 짧은 반바지와 줄무늬 반팔티를 입어야 했던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담요를 덮으며 기침 할 정도로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렸다. 그렇게 조수석에 힘없이 앉아 약 기운에 취한 눈으로 멘토 선생님을 바라보는 한 귀족 집안의 막내 아들. 한국계 미국인인 멘토 선생님은 다른 개인교습 선생님들에 비해 한국어에 있어서 어눌했지만 그러에도 불구하고 재문이의 대표 멘토 선생님을 맡게 된 이유가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명성도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의 재문이를 친아들 대하듯 섬세하게 다루어주었기 때문이다. 친부모님보다 한템포 더 빠르게 재문이가 심한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소아과로 대려가 치료를 받게 한 후, 조수석에 태워 안전벨트를 채우는 40대 중반의 남자. 그래그래. 얌전하니 말 잘듣네. 주사 맞을 때 목청껏 울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버텼던 재문이가 기특한 남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대로 표현하지도 않고 사회적 약속을 잘 지키는 그 아이의 모습은 왠만한 어른들보다 더욱 성숙하게 보였고 학술적인 재능 역시 신동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기에 미래의 청수를 이끌 지도자를 육성하는 국가 기관에 추천서를 썼지만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올련지. 분명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거라 남자는 장담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그의 재능을 놓친다는 건 국가적으로 큰 손해니깐 말이지. 남자는 운전석에 타기 전, 나무잎을 통과하여 시원해진 햇빛, 그 햇빛이 내려앉은 재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나 소년은 많이 아팠는지 게슴츠르하게 뜬 눈을 꿈뻑꿈뻑 거릴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오늘 수업 일정은 모두 취소하는 게 좋아보였다.
선생님! 스티븐한 선생님!
그때 자신을 부르는 어떤 여성의 목소리에 스티븐 한은 인상을 쓰며 모른척 했고 거의 도망치듯이 운전석에 앉으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식으로 그에게 빠짝 다다가는 그녀. 한손으로는 스티븐 한의 팔을 꽉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그녀를 닮은 어린 소녀를 잡고 있었는데 소녀는 오랜시간 이리저리 끌려 다녔는지 많이 지쳐보였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세요? 왜 요즘 연구소에 나타나지 않으신거예요?
그쪽 때문이요. 스토커 같은 당신 때문에 다른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스토커는 너무 나간 말 아닌가요? 그저 우리 딸이 신동인지 아닌지 봐달라는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이미 확실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아니라고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훨씬 더 많이 외웠고 훨씬 많이 똑똑해졌습니다. 한번 시험해보세요.
마치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의 딸이 영재라는 믿음을 지켜주기 위하여 막무가내로 나갔다. 이에 더이상 실랑이 하기 싫은 스티븐 한은 운전석 문을 확 열자 소녀를 방패 삼아 내밀고서는 정말 아무 질문이라도 해보라고, 어떠한 문제라도 내면 척척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여자는 장담하듯이 말했다. 당신의 편견으로 이 아이를 학술원에 추천하지 않는다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한번 해보세요.
아주머니, 학술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신겁니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그럼뇨. 잘알죠. 아무튼 해보라니깐요? 정말이에요.
됐습니다. 한번만 더 찾아온다면 그땐 경찰 부르겠습니다.
저 애랑 다를 거 하나도 없을 걸요? 아니, 분명 더 똑똑할거에요.
분에 못 이긴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재문이를 비교대상으로 삼자 스티븐 한은 어이 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말 함부로 하지마세요.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 줄 아십니까?
몰라요. 보니깐 우리 애랑 동갑인 거 같아보이는데 확실한 것은 우리 애가 더 천재에 가깝다는 겁니다.
뻔뻔함도 정도가 없어서는 원...
