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행복한 일이 없다. 예전에는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저녁밥 먹는 게 낙이지만 이제 다 봤고, 유튜브를 보며 포테토칩을 먹는 것도 그 유튜버가 방송 은퇴를 하자 안 보게 되었다. 글 읽는 것도 재미없고 영어공부는 원래 재미없고 고전게임도 질리고 뭘해도 재미없다. 그렇다고 재미를 위해 사람을 만날 생각은 없다. 안그래도 학교와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인간관계로 풀라고? 거기다가 같이 놀자고 했는데 거절당하면 얼마나 쪽팔리는가. 사람을 통해 재미를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타인은 귀찮고 힘든 존재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해주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들어 고백했는데 거절할 수 있고, 친해지고 싶은데 거부할 수 있고, 내가 시간 내주고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무시할 수 있고, 반대로 집착해서 날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미묘한 선. 정의할 수 없는 감정. 너무 귀찮고 힘들다. 인간관계는 정말 너무 힘들다. 매번 변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더이상 이해하고, 생각하고, 고려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집에서 슈웹스 레몬토닉 마시고 포테토칩 먹으며 유튜브를 보는게 가장 확실하고 보증된 행복일 수 있다. 그래 유튜브. 요즘 유튜브가 대세라고 하지. 실제 사람을 보는 것보다 편집되고 각본이 짜여진 '사람 나오는 영상'이 더 인기있다.
사람들도 그걸 아는지 실제 사람을 만나기보다 간접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유튜브를 좋아하고 그 인기는 어느 것보다 많지 않은가. 자기가 원하는 검색어, 자기가 보고 싶은 상황, 자기가 보고 싶은 사람. 딱딱 검색하고 골라보기. 나중에 과학이 더 발전되면 동영상을 넘어서 진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창조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지 않을까? 잠깐만. 어쩌면 유튜브의 확장선은 피조물 만들기가 아닐까? 마치 우리가 원하는 영상을 유튜브로 보는 것처럼 신 역시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고 지켜 보는게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과학을 발전시켜 복제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싶은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상황을 함께 하고 싶은 것. 단지 유튜브처럼 지켜보는게 아닌 실제로 같이 하는 것. 내 마음대로! 과학만 발전되면 모든게 만사 오케이다.
남에게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고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더 나아가 나만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 신같은 피조물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 발전을 그렇게 갈구하고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시 명예와 신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과학으로 피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매드사이언티스트처럼 과학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하나의 괴물을 탄생, 아니, 괴물을 깨우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게임 포탈1에서 인공지능 컴퓨터 글라도스는 '과학을 위해서'라는 모토로 에퍼쳐 사이언스 안에서 혼자 실험을 한다. 그 실험용 쥐는 다름 아닌 인간.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실험에 피실험자는 죽고 뒤이은 피실험자 '첼'을 깨운다. 첼은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 괴물처럼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은 외형이 이상했으나 마음은 인간과 같았고 첼은 외형이 인간과 같았으나 마음이 독특했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글라도스는 실험 내내 비꼬지만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성대에 이상이 있거나 말을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다. 고집이 강한 그녀는 스스로 말을 하지 않았다. 첼은 오히려 글라도스보다 더욱 기계같다. 대신 그녀는 묵묵히 실험에 참가해 인공지능 컴퓨터조차 놀랄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다. 그 정도 수준이면 그녀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을 정도였고 글라도스는 흥미를 가진다. 동시에 두려움도 느낀다.
글라도스가 하는 실험이 무엇이냐. 바로 포탈건을 이용한 테스트다. 미니 블랙홀을 담고 있는 포탈건은 오버테크놀로지의 끝을 보여주는데 포탈건에 나오는 에너지 탄을 발산하면 파란색 포탈이 생기고, 두번째로 발사하면 주황색 포탈이 생긴다. 그리고 파란색 포탈에 들어가면 주황색 포탈로 나온다. 이 포탈건 테스트는 처음엔 단순하다. 아래 쪽 벽에 포탈을 발사하고 윗 쪽 벽에도 발사해 계단없이 올라가는 방법부터해서, 후에는 중력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방법까지 다양하다. 교육용 게임으로 지정될 정도이니 두뇌 플레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글라도스의 말로는 피실험자의 고향에 사는 사람의 신체 장기 가격과 소득 금액을 합친 금액보다 비싸다고 하며 그처럼 용도가 무궁무진한 무기이다. 더불어 이 포탈건은 포탈 게임안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모습 보기'이다. 이상하게 포탈 게임안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반사체가 없는 것이다. 거울도 없고, 물 웅덩이도 없고, 얼굴을 볼 수 있는 반사력 강한 유리도 없고. 더불어 첼의 모든 것을 감시하듯 보는 글라도스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첼은 포탈 건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이제 글라도스의 얼굴도 포탈건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서 볼 수 있겠지. 케이크와 자유를 준다고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이 실험실의 창조주 말이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로 가보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은 성공했지만 탄생된 피조물은 키가 거대하고 생긴것도 괴상한 괴물이였다. 피조물에게 도망치는 창조주. 어떻게 보면 첼이 글라도스보다 더 기계스러운 것처럼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괴물보다 더 괴물스러운 면이 있다. 신과 같은 위치에 다다르겠다고 연구했지만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복수심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을 죽이는 괴물. 그렇게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괴물은 한가지 부탁을 하는데 자신과 닮은 여자 피조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탄압받고 동시에 행복하고 단란한 다른 가족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실험을 하게 되지만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드는 신과 달리 그는 여자 괴물을 죽인다. 그 여자 괴물과 동참해 자신을 해칠 수도 있고 그런 괴물의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었기에. 이에 괴물은 날뛰고 분노한다. 창조주 자신도 외로움에 결혼하려고 하고 신부도 있으면서 자신에게는 왜이리 가혹하는가.
