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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덕순의 인간관계학

에세이/옥덕순의 인간 관계학

by @blog 2025. 7.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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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파민 이론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그냥 마음이 시키는대로 사람을 만나지만 뭔가 사소한 것까지 분석하고 싶은 사람은 인간관계에서까지 공식을 만든다. 예를 들어 샤르트르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디즘, 마조히즘, 무관심, 유희인 4가지로 나누었고 칼융 역시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으로 사람을 정의한 것.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넓게 보면 인간은 맹목적으로 의지, 무의식에 이끌려다니지만 충족이유율 때문에 정확한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거, 주관성에 이끌려 다닌다는 것으로 보아 인간관계학과 같다. 카데기 인간관계론은 어떠냐고? 내게 있어서 그건 인간관계론보다는 그냥 <아프니깐 청춘이다>처럼 매순간 순발력을 발휘하라는 자기개발서 같던데? 자기개발서를 읽은 직후에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무엇이든지 다 할 거 같지만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카데기 인간관계론 역시 읽고 난 후에는 모든 인간관계를 섭렵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 철학대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나 역시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만의 인간관계론을 가지고 있는데 위에 말한 카데기의 인간관계론이 아닌 좀 더 철학자에 가까운, 하지만 단순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의지라는 것에 맹목적으로 이끌려다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이상화 된 모습에 맹목적으로 이끌려 다닌다”. 왜냐면 그 모습 하나만 이루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 모두 해결되거든. 육체의 한계, 타인에 대한 인정, 성공, 미래에 찾아올 두려움, 외로움, 성적욕망, 그 모든 것을 해결주는 방법이 내가 꿈꾸는 사람되기니깐. 다만 이것이 하나의 딱 완성되어 있는 인간보다는 조각조각난 인간이니... 어떤 남자가 귀여운 소녀가 되고 싶은데 또 어떨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정치계 거물이 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능적으로 엮여지려고, 연결되어지려고 하다보니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 하나만 찾으면 그와 엮여져 있는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씀. 무의식이 만들어낸 완벽한 내 모습, 그 이미지에 부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거라는 생각, 사람은 그 이미지와 늘 말고 당기기를 하고 어쩔때는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주어 숨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 이미지에 매우 강하게 이끌린다.



  어디 대표적인 예시 하나를 들어볼까? 지금은 고인이 되신분인데 이 남자 인스타그램에 자주 우울증 약사진을 올리고 나는 외로운 사람, 고독한 사람이라고 힘듬을 자주 호소했다. 운좋게도 그는 인터넷 유명인사라서 다가오는 여자들이 많았고 여자친구와 사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상할정도로 연애기간이 짧고 여자들의 연애 후기도 좋지 않았던 것. 특히 성적 패티쉬는 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귀고 난 후 애인에게 비밀스럽게 공개하는거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적 패티쉬를 과감하게 오픈하여 처음부터 그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처럼 나왔고 그것을 이해해보겠다는 여자쪽도 하나같이 과하다, 가스라이팅 한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며 떠났다. 상처투성이인 여자가 이상형이고 사디즘을 가진 우울한 남자라니... 뭔가 앞뒤가 안맞는데? 우선 상처투성이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고, 우울증을 호소하는데 애인을 찾는 것도 이상하고, 자칭 사디즘이라고 하면서 또 사람을 찾으려는 것도 이상하고.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은 무엇이고 그것이 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은 대충 감이 오더라고.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위태로운 여자를 구해주는 빛의 기사,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구원자, 남자 중의 남자.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사랑에 빠졌고 (당연하지. 인간은 모두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다. 특히 남자는 더욱더) 그것으로 가는 방법으로 아픈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세상에 없었나봐. 자신에게 매달리는 상처투성이의 비참한 여자는 없었나봐. 그래서 결국 필요 이상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찾아온 여자에게 가스라이팅을 해서 내가 원하는 여자를 만들려고 했던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자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으니, 앞서 말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고 싶다는 건 맹목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죄책감? 책임감? 그런 건 발생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내가 목말라 죽겠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파악하고 배려해.
 


 

  이처럼 우리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에 있어서 정말로 그 사람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 사람과 함께하면 자신이 이상으로 삼던 모습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귀는 것도 크다. 이 사람과 함께있으면 내가 꿈꾸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거, 자기개발을 하지 않아도 뭔가 나아가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이상형을 만나도 그 사람과 함께하면 내가 꿈꾸던 모습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잖아? 그러면 단칼에 이별을 택하는게 바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 사람도 모르는 그사람이 원하는 이미지, 되고 싶은 이미지, 되어 보고 싶은 이미지를 먼저 찾아보아라. 처음에는 반발 효과로 오히려 아닌척 가리지만 결국에는 중력의 영향처럼 되고 싶은 이미지에 강력하게 이끌리게 될테니깐. 실제 가정폭력을 당한 남자 중에서 자기는 절대 아버지와 닮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 아버지와 닮게 행동하는 이유 역시, 상냥한 아버지를 가까이 보지 않아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구축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본인이 그 이미지를 좋아하니깐, 그런 이미지가 이루어질 때 편안함을 느끼고 나 답다고 느끼니깐 그런 것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의식적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일 확률이 더 크고 말이지.
 


  어떻게 하죠? 전 변태가 아닌데 본능적으로 여장하고 여자 화장실에 가는 것이 끌려요. 어떻게 하죠? 전 착실한 모범생이 되고 싶은데 본능적으로 일진이 되고 싶어요. 이처럼 본인이 되고 싶은 이미지는 현재의 불만 + 후회 + 이상향이 한대로 뭉쳐 본능의 이편에 서서 당신을 유혹하고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않고 죽을 때까지 그대를 따라다니며 어떨때는 더욱 강해져 범죄의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나는 이 이미지를 악마라고 부르고 싶은데, 왜냐면 이 이미지가 바로 현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 결과이자, 계속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거. 끝내는 상대방을 이용하면서 까지 그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바로 사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의 이유다.
 

 


  다만 이 자세가 어떤 탐구의 영역이여야지 절대 이해, 동감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이해하고 동감하는 주체는 늘 약자이니깐. 실제로도 그러잖아. 누가봐도 인간쓰레기인 사람이 있고 그의 곁을 떠나야 하는데 그와 엮인 약자는 “오늘 좀 기분이 나쁘니깐 이해해줘. 그사람 마음에 공감해줘.”라고 하거든. 사장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이해해줘야하는 것은 늘 회사원인 것처럼. 내게 있어서도 인간관계론은 더이상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석하고 피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짐승이자 맹수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의미가 없을 때가 더 많다. 어린 하마를 가족처럼 키우던 사육사가 자신은 하마를 다 알았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그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사람을 이해하지마라. 분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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