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문이는 강민이 부사장이라고 하길래 다른 직급에 비해 업무가 적을 줄 알았지만 워커 홀릭에 완벽주의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직속 관활한 QC부서가 다른 부서에 비해 일이 많은 건지 몰라도 새벽이 되고 나서야 퇴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불 꺼진 어두운 회사 복도에 구두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구두 소리에 따라 들리는 하이힐 소리. 그리고 그 하이힐 소리 뒤로 기운 다 빠진 남자의 구두 소리. 생긴 건 삐쩍 꼬라서는 새벽까지 일할 기운은 어디서 나는 건지... 피곤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재문이었지만 피곤한 역력을 최대한 감추며 뒤따라갔고 이제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만 타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데, 하아... 역시 골초답게 차타는 잠깐의 시간을 못참아서는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 담배필 준비를 했고 재문이 역시 한숨을 쉬며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민이와 일정 간격 떨어져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경호로봇. 그리고 그런 경호로봇보다 더 떨어져 서 있는 재문이는 어둠속에서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그를 예의 주시했다. 처음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자신을 매우 거슬려했던 민이었지만 이젠 엔젤을 대하는 것처럼 편하게, 인공지능이 뛰어난 챗봇을 대하는 것처럼 오히려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저거랑 같이 서 있으니깐 꼭 경호 로봇같다.
...
로봇 같다고 임마.
낮까지만해도 먼저 말을 걸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덥잖은 말로 시비 거는 중년 남자. 재문이는 너희 경호로봇이랑 단둘이 이야기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신 로봇에게 왜 음성 출력 기능을 달지 않았냐고 돌려 물었다. 그러면 진짜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을 낼 수 있지 않냐면서 말이지.
왜냐면 뺏으니깐. 옆에서 쫑알쫑알 거리는 거 얼마나 듣기 싫은지 아냐?
...
안그래도 사장님 때문에 기분 더러워 죽겠는데 쉬지도 않고 뭐라하더라.
...
그래서 입벌리라 하고 확 뽑아버렸지.
...
빼고 나니깐 진작에 왜 안뺐나 싶더라. 역시 여자는 조용해야지 예뻐.
예쁘장하게 생긴 외형과 달리 마초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모습에 재문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분명 그에 대한 파악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허물을 벗는 뱀처럼 자꾸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다시 재문이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뱀상. 아니면 독사상. 보통의 남자보다 갸름한 턱선과 얇은 눈썹과 입술. 그리고 섬세하게 긴 손가락. 언뜻 보면 머리가 짧은 여자로 보일만큼 그는 미려한 얼굴을 가졌다. 하지만 또 완전히 여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굵은 목소리톤부터해서 뚜렷하게 보이는 목젖. 그리고 직원들이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독재적이고 터프한 성격. 그런 두가지 특징이 뒤섞여 중성적인 매력이 되고, 육감적이고도 관능적인 면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나 재문이는 추측했다.
만약 여자로 태어났다면 독부(毒婦)의 전형이겠지. 기분에 휩쓸려 남자와 하룻밤 자지만 또 다시 기분에 휩쓸려 자신과 잤던 남자를 죽이는 여자로. 뱀처럼 유연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마음과 기분과 정의가 움직이는 사람. 예측 불허한 일을 벌이는 재해 같은 사람이자, 재문이가 제일 싫어하는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최악의 남자를 26번은 잘생기고 괜찮은 남자라고 했으니... 명백한 오판이겠지. 밥만 먹다가 처음으로 빵을 먹은 사람이 그게 고급 음식인줄 착각하는 것처럼 서구적으로 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그가 그렇게 보인거겠지. 어디 삐쩍 꼬르게 생기고 성격 괴악한 남자가 잘생겼다고? 좆같이 어이가 없네.

...
...
너 뭐라고 했냐?
순간 재문이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남자에게 ‘좆같이’라는 말을 들은 민이는 그보다 더 놀라했다.
너 지금 나한테 좆같이 어이 없다고 했냐?
아니... 그냥 아는 사람 말이 생각나서요.