길고 긴 실랑이 끝에 스티븐 한은 차에 타는데 성공했고 그 긴 시간동안 소녀는 마치 잘깎여진 목각인형처럼 재문이만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진갈색 눈. 하지만 갈색 껍질을 깨고 나올 것 같은 오색의 빛깔. 그 눈이 가져다 준 기묘한 아우라. 감기약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 소녀에게 신기한 기운이 있었던 걸까. 재문이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이질감이 크게 느껴지는 그녀에게 몽롱한 기분을 느끼는 그때 차가 움직이고 백밀러를 통해서 보는 소녀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졌지만, 더운 여름 비오듯이 땀을 흘린 그녀였지만 내색하나 하지 않는 아이.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재문이를 바라보던 그 아이. 불쾌한 골짜기에 온몸을 던진 것처럼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분명 그 아주머니의 말이 맞음을 재문이는 느끼곤 한다. 어린아이가 만들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거든. 이미 한번 죽었거나, 아니면 죽음 직전까지 갔거나. 무형의 자산처럼, 부처처럼 무아를 한번 경험했거나. 생물로서의 코나투스를 버리고 무생물로서의 극치에 다다른 것처럼, 한번 시체가 되어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 눈빛을 그 나이에 냈다는 것은 삶의 천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다.

2
그렇게 재문이는 그녀의 얼굴을 어린 시절에 한 번, 호텔에 있었을 때 서류를 통해서 다시 한번, 그리고 지금 중앙 통제실 모니터를 통해 봄으로서 총 세번째 보았다. 불꺼진 중앙통제실은 데이터서버 기계가 내는 푸르고 붉은 빛만이 아닌 터치 형식으로 작동되는 테이블에서도 역시 은은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그 테이블 위로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을 능숙하게 다루던 174번은 원격 조정 자동차 폭탄 테러의 자동차 소유주인 50대 남성과 그녀의 얼굴과 인적 사항을 커다란 스크린에 띄우고 난 후 설명했다.
너희가 찾는 사람, 2개월 전에 실종 된 건 다들 알고 있겠지? 그 자동차에는 원격 조정 기능이 없었어. 그런데 자동차를 폭탄 테러용으로 개조해서 보냈더군.
잠깐, 어떻게 우리가 경찰서에서 찾으려고 했던 사람 정보를 너가 알고 있는거야? 경찰서에 미리 연락했어?
그럴리가. 내가 그렇게 너희 일에게 지극정성이겠어?
그러면?
174번은 안경을 고쳐쓰며 62번에게 그것도 몰라냐는 듯이 한심한 눈으로 말했다.
너 공무원이라며. 행정관리 통합 인트라넷 구축된 거 몰라? 옛날이면 한 사람 정보 캐내려면 카드회사 가야하고, 경찰서 가야하고, 여기저기 묻고 따져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잖아. 너희들이 경찰서에서 어떤 사람을 찾으려고 했고, 그 사람 정보를 열람했다는 기록까지 다 통합 인트라넷에 남는데. 아니 그걸 아직도 몰랐던 거야?
사생활보다 효율성을 최우선시 하는 청수가 모든 시민들의 인적 사항을 열람 및 기록하기 용이하게 통합 인트라넷을 구축한 지는 오래전 이야기, 자긴 시민들의 정보를 열람할 일도 없고 출장을 자주 가는 외교부라 잘 몰랐다면서 62번은 계속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 남자 뿐만 아니라 2개월 전에 몇백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실종됐어.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여명의 빛 교회 신도들이고.
저 여자가 교주인가보네?
맞아.
교주치곤 상당히 어린데?
20살이야.
이름 독특하다. 없음. 뭔가 교주 느낌 확 나는데?
바보야. 없음이 이름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 없다고.
나이와 이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경력 사항 역시 튈 수 밖에 없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은 물론 입학 기록 조차 없다는 것. 하물며 취직 경력도 없고, 신용카드를 발행했다던가 어떤 면허증을 따려던 시도조차 없는 것이 마치 비밀요원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하여 기록 사항을 해킹한 것처럼 그녀의 이력 사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있다면, 가족 사항에 한줄을 차지하고는 있는 그녀의 엄마.
그래 그거야. 어째서 이름이 저렇게 독특하고 이력사항이 없는지 알았어.
3번은 실마리가 풀렸다는 듯이 들뜬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종교 단체의 교주를 목표로 육성됐던거야. 분명 집에 감금 시켜 놓고 각종 종교 서적 읽히게 했을 걸? 왜냐면 어디 평범한 직장인보다 딸이 종교 단체 교주면 얼마나 편하게 살 수 있겠어. 맞지?
아닐거야. 누나.
?
그런 것 치고는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잖아. 사인도 타살도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게다가... 진짜 이게 모든 경력이야? 뭐 더 없어? 예를 들어 어디 영재기관에 들어가려고 했다던가, 학술원에 접촉했다던가.
