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의가 시작되기 전, 회의에 참가하는 한 남자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인의 높은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입까지 벌리며 멍 때리고 있는 남자. 그가 보고 있는 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심해에 위치한 미륵보살돔에 내려오는 햇빛은 지상의 햇빛과 비교하면 희미하고 약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매력적이고, 특히 해질녘 빛은 투명한 수천겹의 황금색 온자락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보였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입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어떤 천사의 날개옷처럼.
저... 총수님?
회의 진행자의 말에 정신 차린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격에 맞지 않게 입까지 벌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괜히 무안했는지 자세를 고쳐 잡고 헛기침 했다. 그리고 진행자가 이만 시작해도 괜찮냐는 질문에 어서 시작하자고 재촉하는 미륵보살돔의 총수. 회의 진행자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지면서 회의실은 일순간에 암흑 지대가 되었고, 앞쪽 정중앙에 위치한 프로젝터가 켜지면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임원진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꽂혔다. 프레젠테이션 주제는 제13기 세속오계 학술원 졸업생에 관한 브리핑이었는데 진행자가 입학생 수와 자발적 이직 및 중퇴자, 그리고 훈련 도중 의료적 사고를 겪은 후보생의 수치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때 총수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런 건 나중에 읽어볼테니깐 우선 중요한 것부터 가자고.
미륵보살돔의 총수는 물론 임원진들에게 있어 후보생이 얼마나 죽고 얼마나 살았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술원이 만들어낸 진정한 엘리트, 자신들이 짠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이행하여 차기 청수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base 등급이나 ace 등급 후보생은 그저 들러리, 언급할 가치도 없는 부산물이었고 오직 상위 5% 안에 드는 save 등급을 취득한 후보생만이 회의할 가치가 있는 자들이었으니, 결국 진행자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돌려 save 등급을 취득한 10명의 후보생에 대한 본격적인 브리핑이 시작했고 그제야 임원진들의 눈이 살아나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13기 save 등급 후보생 리스트입니다. 앞전 12기 졸업생과 비교해 볼 때 뛰어난 것은 물론, 역대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7기 후보생들보다 성적이 더 좋았습니다. 기존에는 없던 외기권 적응력 훈련을 포함시켰는데도 말이죠.
일본에 진지 해일도 왔었잖아. 학술원이 뒤집어졌지.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사람은 고생 해야 더 강해진다는 건가?
...
...
...
계속 진행하게.
네. 그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인 후보생은 37번 한재문 후보생이고 save 등급을 받은 역대 후보생 중에서도 최연소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낯이 익은데?
임원진들도 총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책상앞 테블릿으로 37번 후보색을 얼굴을 확대해서 보았다. 눈썹을 덮은 앞머리. 다른 save 등급의 후보생들보다 앳되 보이는 얼굴. 순하면서도 착해보이는 눈. 하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부터 어둡게 깔린 눈가를 보아하니 쉽게 대할 수 있는 후보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이력사항에 적힌 수상 경력을 보고 나서야, 아...아아. 이애? 라고 말하는 임원진들. 지진 해일로 학술원이 무너지기 전 잠수정을 이용해 후보생들을 구한 영웅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상을 이력으로 가진 후보생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크게 인정받은 후에는 대부분 거들먹거리다가 도태되기 마련인데 끝내 save 등급까지 받아낸 37번의 모습에 총수는 묘한 미소를 지었으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뛰어난 자기 객관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고도화 된 인내력. 시상식 때 수줍은 얼굴로 자신이 건낸 악수를 받았던 소년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자 미륵보살돔의 총수는 매우 만족해했고 청수재단마저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최상품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미소는 커졌다.
좋아. 나쁘지 않네. 시뮬레이션 테스트도 좋았겠지?
그러면 바로 시뮬레이션 테스트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저희는 총 30일 동안 save 등급 후보생들에게 명상용 핼멧과 시뮬레이션 슈트를 입히고 외계행성에 정착 후 벌어질 일들에 관해서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했습니다. 화면을 보시죠. 1시방향부터 10시 방향까지 후보생들을 각각 배치시키고 1만명의 파종단을 투입, 그 중 77번 후보생 같은 경우는 굉장히 빠른 확장을 하면서 땅을 늘렸습니다.