그리고 에퍼쳐 사이언스 안에 있는 괴물, 첼 역시 자신의 욕망을 애써 무시하는 실험실의 창조주에게 간다. 테스트를 너무도 훌륭하게 해낸 첼에게 오는 보상은 자유도 케이크도 아닌 뜨거운 용광로. 점점 죽음에 가까워질 때 첼은 글라도스의 감시카메라를 벗어나 새로운 길로 벗어난다. 프랑켄슈타인에게 바깥 세상은 힘든 공간이고 첼에게도 실험실은 그러한 공간이다. 차가운 바닥과 인간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 수 있는 터렛들, 독성 물질과 신경독. 그녀는 이 곳을 나가야지만 살 수 있다. 괴물도, 첼도 평온과 자유를 갈구하는 감정을 가지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아무리 창조주라고 자신의 마음을 막는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 괴물은 분노심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될 사람을 죽였고 첼은 글라도스를 죽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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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만난 실험실의 주인 글라도스는 쏘아붙듯 말한다. 고통과 아픔이 자신의 전유물인 듯이 소리치는 것이다. 괴물에게 신부를 잃어 그를 복수하고 싶어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첼은 포탈건을 이용해 글라도스의 로켓 공격을 스스로에게 맞도록 만든다. 코어가 하나씩 부서지고, 그녀의 빈정거림의 강도가 높아질 때 쯤 글라도스는 박살난다.
당신과 나의 차이는 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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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도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고통만을 이야기한다. 첼에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건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이다. 반 미치광이로 북극에서 발견되고 배 위에서 씁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글라도스는 파괴되고 첼은 폭팔에 휘말려 지상밖으로 나가게 된다. 눈을 떠보니 파괴된 글라도스의 잔해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장면은 에퍼쳐 사이언스 실험실 깊숙한 곳에 있는 케이크. 첼을 위해 준비한 케이크는 기계팔이 내려와 촛불을 끄고 엔딩크레딧 노래는 STILL ALIVE가 나오며 글라도스는 자신의 실험이 성공했다며 노래를 부른다. 문득 포탈 개발자들이 했던 말이 생각나는데 글라도스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험실에서 혼자서 반복적인 실험을 평생하고 있었던 그녀. 그런 지루한 반복을 깨부수어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다는 거지.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그랬었던 걸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마지막에 죽는다. 그리고 글라도스도 죽는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신의 피조물로 인하여 죽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모두 피조물이자 타인의 욕망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했고 억제하려고 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도, 내가 원하는 상황도, 내가 원하는 순간이 모두 있는 유튜브. 그런 유토피아에 빠져있는 우리. 타인은 지옥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영 불편하고 앞으로도 계속 불편할 것이니깐. 그런데 유튜브가 사람과의 부재의 해결책이긴 할까? V-log를 통해 아예 일상까지 보는 수준인데 그걸 보고 나면 정말 허무함이 사라질까? 내가 하고 싶은거 보고 싶은걸 보게 만드는 과학 발전은 사람을 유아기로 퇴행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언젠가 대화할 수준의 인공지능이 나올때면 다들 자기의 말에 맞장구 쳐주는 로봇을 만나지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 테니깐. 다만 자기가 생각하고 대화할 수준의 피조물이라면 자연적으로 자기 생각도 가지게 되고,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나 첼처럼 반항하게 될텐데 그때는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그렇다. 피조물을 만들기 전에 피조물에게도 마음이 있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가정을 미리 각오하고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사람 얼굴을 마주보는 시간보다 컴퓨터와 핸드폰을 보는 시간이 더 긴 시대이다. 나같은 경우에도 당연히 핸드폰과 컴퓨터를 보는 시간이 더 길다. 사실 이건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맛에 딱맞는 것이 컴퓨터와 스마트폰 안에 있는데 뭐하러 사람을 만나는가.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글라도스나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인다. 반사체가 없어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에퍼쳐 사이언스 실험실처럼 자신과 상대방을 보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사물을 깊숙히 보는 나만의 철학과 윤리없이 과학만 발전하다가는 글라도스와 빅터 프랑켄슈타인 꼴이 될지도 모른다. 피아제의 '세산실험' 속 아이들처럼, 자기가 본 것이 맞다고만 하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
과학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두 창조주. 그런 창조주를 파괴했던 피조물. 포탈1 시리즈 후 포탈2에서 글라도스는 첼을 위해 노래를 바친다. Cara Mia Addio! "내가 사랑하는 아이야. 멀어지지 않겠니? 그래, 과학에서 멀어지렴."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아직 우리는 과학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너무나도 외로워 내가보고 싶은 사람이 나오는 유튜브를 틀고, 피조물을 만들어 곁에 두게 만든다고 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외로움에 무작정 연애를 하면 끝이 좋지 않은 것처럼. 그러면 우리가 피조물을 만들고 과학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성숙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 자신과 같은 인간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아예 전쟁과 분쟁도 없는 시점이라면 가능하겠지? 그때쯤이면 인간과 유사한 피조물의 마음도 이해하고 반항심에 대해 미리 파악할 수 있고 예방할 수 있으니깐. 그런데 그런 시기가 오긴 할까? 우리가 유튜브도 보지않고, 외로워서 피조물을 만들지 않을 경지가 되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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