갑자기 뭔 쌩뚱맞는 소리에 62번과 3번이 기이하게 보자 174번은 지금 나온 경력이 그녀의 전부라고 했다. 다만 그녀 어머니의 이력사항에서 독특한 사항을 발견했으니, 한재문 너 무슨 반무당이냐? 아니면 그냥 얼추 맞춘거냐? 그녀의 어머니의 경력 중 미륵보살 돔에서 피실험자로 있었던 일과 고위험 피실험자를 자처했다는 거, 허나 이는 비상계단을 통하여 학술원으로 몰래 침입하기 위한 거짓말이었고 그녀의 발칙한 행동이 발각되자 다시는 미륵보살돔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경고와 함께 관계자외 출입 금지 구역에 친입했다는 죄목으로, 그것도 고위급 지도자가 육성되는 학술원에 친입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벌금도 다 갚지 못하고 갔어. 왜냐면 일본에 지진해일이 와서 일자리고 뭐고 당장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깐.
그래도 돈 잘 쓰는 엄마 덕분에 딸은 잘먹고 잘 살았겠지?
원래 이런 사람들은 자기 밖에 생각안해. 자기 쓸돈 아까운데 누구에게 써줘? 아무리 딸이라고 해서 자신이 가족이라고 인식 안하는 순간 타인이 되는거야.
씀씀이가 큰 것 뿐만 아니라 허세 역시 심했던 여자, 없는 사람일수록 귀티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은 귀족 자제들이자,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술원에 들어갈 능력이 없었고 결국 실망감에 딸을 거의 방치하듯이 내버려 두었다는 것. 계속된 좌절과 실패와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의 간격은 멀어지고, 오히려 그것에 함부로 다가간 대가로 큰 벌금을 물게되자 억울함을 느끼며, 하르방 쓰나미 때문에 붕괴되어버린 경제상황의 여파와 불어난 대출빚으로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딸은 사람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되었으니, 이게 모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대책없는 욕망을 어머니를 통해 확실하게 배웠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 역시 뛰어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보면 3번이 말했던 교주를 목표로 육성되어졌다는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셈.
그래. 뭐 교주의 성장배경이 그렇다 치자. 그러면 지금 그녀는 어디 있는데?
야 서기관. 너 아까 했던 말을 뭘로 들었냐? 수백명의 사람들이 실종처리 됐고 그 사람들은 모두 특정 종교 단체의 신도들이라고 했잖아. 그녀가 있는 곳에 당연히 신도들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도 못찾고 있잖아.
그래도 한 두 명은 증거를 남겼겠지.
여명의 빛 교회는 다른 종교 단체들과 달리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교회겸 인력단체인 거야. 인력이 매우 급한 곳에 신도들을 보내서 일을 시키고 높은 임금으로 협상 해서 받아가고. 그들이 버는 돈은 공동 소유인 셈인데 사용할 권한이 있는 사람 역시 한정되어 있다보니 컨트롤이 잘됐던 거지.
그래. 그러면 후보생 주동자들은?
신도들 정보 찾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학술원 출신에 관한 인적사항, 카드 내역, 통화 내역 및 모든 정보는 열람이 불가해. 내가 하급 공무원이라서가 아니야. 고위급 인사 역시 보안의 이유로 학술원 후보생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없어. 하다못해 중퇴생까지 말이야. 거기서만큼은 나를 너희와 같은 취급해주더군.
단순 인력 단체 겸 종교 단체였던 여명의 빛 교회가 우주선을 자체 제작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세력이 된 뒷배경에는 그만큼 추적이 불가능한 학술원 후보생이 합류하고 난 후 부터였다. 충성심 높은 인력과 풍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종교 단체, 극비 정보를 가지고 있는 엘리트 후보생들의 만남.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하여 희생자로서 한 사람을 지목했으니, 그 사람은 머리에 피도 안마른 나이에 파종단으로 선정된 재문이었고 시민들의 부정적인 여론이 올라올 때 신도 수를 크게 늘리면서 힘도 크게 불어났다. 파종 계획 우주선을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에 3번은 꽉꽉 막혀있는 미로에 들어간 것처럼 답답하고 미치겠다고 소리 쳤는데
난 진짜 이해가 안돼! 기왕 꾸려진 파종단, 어린시절부터 외기권 적응 훈련을 받아온 학술원 출신들이 가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왜 시민들의 반발이 그렇게 큰거야?