77번 후보생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빠른 확장을 택했다면 85번은 가장 가까운 두 명의 후보생 영역을 지배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모습에 자극 받은 다른 후보생들도 적극적인 지배 전략을 따라해보았지만 오히려 타이밍과 허점을 보이면서 다른 후보생에게 지배당해 버렸다. 사파리와도 같은 먹고 먹히는 세계. 생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곳곳에 발생하는 불평등. 그렇게 77번과 85번을 중심으로 외계행성이 발전되던 그때, 8시 방향에 있는 검은색 땅은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정복 활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저 아래 검은색 땅은 몇번 후보생이지?
네. 37번입니다.
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데.
그게...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어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37번은 바로 정복 활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파이를 이용하여 탐색 작전과 기술 탈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save 등급의 후보생들이 자신이 지내온 미륵보살돔과 같은 스파이 양성재단을 구축했지만 37번은 그들보다 빨리,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6세 때부터 요원 지망생을 모집하여 통제 교육 및 약물을 이용하여 사상에 대한 충성심을 증폭시켰다. 그렇게 양성시킨 요원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후보생의 지역에 쿠테타를 일으키면서 손집게 장악, 쿠테타 뿐만 아니라 기술력 탈취에 있어서도 요원이 크게 활약하면서 내적으로 37번 후보생은 다른 후보생들보다 앞서 있었다. 겉으로는 아카데미 로비와 같은 과학 발전의 전폭적인 지지 조약을 맺으면서 뒤로는 그렇게 발전한 기술을 탈취하는 37번의 요원들, 다른 후보생의 요원보다 충성심은 물론 사명감과 죽음을 대비하는 자세에 특화되어 있는 6세 때부터 양성된 요원들, 그런 요원들을 보유한 37번은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갈 수 밖에 없었을 수 밖에.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흑사병처럼 37번의 영역은 겁도 없이 무식하게 커져만 갔고 뒤늦게서야 반37번 연합이 결성, 그러나 어느 순간 반37번 연합이 일순간에 항복을 선언하면서 시뮬레이션 테스트는 마무리 되었다.
방금 뭐였지? 아직 37번이 모든 땅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잖아. 절반의 땅을 차지했다고 해도 승산이 있지 않았나?
연합을 형성한 후보생들이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강제 종료해서 그렇습니다.
왜?
테스트를 종료하기 전, 37번과 마지막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기선제압을 당하고 항복했군.
네. 그렇습니다.
정말 마무리까지 확실한 후보생이군.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마지막으로 13기 후보생에 관한 브리핑이 끝마치자 조명이 켜지고 커튼이 열려지면서 황금빛의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테블릿 위로 내려앉은 매우 얆은 해질녘의 빛. 테블릿에 비춘 37번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는 총수. 자신이 만든 후보생 중에서 부정할 것 없는 최상품이었다. 시딩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어도 결점 없는 후보생이었다. 속내가 잘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은 모두 신중한 성격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고, 잠수정으로 모두를 구하면서 받은 수상경력이 사실 속내는 정의로운 성격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다만 그 신중함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비윤리적인 범위로까지 확장되었으니, 세속오계 학술원도 입학 나이가 10세인데 그보다 더 어린 6세, 거기다가 통제와 약물을 이용한 사상 강화 교육이라니.
37번 후보생 말이야, 6살 때 학술원에 들어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 써져있는데 뭐. 자기가 6살 때 들어왔으니깐 양성할 요원들도 6살로 맞춘 건가?
...
자신이 겪었던 일을 그대로 하는... 강박 재현 같은 건가...
...
그러지 않을까요?
그 말에 총수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우리가 그렇게까진 무자비하지 않았잖아. 그정도 까지는 아니지 않았어?
총수의 말에 진행자와 임원진들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순간에 회의실이 조용해지며 길어진 침묵의 시간, 괜히 무안해진 총수는 37번과 반37번 연합의 마지막 커넥션 장면을 볼 수 있냐고 물었다.
2
비록 현실이 아닌 시뮬레이션 테스트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감히 연합을 결성했다는 사실에 재문이의 인내심은 바닥 났다. 이제부터 자신을 제외한 모든 후보생은 적이다. 그렇게 생각한 재문이는 연합 대표들이 회의를 나누고 있는 비밀 장소를 향해서 정장 단추 하나하나를 여미고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장소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꽁꽁 잠궈놓은 문을 폭파시키자 자신과 같이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하고 있는 save 등급 후보생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들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너가 어떻게 여기로!