뭔데.
아무 말도 아닙니다.
말해라.
별거 아닌데.
말해!
안그래도 뱀처럼 생겼는데 거기에 쭉 찢어진 눈, 게다가 보통 남자들보다 예리한 직감을 가진 그였기에 어줍잖은 거짓말 할바에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이 당신 보고 잘생겼다고 한게 생각나서요.
아... 진짜?
하지만 그 사람 오판 한 게 분명하니 오해하지 마세요. 이색적인 얼굴이지 잘생긴 건 아니니깐.
...
그러니깐 일반 동양인과는 좀 다른 서구적인 얼굴이지 그게 잘생긴건 아니잖아요.
...
어떤 차이에서 오는 간극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아시겠죠?
풋!
무슨 성능 떨어진 챗봇도 아니고 조악한 단어 선택하고는. 웃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자신을 불쾌하게 보는 눈빛과 이까지 드러내며 치를 떠를 떠는 재문이의 모습에 민이는 제대로 웃음이 터졌는지 꺽꺽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그 순간 학술원에서 남 괴로운 모습에 웃음 포인트가 있는 애가 떠올랐고 재문이는 민이가 바로 그런 스타일이라고 파악했다. 그 사람, 고통을 주는 것과 받는 것 모두 즐기는 쾌락주의자에 사도마조히즘 변태였는데 말이지.
야! 형이 잘생겼다는 소리 인정하기 싫은거냐? 어디 이상한 자존심만 있어서는.
...
인정할 건 인정해야 남자인거야. 알았냐 게이야?
...
됐고 너 나한테 담배 배워볼래? 혼자피니 재미없다.
...
같이 피면서 이야기도하고 사람 뒤담화도 하는 거야. 그게 사회생활이지.
아침 회의 때문에 하루종일 우울했는데 칭찬과 더불어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 재문이 때문에 기분 좋아진 민이는 그에게로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건내주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직원에게도 보이지 않은 친절을 고작 잘생겼다는 말 한마디에 배풀었는데, 문제는 비흡연자인 재문이는 그 친절이 싫었는지 고개를 흔들었고 그럴수록 민이는 강하게 담배를 내밀었다.
형이 친절히 알려줄게 임마. 한개비 물어봐.
...
물어보라고 새끼야.
결국 담배를 강제로 입에 쑤셔 넣는 순간, 선을 제대로 넘었다 생각한 재문이는 빠른 속도로 쳐냈고 담배는 골목 저 끝으로 날아갔다. 정말... 용기내어 배푼 호의인데. 태어나서 손에 꼽을 정도로 먼저 배푼 호의가 거절로 돌아오자 방금까지만해도 싱글벙글하던 남자의 표정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나 일순간에 냉혈한에 비견될 정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싹 바뀌면서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제 니 앞에 하루종일 담배 펴야겠다.
...
담배도 안폈는데 간접 흡연으로 폐암 걸리게 해야지.
...
그래서 목매달고 자살하게 만드는 거야.
...
이 씨발 새끼야.
이번에도 역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삐진 여중생과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 괴씸해하는 독재자의 이중적인 모습으로 재문이를 아리송하게 만들었고, 그 사이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는 하얀 독사처럼 우아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목을 감싸안으며 모멸감이라는 독니로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모멸감은 재문이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독이 통하지 않는 미지의 괴물처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짜식... 민이는 조카대하듯 재문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자신이 감시 당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어린놈은 어린 놈이니깐. 호랑이라도 새끼 때는 귀여우니깐.
그래도 조금은, 물론 아주 조금이지만 재문이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민이는 차로 걸어가는 동안 저녁 인사를 건네주었다. 조심히 가라고. 그리고 내일 또 보자고. 반면 재문이는 남에게 모멸감 주는 것을 즐기고 성격이 괴악한 그를 또 만날 생각에 기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26번은 오판한 것이 맞다고 느꼈으니, 물론 매력적이고 잘생긴 건 인정한다. 미남에 속한 편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괜찮은 남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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