설마 너희들... 설마 파종 계획이 정말 성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것을 위해 지금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잖아.
시민들은 모두 돈지랄로 보고 있는 거 같던데?
뭐?
62번의 말에 174번은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그들의 진짜 마음도 모르냐며 비웃었고 마치 시민들의 대표인 것처럼 그들의 뼛속 깊숙한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파종계획은 냉전시대에 우주로 보내는 골드 레코드와 같은 것이라고. 그런 행동을 하면서 멸망에 대한 불안감을 잊어보려는 것이 같다고. 타임캡슐 같은 것, 열어보면 기분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데 그 골든 레코드를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귀족 뿐이라면? 타임캡슐을 탈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면? 오래전부터 커뮤니티가 있었고 자기들끼리의 커넥션이 있다면? 174번은 시민의 입장 좀 다시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 사람들... 지구 멸종 직전까지 자기들끼리 똘똘뭉치네? 우리는 들러리였나?
그러니깐... 카비탄 보호국처럼 추첨제를 통한 민주적인 방식을 원했단 말이지?
그것도 의견이 갈리긴 해. 누구는 당연히 임무 성공을 위하여 최정예 요원을 보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하고, 누구는 소시민인 우리들도 당연히 가야하는 것이 맞지 않냐면서 말이야. 더군다나 우주선이 그 최정예 요원들의 돈으로 만든 것도 아니잖아. 시민들의 돈, 나랏돈으로 만든 거잖아. 그런데 시민들의 고혈로 만든 우주선을 타고 가는게 이제 막 20살 된 귀족 아이라면?
재문이는 학술원 후보생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야.
그야 학술원 출신들만 아는 사실이지 일반 시민들이 알겠어? 말했지. 우리의 기록은 보완상의 이유로 접근 불가하다고. 학술원의 존재는 물론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는 사람은 청수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어. 그런 시민들이 본 재문이는 운좋게 귀족으로 태어나 파종계획에 참가하게 된 애새끼 말고는 뭐 다르게 보이겠냐?
엘리트 계층인 셋과 다르게 서민들과 자주 접해본 174번의 말이 즉 시민들의 여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3번은 이해가지 않는다는다를 넘어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급격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끝내 찾지 못한 주동자들의 행방. 더 이상 할말 없던 셋은 다음 조사를 위하여 이만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떠나기 전 62번은 174번을 한번 떠보았으니, 너는 파종 계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긍정적이야? 아니면 부정적이야? 그의 말에 174번은 거짓이지만 힘이 되는 말을 해야할지, 진실되지만 절망감을 증폭시키는 말을 해야할지 고민된다고 하자 62번은 사실대로 말해도 좋다고 했다. 그 순간 한번도 웃지 않았던 174번이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행성은 오직 지구 하나 뿐이야. 지구의 변화에 맞춰 인간은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물체로 진화해왔고 생각 역시 거기에 맞춰 변했지. 그런데 평균과 거리가 먼 애가 파종 계획을 간다라... 거기다 파종단을 이끌 유력 후보라니... 새 행성에 적응하기 위해 안그래도 이해 안가는 생각 구조는 더욱더 기이하게 변하겠지. 얼마나 엇나간 인간이 되어 돌아올지 궁금한 걸?
...
스스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외계인이 되거나 기계로 온몸을 두르고 와서는 이상한 사상을 억지로 쑤셔 넣을지 누가 알아.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고. 그러니 잘 생각해보라고 협박할지 어떻게 아냐고. 지 멋대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를.
너 말이야, 아까부터 재문이에게 어떤 앙금을 가지고 대하는데 한번만 더 그러면
형. 그만 가자.
막상 비난의 대상인 된 재문이는 무덤덤하게, 반면 62번은 평생 그렇게 남을 미워하면서 살거냐고 따졌고 자칫 싸움이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재문이는 그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가기 전, 재문이는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174번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걱정하지마. 그런 짓 절대 안할테니깐.
...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형.