재문이의 부하 요원들이 다른 연합원들을 제압하고 있을 때 재문이는 자신이 직접 연합 대표인 85번을 제압하기 위하여 뚜벅뚜벅, 오른손에 낀 검정 장갑을 벗고 정장 소매를 거두며 주머니 속에 맞춤 제작한 소형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았다. 그리고 85번의 머리채를 있는 힘껏 잡아 당겨 반사적으로 벌려진 입을 향해서, 우욱...! 재문이의 오른팔에 숨쉬기 위해 발버둥치는 목구멍 경련이 느껴졌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빼면 안됐다. 조금 더 숨이 넘어가기 직전,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기 직전, 그제야 재문이가 팔을 뽑았고 85번은 미친듯이 숨을 들이마시며 발작에 가까운 기침을 하였다. 그때 자신의 목구멍에 무언가 쑤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85번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세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37번. 85번이 다시 입을 벌려 이물감이 느껴지는 그것을 꺼내려던 순간, - 피슉 거리는 소리와 함께 85번의 몸이 터져버리면서 그의 내장과 살점들이 회의실 구석까지 조각조각 날아가버렸다.

수류탄의 화력이 너무 좋으면 85번의 몸이 가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포심을 줄 수 없었고, 이에 재문이는 화력을 낮춘 소형 수류탄을 자체 제작하여 연합원들에게 자신을 잘못 상대하면 어떻게 되는 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터져버린 내장이 회의장에 나뒹굴고 37번의 얼굴에서 85번을 이루던 피가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그래픽이 일그러지며 사라지는 연합원들. 그들은 시뮬레이션 테스트에 강제 로그오프를 하였고 이로서 시뮬레이션 테스트의 승리자이자 최후의 승자는 37번이 되었다. 이에 재문이도 강제 로그오프 하면서 나오게 되었다.
하아.... 하아...
개인 명상용 핼멧을 벗는 순간 드디어 찾게 된 현실 감각. 방금까지만해도 피냄새가 진동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뮬레이션룸 특유의 기판 냄새와 웅웅 거리는 소리, 은은한 푸른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거의 한달의 시간이 가까울 정도로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드나들면서 재문이는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있었고 당장이라도 개인 기숙사로 달려가 마음 편히 자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화가 잔뜩 난 듯 쿵쿵 거리며 달려왔고 재문이의 예상대로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 85번이 살기를 띤 얼굴로 재문이의 머리채를 잡아채서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85번과 달리 시뮬레이션 테스트로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풀린 눈과 힘빠진 목소리로 입을 어는 37번.
형... 아파...
아프면 왜 그딴 짓 했어! 너도 목구멍에 수류탄 쑤셔 줄까? 아가리 찢어버려?
형. 그건 시뮬레이션이야. 가상현실이라고.
가상현실이든 뭐든 진짜 아파 죽겠는데! 내장 터지는 느낌은 똑같은데!
재문이와 85번이 입고 있는 타이트한 시뮬레이션 슈트에는 나노 단위로 촘촘하게 가상 발현 촉각 센서가 세겨져 있었다. 통증은 물론 오싹한 기운, 불길한 느낌까지 구현화 할 수 있는 슈트, 그런 슈트를 착용한 채 내장이 터지는 고통을 느낀 85번은 금방이라도 재문이를 죽일 것처럼 씨익씨익 거렸지만 막상 재문이는 말없이 묘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자기 감정 하나 조절 못하면서 어떻게 save 등급까지 따냈던건지. 시뮬레이션 테스트에 설치된 보안카메라 하나 고려하지 못하는 조심성부터해서 감정 조절 능력의 부족, 거기다가 기억력 부족까지. 볼 것도 없었다. 85번은 파종 계획의 리더가 될 자격조차 없었다. 그 사실에 시뮬레이션 테스트룸 특유의 푸른빛을 받은 재문이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뚜렷해졌고, 동시에 85번에게 그런 짓을 한 타당한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난 분명 연합을 형성하지 말라고 했어. 만약 내말을 어길 시 각오하라는 경고도 했고.
나도 그정도는 각오했어!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고! 그런데 넌 사람을 죽이는데 꼭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야 했냐? 그냥 총으로 쏴서 죽이면 되잖아! 굳이 그런 방법을 써야겠냐고!
형 고통스러워하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 하드코어 매니아인 줄 알았는데.
...
왜? 보는 건 좋아하는데 실제로 하는 건 별로였어? 미안. 그걸 고려하지 못했네.