파종 계획을 시작하고 콜립슬립에 빠진다면 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것이기에, 174번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을 알기에 기분 좋은 이별을 하고 싶었지만 174번은 듣는 둥 마는 둥하는 하며 담배 한개비 꺼내 물고서는 말없이 피웠다. 중앙통제실과 다르게 빛이 환하게 비추는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도 174번은 재문이에게 눈길은 물론 어떠한 말도 건내주지 않았다.
3
...
...
...
...
소형 리무진 형태로 이루어진 3번의 차는 원격조종으로 운전기사가 따로 필요없었다. 그래서 누울수 있을 정도로 넓직한 소파가 두개 놓여진 뒷좌석, 바로 그 한켠에서 3번과 62번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다리와 손을 모으고 재문이를 훔쳐보았다. 아무말 없이 투명 디스플레이로 수집한 정보를 보고 있는 재문이. 하지만 지쳐보이는 눈을 보아하니 174번의 고발에 있어서 심리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3번과 62번 역시 174번의 입을 저절로 다물게 만드는 재문이의 위협적인 화술과 후보생들에게 가지고 있던 앙금을 성토하는 모습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결국 3번이 팔꿈치로 62번을 툭툭 건드렸고 용기내어 말하는 62번.
저... 재문아?
응?
그... 저기...
?
배 안고파? 점심 먹을까?
그다지. 형이랑 누나 둘이 먹어. 난 지금 뭐 먹으면 탈 날 거 같아.
전혀 엉뚱한 말을 하는 62번의 모습에 속 터질려고 하는 3번은 집적 입을 열었다.
재문아 혹시 우리한테 뭐 섭섭하거나 상처 받았던 일 있어?
응? 갑자기?
아까 했던 말이 계속 걸려서. 혹시 학술원에 있었을 당시 우리도 너에게 무의식적으로 상처 주는 행동을 했나 해서.
재문이는 혹시 그거 때문에 둘이 부자연스럽게 앉았냐면서 가벼운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걱정마. 형 누나한테는 그런 기억 전혀 없으니깐.
그나저나 대체 누구야? 누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
어떤 거?
너가 말했잖아. 성희롱에 사이코패스 소리 들었다고.
괜찮아. 다 지나갔어.
혹시 77번 그애야? 하긴 그애 너한테 너무 하더라.
...
하지만 그러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 그때 너의 편을 들어주지 못해서.
괜찮다니깐. 옛날 일이야.
그때 62번은 그럴리가 없다면서 소파 옆에 있는 콜드게이터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꺼낸 후 잔을 나눠주고 와인을 따라주고서는 말했다.
정말 그럴까? 과거의 일은 현재를 행동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던데. 우리가 미래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야. 과거의 일 때문에 살아가는 게 더 맞지.
...
복수하고 싶거나 보답하고 싶거나, 과거에는 받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는 꼭 받아내려고 말이지.
...
미래에 생길 일을 예측하는 것보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복기하면 미래를 더 잘 알 수 있어. 그치 재문아?
그렇지.
그래서 그런데 우리 지금 만나러 가는 애 학술원 번호 몇번이냐?
91번. 85번 형하고 친하게 지내던 형이야.
혹시 그애하고는 무슨 일 없었어?
... 없어...
있으면 미리 말해줘. 그러면 우리가 설득 시키는 데 최대한 도울테니깐. 알았지?
...
재문아?
알았어.
그리고 62번은 3번에게도 혹시 91번에 대해 아냐고 물었다. 몰라. 여자들 사이에서 그 두 놈은 변태새끼였거든. 그나마 85번에 비해서 91번은 잘생긴 외모에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변태같은 애와 어울려 다니니 똑같은 놈이라고, 오히려 그런애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3번과 62번이 곧 만나러갈 91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재문이는 마시지 않는 와인잔을 치워두며 창 밖 경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다리를 건너고 있기에 바다와 하늘이 동시에 보이는 전경, 곧 여름이 시작될 것 같은 상쾌해 보이는 날씨, 그러나 공해로 인하여 하늘에는 미묘한 뿌연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실수 이후 보기 힘든 새파란 하늘처럼 마음을 가려야만 한다는 거, 62번과 3번에게는 미안한 상황이었디지만 91번과 있었던 일을 재문이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것은 시뮬레이션 테스트 때 85번의 목구멍에 폭탄을 쑤셔 넣은 정당한 이유이자, 91번이 왜 그런 짓을 했냐 공격하면 그것을 반격의 무기 삼아 다시는 입을 놀리지 못하게 못구멍을 찌를 것이니깐. 물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리고 비밀스럽게. 수풀 속에 숨어 사슴을 노리는 간악한 늑대처럼 이빨을 갈며 단 한번의 공격으로 사슴의 숨통을 아작내리라고 다짐했다. 재문이에게 있어서 91번은 77번이나 85번처럼 강도 높은 악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백한 공범, 위기의 상황 때 침묵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91번이 save 등급을 받지 못하고 시뮬레이션 테스트에 참여하지 못해 그런 것 뿐이지, 만약 참가했다면 85번처럼 기억에 남는 방법으로 죽였을테니깐.
4
때는 크리스마스 날, 재롱을 부리고 싶었는지, 아니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쉽쓸려서 그런 거지, 그것도 아니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길 바랬는지 재문이는 초콜릿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후보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고맙다며 미소 지었지만 몇몇은 특이한 반응을 보였는데, 특히 26번은 초콜릿을 받자마자 프로포즈 받은 것처럼 복받친 표정으로 초콜릿을 소중하게 감싸쥐었다.
이거 누나한테 주는 거야? 나한테 주는 거 맞지?
다른 애들한테도 다줬어. 나도 받았어.
안되겠어! 이거 먹지 않고 영원히 보관해야겠어! 다른 초콜릿도 아닌 재문이가 준거잖아?
또 시작이다. 오버 떤다.
생각해봐! 재문이가 준거라고! 미래의 청수의 수장님이 되실 분이 준거니 오래도록 보관해서 비싸게 팔아야지!
저 애가 그정도까지 된다고?
고럼! 당연하지!
재문아. 누나한테 하나 더 줘라. 저거 많이 보관해서 부자되라고 해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술원에서 제일 친한 삼인방 중 한 명이었기에, 그것도 낯가림이 심한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준 은인이였기에 재문이는 수줍은 얼굴을 하며, 그러면 특별히 누나한테만 하나 더 줄게...라며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26번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는 모습과 다른 후보생들 역시 고맙다고 하는 반응에 재문이는 괜히 용기가 나서 평소 무섭다고 생각하던 85번과 91번에게도 다가가 초콜릿이 건네주었다. 재문이뿐만 아니라 다른 후보생들 역시 그 둘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는데 평소 수위높은 성적 농담부터해서 좋지 않은 소문들 때문에 피해다녔지만 그런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 재문이. 그 모습에 둘은 매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후보생들처럼 고맙다는 말과 함께 초콜릿을 받았다. 그때 갑자기 85번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돌아서려던 재문이를 붙잡았다.
너 이리 와봐.
응?
이리와보라고.

재문이보다 키가 크거나 나이가 많아서 그런게 아니었다. 다른 후보생에 비해 85번과 91번에게는 확실히 성숙한 분위기가 풍김과 동시에 불량한 기운 역시 났기에 재문이를 그를 따라가는데 주저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머리카락에 베어던 담배냄새라던가 느끼하게 생긴 85번의 진한 쌍꺼풀부터해서 무서웠으니깐. 하지만 85번은 재문이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고서는 자신의 개인 기숙사에 밀어넣었고 그렇게 셋은 같은 방, 같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한재문, 너 얼굴 진짜 보기 힘들더라. 85번은 평소에 재문이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많이 없어서 아쉬웠다고,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두드리며 이 위에 앉아 형이랑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러나 낯가림이 심한 재문이는 낯선 형에게, 그것도 무릎 위에 앉는 친밀한 스킨십이 싫어서 뒷걸음질 쳤지만 91번이 번쩍 들고서는 억지로 무릎 위에 앉히게 했다.
야이 새끼야. 형이 너랑 놀고 싶다는데 왜 도망치려고 그래. 응?
그니깐. 아니면 누나 무릎 위가 좋아서 그래? 여자 무릎이 더 좋은 거냐?
85번의 말에 91번은 이 어린애가 벌써부터 여자 좋는 거 아냐고 물었고 85번은 이 나이정도면 알 거 다 안다고 했다.
들었지? 너 언제까지 누나하고만 놀거냐. 마마보이야? 아니면 여자야?
아니야.
아니지? 재문이 여자 아니지?