그 순간 85번은 무언가가 생각 났는지 재문이의 머리채를 잡던 손을 놓았고 경악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사건이자, 그저 장난었는데 재문이는 복수귀가 되어 그때의 일을 되갚아 주었고 이 모든 일이 인과응보라는 사실에 85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마 당한 악령처럼 85번은 재문이에게서 도망쳤다.
3
그 변태 새끼는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라고. 항상 피해자만 오래도록 기억하지 가해자는 기억도 안해.
...
나쁜 기억은 영원히 죽지 않으니깐. 그래서 복수는 피해자가 해야하는 게 맞는거야.
...
누나도 그래. 너도 내게 나쁜 기억이야.
청수재단의 호출로 인하여 시딩 프로젝트 훈련을 받고 있던 재문이는 일주일동안 외출을 허가, 본가에도 가보고, 호텔에도 가보고, 여러곳에 머물러 적응해보려고 했지만 지상으로서의 삶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공기청정기가 전반적으로 설치되어있는 학술원과 다르게 네오부산은 그러지 못했기에 그런 건지, 심해와 지상간의 기압 기온 차 때문에 그런 건지 몰라도 재문이는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다. 결국 강간미수까지 당하는 불상사를 겪으면서 다시 호텔을 아지트로 삼았지만 눈부신 네오부산의 야경에 재문이의 눈은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재문이는 안정감을 되찾기 위해 소파에 기댄 채 야경을 바라보며 학술원에서의 추억과 사람들을 기억속에 끄집어 냈다. 하드코어 포르노 매니아 였기에 집적 입에 수류탄을 쑤셔 넣어 주었던 85번, save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거들먹 거렸지만 재문이 역시 save 등급을 받아냈다는 사실에 살기를 보인 77번, 피멍이 들고 부풀어 오른 팔을 가지며 끝까지 훈련에 참가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174번, 에고 파라미터가 너무 높아서 특수 과업 운영 이사회에 끌려가 온몸에 주사 자국을 얻게 된 후보생부터 특수 과업 운영 감독관, 그리고 박재문 박사. 하나같이 사이코에 변태들 뿐이었지만 그 중 최고의 사이코를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있는대로 찌르고 후벼 파더니 결국 죽음으로 나몰라라 도망친 26번, 재문이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아크릴 카드 속 머리카락의 주인이기도 했다.
이대로 끝내서는 안 돼. 마저 해야지.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만약 파종계획에 성공한다면, 미륵보살돔 과학자들의 예상대로 새행성에 정착 후 다시 과학의 부흥기가 찾아온다면, 머리카락 하나로 사람 하나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부활 장치도 만들 수 있겠지.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재문이는 26번을 부활시킬 것이고 그녀가 반가운 마음에 자신을 향하여 두 팔 벌린다면 즉시 찢어 죽이는 복수를 단행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감히 자기 말을 거역하고 iso 명상에 참여했던 미련한 고집, 사라지지 않는 부담을 준 대가, 죽음으로 도피한 결과를 반드시 되갚아줘야 하기에. 그리고 그때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누나라고 변명하면 되려나. 이제는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까지 됐는데 과연 그 응석을 받아줄려나.

재문이는 황금색 머리카락 한가닥이 들어 있는 아크릴 카드를 호텔 창문 너머 비치는 야경에 맞추어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보았다. 물론 이것이 파종계획에 참여하게 만든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였지만 지옥같은 삶의 원동력이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겐 분노가 동력원이라면 복수 역시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였기에, 특히 보살핌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욱.
...
자야 하는데, 내일 청수재단 본사에 찾아가 임무에 대한 브리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자야했지만 재문이는 잠이 오지 않았기에 그저 아크릴 카드만 만지작 거렸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 고려해야할 일도 많았고. 처리해야할 것, 은혜 받은 부담스러운 대가와 갚아야 할 빚, 그리고 받아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 막 20살이 된 사회초년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짐이었고 재문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쓰여지라고 다듬어지고 깎여지고, 찢기면서 드디어 완성품이 됐는데 이제 와서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하고 반기를 드는 짓? 거기다가 청수를 상대로? 자살길이나 다름 없었다.
시키면 해야한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쓸모있음과 필요성을 보여야 한다. 물론 파종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게 된 시점에는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말 잘듣는 아이처럼 착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자신의 손에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재문이도 그러한 감정없는 연기에 숙달됐는지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아크릴 카드를 무채색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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