멀리서도 담배냄새 나던 그인데 바로 뒤에 있으니 더욱 선명해졌고 재문이는 저도 모르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재문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보여주는 의문의 영상, 91번은 이런 거 봐야 큰다면서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고 그 영상을 보자마자 재문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교수님의 얼굴을 합성한 포르노 영상이었는데 그것도 그냥 포르노가 아닌 여자는 고문 당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고 침대보 위는 새빨간 피로 뒤덮혀 있었다. 공포 영화 같지만 또 공포 영화는 아닌 이상한 영상. 살결이 찢어지고 피멍이 드는 적나라한 영상. 끈적이는 액체들로 뒤덮인 여자의 처참한 모습에 재문이는 무서워 도망치려고 했지만 85번이 꽉 붙잡은 터라 벗어나지도 못했다.
봐보라니깐. 이거 봐야 어른이 된다니깐.
아아아아아아악! 영상 속 여자의 엉덩이에 피멍이 터져버리자 재문이의 눈물샘도 터지면서 몸부림쳤고 결국 그의 무릎 위를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인 기숙사 문은 출입은 물론 퇴실에 있어서도 기숙사 주인의 지문과 비밀번호가 필요했고 그 두가지를 모두 모르는 재문이는 문 주변을 서성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담배까지 피며 감상하기 시작하는 둘.
내가 말헀지 병신아 ㅋㅋ 너 왜 애를 괴롭히고 그러냐.
마마보이라는 소리 쳐 들으니깐 도와주려고 했지.
저거 본다고해서 갑자기 바뀌겠냐?
아씨, 끝까지 보면 모르지.
그렇게 85번은 문에 바짝 붙어 오들오들 떠는 재문이에게 다가갔고 그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담배의 뿌연 연기사이로 보이는 85번의 얼굴, 학술원 후보생들과 교수님 모두 자신에게 미묘한 배려심을 담은 표정을 보였지만 85번의 얼굴에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재문이 바로 옆에서 담배를 뻑뻑 피울 수 있었고 문 열어달라는 부탁도 대놓고 무시하며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왜. 나가고 싶어?
응...
무서워서 그래? 형이랑 저거 같이 보자니깐?
싫어...
알았어. 넌 영원히 마마보이고 기집애다. 알았지?
지문인식과 비밀번호로 잠금을 풀고 재문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때, 85번이 손목을 낚아채서는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서는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라. 말하면 가만 안둔다.
...
알았어?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저 영상에 나온 여자처럼 너한테도 확 해버린다.
아아아아아악!!!! 타이밍에 맞춰 울려퍼지는 영상 속 여자의 비명. 그녀는 정말 죽은 것처럼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더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그녀를 비추던 카메라의 전원도 꺼지면서 영상은 마무리 되었다. 재문이는 제발 좀 도와달라는 식으로 91번을 바라보았지만 냉담하고 차가운 눈빛으로만 바라 볼 뿐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으니, 난생 처음으로 어른 대접을 받았지만 결국 부리나케 도망쳤고 휴게실에서 이야기하고 놀던 26번을 발견하자마자 어린 아이처럼 품안에 파고 들어가 울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우는건데?
흐흐흑...
재문아...
재문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말만 반복했지만 26번의 유니폼 안쪽이 다 젖을 정도로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85번의 협박이 무서운 것도 있었지만 재문이가 아무 말 하지 않은 이유,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할 시간이니깐. 마마보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혼자서 시련을 극복해 나가야하니깐. 혼자 이겨내야만 어른이 되는 거니깐. 도움을 받지 않아야 남자다운 거니깐. 그러나 성인이 된 시점에서 그 일을 돌이켜보면 그때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할 것을 재문이는 후회했다. 그때 왜 이상한 고집과 아집을 부렸는지. 누나와 형에게 기대고 어리광 부릴걸. 누가 봐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왜 그렇게 어른스러움과 남자다움에 집착했던 건지. 그때에 대한 아쉬움, 아니면 반감 때문인지 어른스럽다 못해 고전적인 여성용 정장에 끌리게 된 건가 재문이는 생각했다.
도착했어. 가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차는 거대한 건물 앞에 정차했고 91번이 소속되어 있는 청수재단 계열사에 속하는 청수 인터네셔널 사옥에 도착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던 91번을 다시 볼 생각에 재문이는 기분이 가라앉으면서도 85번처럼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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